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13 강
안드레의 믿음을 축사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1-15
요절: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심(2:1-11);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심(4:43-54);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심(5:1-9); 5000명을 먹이심(6:1-15); 물 위를 걸으심(6:16-24);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9:1-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11:38-44).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신 사건 자체를 중시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사건의 의미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크게 쓰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신 예수님(1-7)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서를 참조해 보면 예수님 일행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신 것은 전도여행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함이었습니다(막6:30,31). 예수님은 그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에 즉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들은 오랫만에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자 무한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다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보다 더 빨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Jesus! Jesus! We love you!” 그들이 왜 이렇게 극성스럽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2).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중풍병자, 문둥병자, 소경, 혈기 마른자, 귀신들려 고통하는 자 등 각색 병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불의한 지도자들 밑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병마에 시달리며 또 정신적으로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배고프고 병든 무리들이었습니다. 또 이해와 사랑에 굶주린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영육 간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왔기 때문에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갈릴리에 계시는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메마른 세상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목자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랐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여기서 산은 낮은 언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것은 무리들을 한 눈에 바라보시고 그들을 영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들이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들은 양무리를 먹이고 돌보야 할 지도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또 동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훈련받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믿음과 목자의 심정을 배워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었습니다(6).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이들을 먹이시고자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위대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무리들을 볼 때 여러 가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대권 주자가 그들을 본다면 완전히 표밭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사업가의 눈으로 그들을 본다면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목자의 눈입니다. 목자의 눈은 긍휼의 눈입니다. 무리들은 지성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잠간 쉬는 것도 방해한 몰염치한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볼 때 매우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막6:34절은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또한 마태 9:36절도 예수님의 마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그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목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우리에게 목자의 심정이 없을 때 상대방의 형편을 이해해 주고 섬기기 보다 율법적이 되어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목자의 심정이 있을 때 요구하고 판단하기보다 이해해 주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도와 주고자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자 마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먹이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마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은 다 주고자 하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곽마리아 사모님은 자신은 한 끼도 겨우 먹지만 아들 베드로에게는 하루에 다섯 번씩 음식을 먹인다고 합니다. 이는 아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양무리에 대해서 이런 목자의 심정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을 연단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셨을 때 먹일 일꾼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무리들을 먹이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을 양무리의 목자요 복음의 일꾼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는 부지중에 빌립에게 임한 시험 문제였습니다. 이는 빌립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 빌립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이는 빌립에게 믿음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요1:45절에 보면 생각이 깊고 이지적인 사람입니다. 또 순식간에 200데나리온을 계산한 것을 보면 머리가 명석한 자입니다. 그는 머리는 잘 돌아 갔지만 마음은 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받는 지도자가 되려면 머리의 사람보다 심정의 사람(A man of heart)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심정의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빌립은 키고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누가 보나 지도자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시고 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정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쓰임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 문제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빵을 사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든지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예수님의 시험에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이는 “어디서 떡을 사서” 무리들을 먹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리들을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먹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빌립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불가능한 상황만 생각했습니다. 이때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각 사람으로 꾸시꾸시 빵 한개와 요구르트 하나씩만 준다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여덟 달 어치 봉급으로서 가난한 제자들에게는 거액의 돈이었습니다. 빌립은 그런 거액의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대답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타당합니다. 현재 그들 앞에는 남자만 오천명이 있습니다. 당시 여자들과 아이들은 숫자에 치지 않았으므로 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만명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먹일 돈도 없었고 또 그곳은 돈이 있어도 슈퍼마켓도 없는 빈들이었습니다(막6:35). 상황은 어느 모로보나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는 상황만 바라보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빌립의 콤퓨터는 순식간에 200데온을 계산해낼 만큼 재빨리 돌아갔으나 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고방법입니다. 그의 문제는 힘든 상황만 바라보고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만 바라보면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 현대 로마인 미국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세계 187개국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고 부정적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립은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을 많이 체험하였으므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계산에는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믿음의 사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어 예수님의 테스트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빌립의 또 다른 문제는 있는 것을 생각지 않고 없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없는 200데나리온을 생각했을 때 그의 심정은 비참해졌습니다. 사람들은 200데나리온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텐데 200데나리온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는 늘 없는 것만 생각하고 자학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쓰실 수 없습니다.
Ⅱ. 안드레의 오병이어(8,9)
빌립이 상황만 바라보고 절망하고 있을 때 안드레가 등장했습니다. 안드레 하면 어딘지 모르게 멍하고 나사가 빠진 사람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의 순간에 믿음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과 같이 스마트하지 못하고 외모나 인간 조건이 지도자답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큰 소망을 두시고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안드레는 본체만체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빌립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안드레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학하거나 예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곁에서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이따가 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그는 오천명을 먹이는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오병이어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미안했는지 “이것이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며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안드레는 전혀 현실감각이 없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몇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안드레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없는 200데나리온을 생각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안드레는 믿음으로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무리를 먹일 어떤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때 그는 한 아이가 오병이어를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있는 것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오병이어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보여도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오병이어는 아주 귀합니다. 그는 이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자 시도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시도였습니다.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긍정적이 되고 도전적이 되고 창조적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손발을 놀려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발견했지만 이를 예수님께 들고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보리떡은 나귀에게도 먹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찮은 것을 들고 나오는 데에는 자의식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웃고 조롱하지는 않을까?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다 가져왔다고 책망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자의식이 들기 쉬웠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들면 주님께 들고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다만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들고 나가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받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꼬투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나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예수님은 능히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그를 긍정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고방법은 믿음의 사고방법입니다. 믿음의 사고방법은 절망 중에서 희망을 낳게하는 사고방법이요, 불행 중에서도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고방법입니다. 또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고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고방법을 가진 자를 기뻐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런 믿음의 사고방법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0두령들은 상황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깊은 불신에 빠져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메뚜기같이 생각하고 도전해 보지도 않고 부전패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모두 광야에서 엎드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꼭같은 상황을 보았으나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능히 승리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땅을 잘 차려놓은 밥으로 생각하고 가서 먹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민14:9).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고방법을 가진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그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자신도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믿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1961년 이 역사를 시작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해 오셨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던 중 1964년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동남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선전한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국, 서독, 소련 개척 역사도 다 오병이어를 찾아서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85년 세계 선교 보고 대회 때 소련 개척을 위해 기도하자고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당시 철의 장막을 깊게 드리운 소련을 개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을 때 오늘날 소련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50명의 선교사를 파송케 하시고 7공화국을 개척케 하셨습니다. 또 오늘날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을 자랑하지만 로마 말기의 멸망의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몰락해 가는 미국이 다시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로서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이 제사장 나라가 되고 1,000명의 미국 full time 목자와 10,000명의 성경 선생을 양성하여 세계 각곳에 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도록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사를 귀히 쓰십니다.
둘째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볼 때 이 말씀은 곧 안드레가 예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그의 기도로 받으시고 귀히 써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둡고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 잡히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심의 오병이어, 1대1의 오병이어, 기도의 오병이어, 심방의 오병이어, 편지의 오병이어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오병이어를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없으면 다른 사람의 것을 찾아서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찾아서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이를 기초로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Ⅲ. 안드레의 믿음을 축사하신 예수님(10-15)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역하셨습니다(10).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를 잔디 위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혼자서 일하실 수 있지만 제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영적인 역사 환경을 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역사환경을 만들어야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역사 환경을 만들 수 있습니까? 합심기도는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역사 환경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 왔을 때 예수님은 이것을 받으시고 감사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믿음과 기도와 진심을 인해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믿음을 인하여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 넘쳤습니다(12-15). 오병이어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갔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하신 후 떡과 고기를 떼어 무리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것도 빌립의 생각과 같이 조금씩 주신 것이 아니라 저희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검절약의 정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열 두 바구니에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십니다(엡3:20). 우리는 궁핍하지만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부요를 얻을 수 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빵 문제를 해결해 줄 경제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시대의 굶주린 캠퍼스의 영혼들을 먹이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200 데나리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찾아서 드릴 때 주님께서 이를 축복하사 이 세대에 기이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여름 수양회를 준비할 때도 우리의 오병이어를 찾아서 드림으로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