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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1-35

by Mark Yang   04/23/2022   Luke 14:1~35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10 강 

천국 잔치

말씀/ 누가복음 14:1-35
요절/ 누가복음 14:21b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
                      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
                      니라.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잔치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의 잔치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치는 가난하고 병든 죄인들을 초청하여 은혜를 베푸는 천국잔치입니다. 바리새인의 잔치는 은혜가 없지만 하나님의 잔치는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천국 잔치를 배설하시고 죄 많은 인생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자 합니다.

. 바리새인의 잔치(1-14)

  1절을 보십시오. 어느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 두령이 예수님을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바리새인 중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랍비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그 사회에서 지도급 인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아마 그 집의 정원은 넓고 분수대가 있고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또 그가 초청한 손님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로서 Ph.D을 딴 저명인사들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님도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초청을 하든지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잡수신 후에 책망하실 것은 분명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만찬을 베풀고 손님을 초대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음식은 안식일 전날에 만들어서 따뜻하게 보존하였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안식일에 손님 대접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잔치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1b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안식일에 병고치실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창병은 과도한 수분으로 말미암아 몸이 붓는 병입니다. 이 병은 대개 콩팥이 나쁠 경우 생긴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의학으로서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창병으로 얼마나 많은 고충에 시달렸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목자로서 마땅히 병든 한 양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예수님을 고소하는 미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숨은 의도를 아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3). 이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과연 모세의 율법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으로 굳어 있는 그들의 양심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 조항에만 얽매여 율법의 참된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심정은 메말라 있었고 사랑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4a).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자마자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것도 잊으시고 고창병으로 고통하는 한 병든 사람에게 온통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시는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줄 경우 그들을 당황케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될 것을 잘 아셨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병든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데려다가 즉시 고쳐주신 후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귀신으로 인해 참 안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귀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 참된 안식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고침 받은 후 날아갈듯한 기분으로 갔을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도 무조건 살려놓고 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온 몸에 물이 차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고쳐 주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주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양심이 찔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6). 본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양무리들의 목자였습니다. 그들이 목자의 직분을 감당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것을 중단하고 형식에 얽매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심령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부패한 내면은 상좌 택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당시 식탁은 U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 가운데가 상석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상석에 앉고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높이 되고자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들은 말석에 앉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고 상석에 앉아야 존경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열에 예민했으며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오는가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높은 자리에 앉아 목에 힘을 주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든지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만일 상석에 목에 힘을 주고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올 경우 말석으로 쫓겨난다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말석에 앉았다가 청한 자가 와서 올라 앉으라 하면 얼마나 영광이 되겠습니까?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진정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를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가 무엇이나 된 양 생각하고 자기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이런 자는 자기를 높이는 만큼 남을 낮춥니다. 남을 무시하고 깔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무시하는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자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이런 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잘 압니다. 자신이 별볼일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알기 때문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깁니다. 자기 유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런 자는 자기 위치와 분수를 잘알고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이런 자는 근본적으로 사람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삽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높이십니다. 겸손한 자는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지려면 자기를 낮추는 투쟁을 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적극적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높여야 높은 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지위를 얻고 자기를 높이고자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에서는 이와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높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44). 사도 베드로는 자기를 나타내고자 영웅심리를 가지고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예수님의 겸손의 도리를 마음으로 영접했을 때 젊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5,6). 사도 바울은 본래 상당히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죄인으로서 자아발견을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 때 그는 한없이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데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높이고자 속이 시끄러운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청한 자들에게 잔치를 베풀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도로 청하면 갚음이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초청하는 동기가 이기적임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자만 초청했습니다. 그들은 실리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친구를 사귀거나 양을 칠 때 실리적으로 하기 쉽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니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을 잔치에 초청해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요 또 아무리 도와 주어도 그들로 부터 기대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초청하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또 이런 자들은 자의식이 많고 내면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깊은 겸손과 섬세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도와 주다가 언제까지 무한정 희생만 해야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인해 피해 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기쁨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희생할 수가 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주님께서 반드시 넘치도록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고 계속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컵을 대접하는 것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막9:41).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십니다.(히11:6, 창15:1)

. 하나님의 잔치(15 24)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의인들의 부활과 그날에 받을 축복에 대해 말씀하시자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부활시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여 영광을 누릴 것을 생각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천국잔치의 성격과 어떤 자들이 이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가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주인은 불고기, 탕수육, 해물잡탕, 양장피 등 각종 진기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음식 뿐만 아니라 손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음악제와 발레, 러시안 댄싱, 중국, 인도, 버마, 멕시코, 아프리카 춤 등 각 나라 춤과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무엇보다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풍성한 생명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귀한 손님들을 많이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잔치할 시간이 되어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정중히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 일치하게 사양했습니다. 당시 풍습은 일단 초대를 받고 난 후 두번째 초대를 거절하며 주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늘날도 아랍인들 간에는 두번째 초대를 거절할 경우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첫번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잔치에 오기를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겠고 또 하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나는 장가 들었으니 못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주  의 초청을 소홀이 여기고 자기 일을 더 중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도 세상일을  중히 여기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 청함 받은 자들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많은 특권과 축복을 받았습니다(롬9:1-5).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만민과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출19:6).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천국 잔치를 예비하시고 초청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그러나 그들은 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사랑을 감사치 않고 물질적으로 번영한 강대국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강대국보다 정치적, 경제적 강대국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구원의 초청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주인은 노발대발 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잔치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잔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여서 밭을 살 수 없고 소를 시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로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방적인 은혜로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임한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과 저는 자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인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이르렀습니다(롬11:11).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하셨습니다(롬10:11,12). 우리도 본래 이방인으로서 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습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불순종의 영을 받아 진리를 거스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원수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행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엡2:1-5). 우리는 모두 영적인 소경이요 절름발이들이었습니다. 심령이 병들고 부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여 그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종은 주인이 명한대로 하여 많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자리가 비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종들에게 무엇이라 명했습니까?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우리는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길과 산울가로 가서 사람을 데려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을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와서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강권하라는 말씀은 폭력을 사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어찌하든지 천국잔치에 데려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하나님의 사랑은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사적으로 대하셨다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자님의 끈질긴 사랑 때문에 마지못해 말씀공부를 해주다가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어떤 분은 목자님이 너무 귀찮게 심방와서 그 괴로움을 면하기 위해 수양회비를 냈습니다. 그리고 돈이 아까와서 수양회에 참석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두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말씀 잔치에 참석하기보다 죄의 쾌락을 즐기고 싶습니다. 노는데 쓰는 돈은 조금도 아까와하지 않으면서 말씀 잔치에 참석하는데 드는 비용은 돈이 있어도 내기 싫습니다. 그러므로 강권하여 데려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하여 양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파멸하도록 버려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 낙심치 않고 끈질기게 이 시대의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천국 잔치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구원이냐, 심판이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 제자의 댓가(25-35)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시자 허다한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치루어야할 댓가가 무엇인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은 상당히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자식이 어떻게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를 미워할 수 있으며,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의 처자식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어떻게 자기 목숨을 미워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비록 사랑하는 부모나 처자나 자기 목숨까지라도 미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마음 첫자리에 모시고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마태복음 10:37절에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할 때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되고, 자신의 명예심이나 욕심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게 됩니다.

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당시 십자가는 수치와 멸시, 순교의 대명사였습니다. 사형수는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사명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십자가도 없이 편안히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28-32절에는 두 비유가 나옵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준공하기까지 모든 비용을 계산한 후에 망대를 세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기초만 쌓고 그만두면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다가 도중하차 한다면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전쟁을 할 때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헤아린 다음에 전쟁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서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분명한 각오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제자의 삶이 최고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 13:44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자세로 주님을 좇는 자는 소금과 같이 맛을 냅니다.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칩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spirit이 넘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따르고 세상의 것도 잃지 않고자 하는 자는 맛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34,35).

결론: 세상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갈 길을 몰라 방황합니다. 천국 잔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쾌락을 좇아 살다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위해 생명의 말씀 잔치를 허락 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잔치입니다. 여기에는 참 생명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천국잔치에 도움이 필요한 양들을 강권하여 초청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