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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32

by Mark Yang   04/23/2022   Luke 15:1~32

Message


누가복음 제 II부 11 강 

잃은 자의 비유

말씀/ 누가복음 15:1-32
요절/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잃은 자의 비유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 실존의 모습과 이런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잃어버린 인생들을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뜨겁게 영접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죄인을 영접하시는 예수님(1,2)

  1절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세리와 죄인들은 공인된 죄인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정죄하고 멀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세리 마태를 12제자 중 하나로 뽑으시고 늘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동되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고자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믿음으로 새 생활을 하고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로 인해 상하고 통회하는 죄인의 심정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온 것을 볼 때 영적으로 몹시 갈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좇아 살지 않고 마음의 욕심과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마음과 영혼이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들은 육신과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 말씀에는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과 바리새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뜨겁게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사랑의 천국 잔치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조금도 정죄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입장까지 낮아지셔서 이해하시고 크신 사랑으로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태평양 바다처럼 깊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산 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소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라 생각하고 물들지 않기 위해 죄인들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시고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그들에게는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자기 의와 편견과 불평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세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3-10)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좁고 편협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양무리들의 목자요 성경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목자의 심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목자의 심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일백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그 중 한마리를 잃었습니다. 아마 그 양은 평소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문제 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양은 호기심이 많고 자유분방했습니다. 또 반발심이 강하여 소감을 쓰라하면 안쓰고 쓰지 말라하면 썼습니다. 그 양은 늘 산너머 저곳에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사랑과 동료들에 대한 의리 때문에 망설이다가 어느날 용기를 내어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목자의 간섭을 받지 않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목자 밑에 있는 양들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 양은 의기양양하게 점점 먼길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또한 방향감각이 없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가 없기 때문에 이리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양에게는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양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자 없이도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헤메기 시작했습니다. 돌에 부딪혀 발에 상처가 나고 가시에 찔려 몸에 피가 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양은 고독하고 쓸쓸했습니다.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목자의 품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양은 목자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스스로 나아갈 힘과 용기가 없었고 또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애타게 목자의 이름만 부르며 도움을 요청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목자는 양 한마리를 잃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십니다. 목자이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 양을 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잃은 양 한마리는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까짓 한마리쯤 잃어도 괜찮아. 나에게는 아흔 아홉 마리가 있어. 그 놈은 목자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나갔으니 실컷 고생하다가 이리떼에게 잡혀 먹혀도 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무조건 찾아 나섰습니다. 목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익인가 실리를 따지며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한 양을 귀히 여겼습니다. 목자에게 있어서 한 양은 1/100의 가치가 아니라 전부였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100마리를 귀중히 여기는 만큼 귀히 여겼습니다. 이 목자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하나 하나를 귀히 여깁니다. 부모는 많은 자식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하나쯤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잃은 자식을 찾고자 혈안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쯤이야 하며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특히 오늘날 대량 생산시대에서는 하나의 가치는 더욱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는데 있어서도 1대1 말씀공부는 우습게 여기고 대중 집회를 통한 대중 전도를 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가 있어야 전체가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하나는 전체의 총화라고 합니다. 예수인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막8:36)

둘째로, 찾도록 찾는 마음입니다. 목자는 양을 찾되 찾도록 찾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기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목자는 어찌하든지 찾습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이 갈만한 곳은 다 찾아가 봅니다. 목자는 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귀중한 시간과 물질과 모든 진심을 다 쏟습니다. 그만큼 그 양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찾도록 찾을 수 있습니다. 찾도록 찾는 목자의 심정! 포기치 않는 목자의 심정!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로, 목자의 기쁨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목자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가시덤불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달려가 그 양을 품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덩실덩실 츰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는 마음의 기쁨을 도저히 혼자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즉시 불고기 파티를 준비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잔치 비용이 한마리 양 값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기쁨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기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는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찾는 수고가 큰 만큼 찾은 기쁨도 컸습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죄인들을 가리키고 목자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그 품을 떠나 길을 잃은 양과 같이 되었습니다(벧전 2:25a). 길을 잃은 인간은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합니다. 가인과 같이 쉼이 없는 방랑객이 되어 유리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선지자들을 통해 애타게 인생을 찾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인생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찾도록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잃은 자를 찾도록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 가를 말해 줍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해 주셨으나 그들의 완악한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한 드라크마(헬라)는 한 데나리온(로마)과 같이 일군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약 15,000원 정도가 됩니다. 한 드라크마는 큰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인에게 있어서는 보석과 같이 귀했습니다. 10드라크마는 여인의 전재산이었는지 모릅니다. 여인은 하나 하나를 보석과 같이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에 은전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여인은 그 하나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를 쓸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찾은 후 너무 기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잃은 드마크마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여인이 잃은 한 드라크마를 왜 그렇게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까? 이는 자신의 귀중한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것을 아낍니다. 공공물건이나 남의 물건은 함부러 쓰지만 자기 물건은 아껴씁니다. 아끼는 마음은 남자보다 여인이 더합니다. 시장에서 주부들이 10원, 20원을 깍기 위해 실갱이를 하는 것을 보면 여인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귀히 여기고 아끼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 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7절과 10절에서 반복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얼마나 큰 역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여의도 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여 몇 만명이 회개해야 큰 역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회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가정을 변화시키고 캠퍼스를 변화시키고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의 회개는 수많은 교회를 탄생시키고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어거스틴 한 사람의 회개는 당시 기독교를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회개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 한 사람의 회개는 수많은 캠퍼스 지성인들을 살렸습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 뿐만 아니라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한 사람의 회개가 주위에 끼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어두운 밤하늘에 진리의 등불이 하나 밝혀집니다. 그러면 주의가 환해지고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회개는 큰 역사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11-32)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기 위해 계속해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성실하고 율법적이어서 열심히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을 잘 지켰습니다(29). 그러나 작은 아들은 형과 달리 자유분방하며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작은 아들은 만족할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게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1을 하고 반드시 소감 한 편을 깊이 있게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절한 훈련까지 시켰습니다. 또 주일날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를 보도록 하였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캠핑을 가고 싶어도 그런 것은 다 허무하니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방학동안 어학을 정복해야 한다며 Summer School에 등록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를 얽어매는 것으로 느껴져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무지개 빛 꿈이 있었습니다. 인생을 좀 더 멋지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
에 있으면 일생동안 하고 싶은 것 한 번 못해보고 꽁생원과 같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먼나라로 가서 자신의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먼 나라에 대한 동경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습니다. 마침내 작은 아들은 나는 어디까지나 내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어느날 그는 아버지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12). 유산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나 죽은 후에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하고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심히 책망하고 그 요구를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왜 재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가를 잘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결국 자기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랑이 배반 당하는 아픔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인격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구대로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물질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물질을 잃더라도 아들을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둘째 아들은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하더니 전부 달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더니 아버지가 찾아오기 힘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 집을 벗어난 그는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소감을 쓸 필요도 없고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자유는 방종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음란한 도시적 분위기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육신적인 생활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비어홀에서 부르스 춤을 추며 음란 비디오를 보며 고급 위스키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창기들과 함께 정욕의 죄를 지으며 마구 놀아났습니다. 밤새도록 노름을 하여 판돈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가지고 온 재산을 육신의 쾌락을 위해 흥청망청 썼습니다. 마음과 육신의 원하는 대로 기분나는 대로 마구 썼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3b). 이 말씀은 단순히 물질을 허비한 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재산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 재능, 젊음, 시간, 물질 등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물질 뿐만 아니라 귀중한 젊음과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먼 나라는 이방나라, 즉 하나님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허랑방탕했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육신적으로 방탕한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신적으로 허랑방탕한 것도 다 포함됩니다. 많은 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게 죄를 짓지 않지만 마음으로 온갖 추한 죄를 다 짓습니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마음은 허랑방탕한 탕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허랑방탕한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엡2:3). 인간은 영을 좇아 살 때 영혼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을 좇아 살 때 남는 것은 피곤과 죄의식과 후회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설상가상으로 그 날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재산이 떨어지자 그동안 주위에 붙어 있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며 돼지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15). 그는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그러나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방 땅에서 굶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가장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가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아버지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잘 말해 줍니다. 인간은 본래 에덴 동산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생노병사의 고통이 없이 무한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온누리에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아니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유를 찾아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낙원을 상실하고 불안과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며 하루 세 끼 먹고 살기 위해 죽도록 수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아를 상실하고 가인과 같이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1:21-32절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몸과 마음은 정욕으로 더러워져 동물과 같이 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극심하여 마침내는 동물보다 더 추한 호모섹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독, 살인, 분쟁, 사기 등의 죄가 세상에 만연하여 세상은 살기 힘든 황폐한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았지만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었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동물과 같이 비참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작은 아들은 심히 궁핍한 상태에 이르게 되자 비로소 정신이 났습니다. 이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먹을 것도 풍족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풍족하고 은혜도 풍족하고 말씀도 풍족하고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매주 한번씩 1:1을 하고 소감을 쓰고 소감발표를 하는 것이 얼마나 은혜롭고 자유롭고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생활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죄인으로서의 자아발견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격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한없이 겸손해졌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그는 생각만 하지 않고 마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믿음으로 돼지우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몸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는 냄새나고 누더기 옷입은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없이 두 손 들고 머리를 푹 숙이고 나아갔습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믿음의 용기였습니다. 이는 그에게 새로운 삶에로의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이 방향전환으로 인해 그는 탕자에서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궁핍한 생활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런 삶의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방향전환하는 데는 기가 필요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고 쑥스럽다고 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0b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상거가 먼데 누더기 옷을 입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온 것을 볼 때 아버지는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아들을 기다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센타 문 밖에 나와 행길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첫째, 둘째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애타게 찾으시는 사랑이라면 이 비유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눈이 쇠할 정도로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 눈에 지기 아들인 줄 알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돼지 냄새나는 아들을 덥썩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들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영혼의 모든 상처를 말끔히 씻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또한 한계가 없는 사랑이요 결코 실패치 않는 사랑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품에 안겨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21).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어떤 자로 대우했습니까? 22-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아들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여겼으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는 아들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지난 날의 생활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온 사실 하나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밭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올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한 종을 통해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과 아버지가 저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베푸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는 작은 아들을 잃고 한없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잃었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토록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도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    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그 은혜와 사랑과 특권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몸으로 아버지를 섬겼지만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떠난 집 안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큰 아들과 같았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원망하는 아들을 조근 조근 타이르셨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뜨겁게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넓고 깊으신 사랑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