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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12

by Mark Yang   04/23/2022   Luke 12:1~1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5강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말씀/ 누가복음 12:1-12
요절/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11:39-52절에서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사정없이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한 세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영향을 끼치는 진실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모르는 진실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외식을 주의라 (1-3)

1절을 상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동안에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보고 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양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목자의 심정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사모하여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역사는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들떠서 숫자에 말려들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몰려오는 무리들보다 제자들의 신앙성장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관심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에 있지 않으시고 항상 소수의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 시작부터 끝까지 소수의 제자양성에 힘쓰셨습니다. 복음 역사의 성공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경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특히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외식이란 본래 희랍의 연극 용어로서 무대에서 배역을 맡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겉과 속이 다르고 진실치 못한 이중적인 의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은 의롭고 진실되고 경건한 척 하였으나 그 내면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찼습니다(11:39). 그들은 십일조도 열심히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도 하며 성경도 열심히 읽고 식사 전에 손도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사람들에게 옳게 보여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데 있었습니다(마 23:28).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유익을 취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외식은 그 시대에 무서운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누룩이라고 하였습니다. 누룩은 떡 반죽에 조금만 넣어도 온 떡 덩어리를 부풀게 합니다(고전 5:6). 누룩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섭게 침투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외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침투하여 사람을 거짓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누룩이란 좋지 못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영향력보다도 좋지 못한 영향력을 더 쉽게 받습니다.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가지고 힘써 주의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악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외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은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속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비밀이 있으면 가장 믿을만한 친한 친구에게 너에게만 이야기 하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까지 말하면서 다 이야기 해 줍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결국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져 버립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안보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자신이 죄를 감춘다 해도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한 것이 집 위에서 나팔을 부는 것처럼 전파됩니다(3). 우리가 일시적으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으며 또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갈 6:7).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히 4:13).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고후 5:10). 우리가 눈가림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사람이 보나 안보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에게 물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큰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지도자는 좋든 좋지 않든 어떤 모양으로든지 영향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인 경우는 외적인 생활에 영향력을 끼치지만 영적 지도자는 내면 생활에 영향력을 미쳐 그 영혼을 구원하느냐 파멸시키느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낳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을 본받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아서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빛된 삶이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할지라도 숨김 없이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빛된 삶을 살 때 점점 그 내면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II. 마땅히 두려워할 자(4-7)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고 제자들은 영적으로 어린 자들이지만 친구 삼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시다가 왜 갑자기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이는 제자들이 외식하지 않고 믿음으로 진실되게 살면 반드시 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9절에서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롯과 같이 적당히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신앙 생활을 하면 아무런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기초하여 절대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조롱이 있습니다. 학교 선배나 직장 상관들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핍박이 있습니다. 소련에서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가지고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사형에 처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채찍에 맞기도 하고 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인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핍박을 받을 때 내면에 두려움이 생기기 쉽습니다. 특히 권세자들이 핍박을 할 때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직장의 상관이 핍박을 하게 되면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합니다. 나 한 사람 굶는 것은 괜찮지만 처자식이 굶어 죽을 것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부모님들이 등록금과 생활비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면 이러다가 학교도 못다니고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면에 두려움이 생기면 심령의 위축되고 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꼭 이렇게까지 절대적으로 믿을 필요가 있는가 회의하며 타협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신앙생활마저 포기해 버립니다.

문제는 외적인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 생기는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만 이길 수 있다면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핍박 받을 때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하고자 애써 투쟁합니다. ‘고난이여 오라!'하며 큰 소리도 치며 태연한 척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생겨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는 사단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을 심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이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이 우리의 심장에 꽂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고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떠게 속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핍박자들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4). 핍박자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은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핍박자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하고 투쟁을 하게 되면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은 다음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이 더 문제입니다. 핍박자들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 때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신앙을 가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참으로 권세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데 낸들 못들어 가겠느냐고 말합니다. 또 천당에는 재미가 없어 못가겠다고 지옥에 가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너나 예수믿고 천당하고 나는 지옥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계 20:8). 이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는 곳입니다(막 9:48,49).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연락을 즐기다가 죽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하였습니다(눅 16:,23,24). 지옥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어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시 118:6)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 분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판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공포에만 떨 수밖에 없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참새는 한 앗사리온에 둘이 팔립ㄴ다. 한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16로서 가장 작은 화폐단위입니다. 두 앗사리온이면 참새 4마라에다 한마디를 덤으로 더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찮은 미물까지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이야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실 만큼 섬세하게 보호하고 계십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 속에 던져 넣었지만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습니다(단 3:27). 또 다니엘은 믿음의 순결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져졌으니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단 6:22). 오늘날도 하나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할 때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 가는 것은 괜찮은데 요사이 바람이 자꾸 소련으로 불고 있습니다. 소련을 위해 기도하면 강제 노동수용소가 자꾸 생각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지만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주십니다. 핍박자들이 아무리 생명을 위협해도 근본적으로 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세상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권세잡은 자들을 두려워 했을 때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자 모두 도망 갈 수 밖에 없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방문을 안에서 꼭 걸어 잠그고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가진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떠들썩하도록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며, 권세자들 앞에서도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행 4:19). 사람이 속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에는 힘이 있고 걸음걸이가 힘차며 눈에는 빛이 나게 됩니다. 생활에 박력이 생기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소심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결국 사단의 종이 되어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됩니다.

III.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 (8-12)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소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핍박은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가정에 핍박이 있을 때 이는 가정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자들이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증거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게 됩니다(계 3:5). 이는 엄청난 영적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고난은 잠시 뿐이지만 그 영적 축복과 영광은 영원합니다(롬 8:18).

그러나 만일 두려움 때문에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게 됩니다(9). 심판날에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하념 끝장입니다. 그때는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든지 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폴리캅은 화형을 당할 때 그 인격이 너무 훌륭하여 재판관이 “네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그리스도께서 한번도 나를 부인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하며 기쁨으로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영적 무지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회개하면 사하심을 받을 수 있으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차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그들은 무엇으로 대답할 것인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때에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성령을 굳게 의지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능히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악합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진실되게 사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핍박합니다. 이는 신자들의 빛된 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절대적인 자세로 믿음으로 살게 되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로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