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12 강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5:16-47
요절: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믿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영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메시야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 거짓 메시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는 풍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밝히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셔서 영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16-30)
첫째, 예수님의 일의 철학(16-18)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를 심방하셔서 그 중에서 대표 병자인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 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한 몹쓸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안식일 법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식과 제도에 얽매여 영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핍박으로 인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왜 안식일에도 일하시는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신 후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을 쉬신 것이지 우주를 섭리하시는 일은 결코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또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섭리’(providence)라고 합니다. 안식일에도 해는 뜨고 지며 태양은 빛납니다. 또한 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며 강물은 흐릅니다. 안식일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죽는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일 태양이 매일 운행하는 것이 피곤하여 안식일이라고 해서 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일하시지 않는다면 창조된 세계는 보존될 수 없으며, 인간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돌보시기 위해 끈임없이 일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인류 구속 역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구속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마침내는 약속하신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을 통해 세계 각처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는 쉼이 없습니다.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일의 철학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일하시는 기준과 동기는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좌우되기를 잘합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으면 일을 열심히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일하지 않습니다. 일할 환경이 마련되고 상황이 좋으면 일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하지 않습니다. 일의 성과가 좋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면 열심히 일하지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별로 열매가 없으면 일할 의욕을 상실하고 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여 돌본 양이 구원의 은혜를 배반하고 세상 욕심을 좇아 가게 되면 심한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무리 수고해도 결국 이렇게 도망갈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과 회의 때문에 무기력하게 지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 어느 시대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진리의 전당이라고 하는 캠퍼스는 과거와 같이 인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생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현실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캠퍼스 분위기가 힘들어서 일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 상황이 아무리 힘들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건 말건, 양들이 은혜를 배반하건 말건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 하여 신성모독죄로 몰아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생명의 부여자요 심판자가 되시는 예수님(19-23)
19-23절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아버지께 보고 들은 바를 행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은 성자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성부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무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똑 같이 행동하시며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기이히 여기게 하십니다(20).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다 압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기 분신처럼 생각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행하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성부는 성자에게 창조와 섭리의 일은 보이셨고 또 앞으로 심판과 부활과 같은 더 큰 일도 보이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생명의 부여자가 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예수님은 38년 된 고질 병자를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생명의 부여자가 되십니다. 사단이 하는 일은 생명을 죽이고 파괴시키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생명을 주고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십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심판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다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세상 끝날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고후 5:10).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심판의 대권을 맡기신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입니다(23).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4-30)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어떤 자가 영적 축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그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심판을 면제시켜 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였습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를 의미합니다. 이 죽은 자가 살아나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들을 때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듣는 그 순간부터 살아나서 생명이 약동하는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현재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도 생명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26,27). 28,29절을 보십시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지막 날에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각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고 또 심판을 받습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다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가, 아니면 자기 유익을 구했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V.T.R 녹음 테이프에 낱낱이 기록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정확합니다. 그날에 예수님께서 각자의 지난 날의 생애가 녹음된 V.T.R 테이프를 재생하실 때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상 24-28절에서 듣는다는 말씀이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쇼펜하우어의 음성을 듣는 자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사단의 음성을 듣는 자는 영적 생명을 잃고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죽음이나 심판을 맛보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사망의 세계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허무, 무의미, 운명, 패배, 불안, 두려움 등 어두움과 죽음의 요소가 가득찬 곳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심령에 참된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음이 없고 웃어도 쓴 웃음을 짓습니다. 또 사망의 세계는 미움, 시기, 질투, 중상 모략, 살인, 강도, 강간 등 갖가지 죄악이 지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어떠합니까? 생명의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사랑과 평화의 세계입니다. 또한 기쁨과 희망의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또 사망의 세계는 율법과 정죄이지만 생명의 세계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세계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은혜의 세계는 허물과 약점을 꼬집고 비판하는 대신 허물을 감싸주고 약점을 감당해 줍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세계 속에서 믿음으로 실수도 하며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영적 축복을 누리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하고 업적이 필요하고 선한 생활 등 엄청난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정말 너무나 쉽고 단순합니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깊이 듣게 되면 내 속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 가고 밝고 환한 생명의 빛이 내 속에서 약동하게 됩니다. 저는 과거 과부의 외아들로서 슬픈 운명에 울던 자였습니다. 또한 매사에 부정적이고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 말씀을 마음을 바쳐 공부하고 주님의 음성에 깊이 기우렸을 때 내 속에 역사하던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는 인간이 사단의 음성을 듣고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희락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 때는 무한히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여자가 홀로 있을 때 사단이 조용히 찾아와 속삭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사단은 여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심었습니다. 여자가 사단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자 여자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사단의 음성을 들은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사단의 음성을 듣는 순간 생명의 세계에서 사망의 세계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행복의 세계에서 저주의 세계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사단의 음성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 같지만 결국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무서운 독소가 있습니다. 사단의 음성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심습니다. 또 마음에 교만을 심습니다. 십자가보다도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속삭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을 심습니다. 절대적인 순종을 심습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참 기쁨을 줍니다. 우리는 평소 주위 사람들로부터 또 내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많은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믿음을 심는 소리인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영적 생명을 앗아가는 소리인지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세미하게 잘 듣지만 싫어하는 것은 듣지 않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잘 들으려면 무엇보다 겸손해야 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듣는대로 심판하시고 또 자신을 기쁘게 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의롭습니다.
Ⅱ. 예수님에 관한 증거(31-47)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그들을 도와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영접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31,32,37,38): 31,32절을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증거하면 그 증거는 참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증거하는 이가 따로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예수님께 대한 증거는 참됩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가 되시며 거짓을 모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막1:11, 9:7)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증거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도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아니 하였습니다(37,38a).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8b). 예수님께 대한 불신이 그들의 영적 눈을 감기게 한 것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증거(32-35):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고결한 삶과 회개의 메시지로 인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관해서 증거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요한은 어두운 그 시대를 비추이는 등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례 요한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언급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역사(36):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힘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 많은 능력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시고,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기도 하시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역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인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요20:30,31).
넷째, 성경의 증거(39-47): 성경은 저자와 저작 연대와 장소가 각각 다르지만 한가지 줄기차게 흐르는 통일된 사상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탄생 방법, 탄생지, 그의 생애, 그가 받으실 고난과 부활 등 그리스도의 전반에 걸쳐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이는 크게 모순됩니다.
41-47절은 유대인들의 불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영광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고소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모세입니다. 그들은 모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모세를 믿었더라면 그가 증거한 예수님도 믿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 사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에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