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누가복음 19:28-48

by Mark Yang   04/23/2022   Luke 19:28~48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19강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9:28-48
요절/ 누가복음 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과 입성하신 후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왕권을 잘 보여 줍니다. 또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에수님이 심판주로서 공의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주가 쓰시겠다 (28-34)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 말씀’은 11-27절에 나오는 므나 비유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므나 비유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인치신 왕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조롱과 멸시와 채찍과 죽음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까? 첫째로,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B.C. 6세기경의 스가랴의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둘째로,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대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생들에게 산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흉악한 죄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엄숙하고 당당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마침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편에 위치해 있는데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그 앞에 예루살렘 성정이 있었습니다. 감람산에서 보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시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동네로서 예루살렘에서 약 2.5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코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 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즉시 풀어 보내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주가 쓰시겠다.”(The Lord needs it.)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죄로 병든 인생을 품고 섬기는 생활을 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교만하고 죄많은 인생들을 섬기시느라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하셔서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그 창조하신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요한복음 1:3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태초에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절대 주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나귀 새끼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고 그 주인은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만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 물질, 시간 등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이요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시간을 필요로 하실 때 기쁨으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서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다 “주께서 쓰시겠다.”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2-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서 본즉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보지도 않으셨는데 모든 것을 자세히 아시는 것에 대해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그것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대낮에 버젓이 도적질해 가는 이들을 보고 호통을 쳤습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제 두 제자는 절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꼼짝없이 감옥에 가야 할 판이었습니다. 제가 경력 3년만에 나귀 절도범이라는 낙인이 찍힐 판이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주인의 태도가 부드러워지더니 “아, 그래요. 주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가져 가시오.” 하며 기쁨으로 허락했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나귀가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무엇을 체험하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했을 때 영접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우리에게 도적질해 오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시킨다고 반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디 반문하거나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이해를 초월하는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은 제자들과 같이 어리석을 만큼 절대적으로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였는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을 채운다는 것은 헛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바쁜 중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항아리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거 갖다주라 하였습니다. 이는 더 순종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순종했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II.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35-40)

예수님은 이때까지 섬기는 종으로서 자신을 공중 앞에 나타내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수도로 입성하실 때는 나귀나 노새를 탔습니다(왕상 1:33).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자신의 왕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끌고와서 안장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길을 가시자 무리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폈습니다. 그들은 카펫트 대신에 겉옷을 폈습니다. 겉옷을 벗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왕하 9:13). 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루살렘성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찼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당황하여 사회혼란을 야기시키는 집회를 원천봉쇄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생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무리들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왜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것입니까? 37b절을 보십시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그들은 대부분의 갈릴리에서 따라온 자들로서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많이 보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능히 원수 로마 나라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다스릴 왕으로 영접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착취와 압박 가운데 시달린대로 시달려 왔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되 백마대신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왕이시되 세상 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스가랴는 9:9절에서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달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첫째로, 겸손의 왕이십니다. 세상 왕들은 금 면류관을 쓰고 백마들이 끄는 쌍두마차를 타고 문무백관을 거느리며 위엄있게 입성합니다. 왕의 전후 좌우에는 무장한 경호원들이 감싸기 때문에 백성들은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마 대신에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크기가 큰 개 정도만하기 때문에 사람이 타면 발이 땅에 끌립니다. 그리고 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타시자 넘어지고 하고 뒤뚱뒤뚱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가장 영광스럽고 장엄하고 위엄찬 모습으로 입성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사 발이 끌리는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한없이 겸손하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저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얼마나 높아지기를 원하며 되먹지 못하게 권위 부리기를 좋아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나 낮아지셨으며 온유하시고 겸손하십니까? 제가 겸손의 왕 예수님을 심령 깊이 영접함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단이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겸손의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양들과 동역자들을 겸손히 섬길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평화가 임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에수님은 인생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또 인생들을 평화로 다스리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세상 왕들은 군대의 힘과 법과 제도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조금이라도 제도에 거스리는 말을 하면 즉시 체포하여 갖가지 고문을 하며 가차없이 처형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창칼과 최루탄 가스로 예루살렘 대학생들을 진압했습니다. 세상 왕들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늘 부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서 인생들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임의로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친히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우리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요한 계시록 5:12절에서는 수많은 천사들이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주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의 심령에 호수와 같은 잔잔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는 겸손하고 공의로우며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구원을 베풀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큰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세로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죄와 사망문제입니다. 누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애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III. 성을 보고 우신 예수님 (41-48)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 가까이 오셨을 때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우신 것은 두 번 뿐입니다. 한번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또 한번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성이 사단의 도성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 세상 만방에 흘러 넘쳐야 했습니다(사 2:3).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시온으로 올라가는 비전을 보았습니다(사 2:2,3). 그러나 현재 예루살렘 도성은 온갖 죄악과 불신과 반역과 부정, 부패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그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교만으로 인해 그들의 영적 눈이 감기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죄악으로 인해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내다보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이 파멸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제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지 않을 때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유월절 날에 완전 포위되었고 이로인해 아사자와 살상자는 무려 11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배가 고파 자식을 삶아 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45,46절은 예루살렘 성이 심판받게 된 근본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은 장사하는 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각 지역과 각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을 위해 짐승을 파고 성전세를 위해 환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곳입니다. 또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특히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사 56:7b). 그러므로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죄의 역사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경건하게 보였으나 그 중심은 썩어 있었습니다. 성전은 물질적이고 세속화 되어 버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긴 옷을 입고 경건한 척 하였으나 양들의 영혼 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사하고 정치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양들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썩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예수님을 삼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 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왕이십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2-3일 후면 곧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말씀만이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무지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 심령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려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 평화의 왕,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또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왕이 되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교만의 겉옷, 정욕의 겉옷, 안일의 겉옷을 벗고 예수님을 심령에 왕으로 영접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수님을 찬양하는 찬양으로 가득 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