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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9

by Mark Yang   04/23/2022   Luke 17:1~19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13 강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말씀/ 누가복음 17:1-19
요절/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0절에서는 믿음이 어린 자들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와 믿음의 역사를 이룬 후 하나님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11-19절에서는 은혜를 받은 후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용서하는 믿음과 감사하는 믿음을 배워야겠습니다.

I. 용서하는 믿음(1-10)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양무리들의 목자로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 중의 하나는 어린양을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혹이나 시험에 들게 함으로서 범죄케 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양들은 초기에는 하나님보다도 목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양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나는 별 뜻없이 무심코 말한 것이 어린양에게는 큰 상치를 주고 실족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고 거칠게 대하다가 실족시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목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특히 지도자는 사람을 돕는 자이기 때문에 돕는 과정에서 원치 않게 실수를 합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많이 있지만 사람을 돕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생활 하다가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양들이 나로 인해 실족하는 것을 보면 죄책감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실족케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든 결코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지만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절에서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맷돌은 곡식을 갈 때 사용하는 것으로 맷돌의 지름은 약 45Cm, 두께는 8-10Cm나 되는 큰 돌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져지게 되면 제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 할지라도 살아날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고대 로마나 수리아의 사형법의 일종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지극히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소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들이 실족치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조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 교훈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스스로 조심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우상의 제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우상에 바쳐진 수많은 고기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크리스찬들은 그 고기를 먹어도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자유롭게 먹으면서 믿음이 어린 자들을 판단함으로 실족케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도 바들은 이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2,13)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
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어린양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됩니다. 이는 양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수님을 대하듯이 존경과 사랑, 겸손과 온유로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그를 봐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경계하라는 말은 책망하라는 듯입니다. 만일 형제가 죄를 범할 때이를 묵과해 버린다면 그 형제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반복해서 죄를 범하다가 결국 실족케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책망해야 됩니다. 책망은 수술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사람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부패하고 메마른 자는 남을 책망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고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과 목자의 심정을 소유한 자만이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참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잠언 27:5절에 보면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계339)고 하셨습니다. 책망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했는 데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는 불의에 빠지고 불신에 사로잡혀 결국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용서하지 못해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죄를 지은 자에 대해 마음에 원한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갑니다. 당대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식에게 복수해 달라는 한맺힌 유언을 합니다. 결국 복수는 복수를 부름으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인간 사이의 문제는 거의 모두가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용서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자연히 해결되는데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내적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내면이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형제의 죄를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 말씀은 참으로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용서하기 힘듭니다.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8:22절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을 보면 그 연약함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하기보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또 회개 소감을 발표해도 그것이 진실인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가 회개하기만 하면 무한정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이렇게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3-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종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이는 약 9천억이나 되는 엄청난 돈입니다. 종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임금에게 엎드리어 간청했습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 종은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M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 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은 약 150만원 정도 밖에 안됩니다. 이는 9천억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동관의 목을 잡고 비틀다가 후에는 무자비하게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큰 은혜를 덧입은 자로서 마땅히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무자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노발대발하여 그를 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서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나에게 지은 죄는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자존심이 좀 상했다거나 물질을 좀 손해본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형제의 죄를 용서치 못하고 앙심을 품거나 복수의 칼을 간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치 않으십니다(마 6:14,15).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는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존심을 꺾고 형제의 죄를 중심으로 용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거하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들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이 너무 높아 예수님이나 하실 수 있지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려면 태산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제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용할 양식을 하고 기도한 후 형제를 용서하고자 굳게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보는 순간 나의 결심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면 자신의 믿음 부족함에 절망하게 됩니다. 나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며 주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태산과 같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능히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양 보다도 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작지만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는 조금의 회의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100% 순수한 믿음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강하여 그것을 뽑기가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또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을 때 누구든지 인간의 이성과 한계를 초월한 큰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형제를 무한정 용서한다는 것은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는 것처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이를 인정치 않고 사용치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인정하고 사용할 때 위대한 믿음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7-10절까지는 큰 믿음의 역사를 이룬 다음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하고 난 후 어떤 자세를 갖는가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한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새벽부터 밭에 나가 하루종일 밭을 갈고 양을 쳤습니다. 그는 요령을 피워가며 쉬면서 적당히 일하지 않고 하루종일 충성스럽게 맡은 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몹시 지치고 배가 고왔습니다. 한편 주인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쉬면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위해 식사준비를 하고 종에게 얼마나 수고했는가 위로하며 와 앉아서 음식을 먹으라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할 자가 누가 있느냐고 하십니다. 도리어 주인은 종에게 너는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허리에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종의 위치였습니다. 종은 하루종일 허리가 아프도록 열심히 일했으나 집에 와서 쉬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 죽도록 충성했다고 해서 주인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 주인이 사례하지 않는다고 피해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이 종은 사실 무익한 종이 아닙니다. 주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유익한 종입니다. 그러나 종은 스스로 유익한 종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잘한 일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대개 일을 충성스럽게 하거나 성공적으로 하고 나면 자기 의가 생기기 쉽습니다. 자기 의가 생기게 되면 교만해져서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이 막히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충성한 후에 마음의 교만을 극복하고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잠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온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해 수많은 개척 역사를 섬겼습니다. 4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그가 남긴 업적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만심에 빠지거나 자족하지 않았습니다. 또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습니다. 빌립보서3:13,14절 말씀은 그의 마음 자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II. 감사하는 믿음(11-19)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 어구에서 문둥병자 10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 9명은 유대인이고 1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불행한 병을 얻어 천대받고 소외 당하는 처지에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추하고 흉칙했습니다. 손발과 코가 썩어 문들어진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은 마치 괴물집단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기쁨이나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밖에 없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멀리 서서 함께 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흘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들으시도록 애절한 음성으로 합창을 했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바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발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는 그들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회의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순종하는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갔을 때 가는도중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추한 병이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신기한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왕의 군대장관으로 왕에게 없어서는 안될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문둥병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엘리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엘리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방문에서 대머리만 내밀고 사자를 보내어 말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 이에 나아만은 자존심이 상하여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종들의 말을 듣고 자존심을꺾고 단순히 순종했을 때 문둥병이 낫는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고침을 받은 후 그들은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그들은 그 추한 병이 나았을 때 얼마나 기했겠습니까? 그들은 꿈인가 생신가 하여 살을 꼬집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정말 이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중에 한 사람만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바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은혜 받고도 감사치 않는 아흡 사람을 인하여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 받은 후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배우게 됩니다. 세상에는 은혜를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감사하고 이를 감당하는 자는 적습니다.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은혜 감당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흡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핑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치 않은 것은 핑계할 수 없습니다. 감사치 않는 자는 영적인 문둥병자입니다. 우리는 감사치 않는 아홉 문둥이를 생각할 때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런 요소는 충분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받고도 감사치 않는 아흡을 인하여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마리아 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육신의 문둥병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둥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양무리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겨자씨한 알만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