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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14-54

by Mark Yang   04/23/2022   Luke 11:14~54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4강

요나의 표적

말씀/ 누가복음 11:14-54
요절/ 누가복음 11: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를 고쳐주신 사건에 대해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성령의 역사를 왜곡해서 비판하며 예수님을 시험하여 표적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삐둘어진 이들을 고쳐주시고자 상한 심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모든 인간적인 생각과 표적을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말씀에 대한 겸비한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예수님과 바알세불 (14-28)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시자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이때까지 그 사람이 벙어리 된 것은 귀신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하기도 하고 간질병에 걸려 발작하게 하기도 하고 꼬부라져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눅 9:39, 13:11). 귀신은 사람을 운명의 노예가 되게 하기도 하고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귀신은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못쓰게 만듭니다. 어느 누구도 그 귀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벙어리가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놀라운 메시야의 역사였습니다(사 35:5, 42:7, 61:1).

이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무리들은 이를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했습니다. 벙어리가 말하게 된 것은 누가 보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를 인간적으로 보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마 9:34). 그들 중 더러는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15),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16). 그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해서 비판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 편에서 보지 않고 인간 편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 때문에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한 사건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느냐, 인간 편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 편에서 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 편에서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오늘날 UBF를 통하여 한국 캠퍼스 지성인들과 미국과 서독,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 캠퍼스 지성인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복음역사는 누가 보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지 아니하고는 이런 기적과 같은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인본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저희 생각을 아시고 그들의 비난이 논리적으로 모순됨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만일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사단의 나라가 스스로 싸우는 격이 되니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중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내면 그들도 마찬가지이므로 그들의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19).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으니라.”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 곧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마 12: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되면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때까지 귀신이 그 사람을 다스렸는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강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합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와 싸워 이길 때에는 무장을 빼앗아 버리고 재물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후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약한 자를 하지 않고 강한 자라고 하시고 예수님 자신은 더 강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마치 바로 왕과 같이 강합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인간은 강한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혀 신음합니다. 어떤 분은 겸손해지려고 손을 깨물어 혈서를 써도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 집니다. 또 음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더 음란한 새생각이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이는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강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단의 세력은 죄의 세력이요 죽음의 세력입니다. 사단보다 더 강한 자가 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 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과 확신을 줍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볼 때 온통 사단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와 공의는 짓밟히고 어두움의 세력이 우리의 영혼을 질시시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단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으며 거짓과 불의가 진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무신론 교육을 시킵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강제노동 수용소에 집어 넣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경우는 혀를 뽑아 버립니다. 이렇게 핍박하면 강한 사단의 세력 앞에 복음역사가 멸절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핍박하면 할수록 소련의 지하교회는 더욱 왕성한 복음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하면 10사람의 신자가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사단은 강하지만 우리가 더 강한 예수님을 굳게 의지할 때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의 인생을 살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말씀은 영적 세계에서는 중립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은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양다리를 걸치면서 적당히 사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의 편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 아니면 죄의 종이 됩니다(롬 6:6,7).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적극적으로 사단과 싸우지 아니하면 사단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를 24-26절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쫓겨 났을 때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가거 나온 집이 그리워 돌아와 보니 집이 소제되고 깨끗이 수리되었습니다. 그 귀신은 혼자 있기 아까워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와서 함께 거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저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살지 않을 때 고침을 받기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악령에 시달리며 괴로워 하다가 말씀을 공부하고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좀 살만해지면 사명인의 생활을 부담스러워 하고 욕심을 부리며 자행자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전 상태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정신병원에 가보면 예수님을 한번 믿었다가 구원의 은혜를 배반한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13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말씀을 하실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이 여자는 불량한 아들로 많은 고생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지혜롭고 능력 많으신 훌륭한 아들을 낳고 기른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부러워했습니다. 이 여자는 복의 개념은 인간적입니다. 오늘날도 부모들은 자식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가장 복되게 생각하고 그런 아들을 둔 부모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자가 가장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야 복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세상 명예나 타이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가장 복되다고 하십니다. 사실 행복이란 외적인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부와 권세를 소유한다 할지라도 심령에 참 평안이 없고 악령에 시달린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 주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생명과 평안과 참된 소망을 줍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시 119:2). 우리가 정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좇아 살고자 투쟁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역사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II. 요나보다 더 큰 이 (29-36)

29-36절까지의 말씀은 16절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16). 29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님은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표적을 구하는 동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벙어리가 말을 하는 놀라운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40절에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수나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바다에 빠지게 하시고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후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은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완전히 땅 속에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의 표적이 되어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생들에게 그리스도로서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이 표적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최대의 표적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표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 인생들을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롬 1:16). 우리가 숨은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고 복음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희망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심령의 병과 육신의 질병도 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생활에서 하나님께 다른 표적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거나 취직이나 아르바이트 자리를 위해 기도할 때 주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그리고 구한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불신하고 원망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31,3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많은 예물을 싣고 예루살렘까지 찾아 왔습니다. 스바 여왕은 진리를 사모하는 불타는 영적소원 때문에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훨씬 지혜로운 분으로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 되십니다(골 2:3). 그러나 사람들은 엄청난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전혀 반응이 없고 영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찬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요나를 보내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들이 제발 회개하고 구원받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억지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백성들은 이런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재를 무릅쓰고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 겸비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비판만 일삼고 표적만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 가를 배우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제가 주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소원이 사라지고 말씀 앞에 교만한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권에 있는 신자들은 성경을 구하기가 힘들어 말씀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는지 신약성경이라도 한권 얻게 되면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한 없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옆에 두고도 읽기에 게으릅니다. 심판 날에 그들로부터 정죄받을까 두렵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이 저의 심령에 새롭게 부딪혀 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또한 시편기자가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내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표적을 구하는 자들의 문제는 말씀보다도 방언이나 이적과 같은 신비한 능력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을 듣고 진실되게 회개하고 투쟁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자신을 살펴 보도록 말씀해 주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들어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을 보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쳐 주셨습니다(요 8:12).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복음의 빛을 받아 들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눈이 나쁘면 복음의 빛을 잘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내면도 어둡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좋으면 빛을 잘 영접할 수 있으므로 내면도 밝고 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항상 살펴봐야 합니다. 마음의 눈은 숨은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낮출 때만이 좋아합니다.

III.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책망하신 예수님 (37-54)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감동이 되었는지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이에 응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배가 고프셨는지 손도 씻지 않고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자유스러운 분이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손을 씻지 않고 잘 먹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규례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어기면 율법을 어기는 것과 동일한 죄를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랍비는 감옥에서 간신히 목을 축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만큼의 물을 주었는데 손을 씻고 마실 물이 없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겉은 깨끗이 했으나 속은 온갖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에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겉보다 안을 깨끗케 하며 구제하는 생활을 통해 탐욕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40,41).

그 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형식과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착실히 잘 내었으나 공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내면에는 평토장한 무덤 같이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요 5:42-44).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심히 책망하시자 옆에 있던 한 율법사가 자존심이 상하여 점잖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사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지키기 힘든 까다로운 규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자신들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46). 그들은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며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은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습니다. 율법사는 말씀을 잘 풀어서 양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유전을 더 지키게 함으로서 구원의 길을 막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완악해져서 맹렬히 달라 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며 예수님의 말을 꼬투리 잡고자 목을 지켰습니다(53,54).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적으로 보고 비판하는 마음과 표적을 구하는 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스바 여왕과 니느웨 백성과 같이 말씀에 대한 겸비한 자세와 불타는 영적 소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