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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9

by Mark Yang   04/23/2022   Luke 20:1~19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20강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말씀/ 누가복음 20:1-19
요절/ 누가복음 20:13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오늘 말씀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가운데는 배은망덕한 인간들의 죄악상과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이며 또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 (1-8)

1a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쌔” 이 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많은 고난을 당하실 바로 그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후면 겪어야 할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심각한 고뇌에 빠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심전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방황하는 양무리드레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 시작부터 생의 최후 순간까지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선한 목자요 위대한 성경선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왔습니다. 이들은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런 일’이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을 말합니다(19:45,46). 이것은 당시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감히 그들의 확립된 권세에 도전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도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함께 물려와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이를 하는가?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는가?”하고 따져 물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무 자격증도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하고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대답하시고 보다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하심으로 응수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질문은 그들이 대답하기 참으로 난처한 것입니다.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는가 불신을 책망받게 됩니다. 또 그들이 요한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영적 권위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분노를 사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그들이 위선자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고 진리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상황에 따라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 사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겉모양은 경건해 보였으나 그 내면은 부패하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같이 자신의 권세도 하늘로부터 왔음을 시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가를 깨닫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예수님이 메시야되심을 증거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종이에 쓴 자격증이 필요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함을 받고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왕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요 14:10,11).

권세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문제시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확립된 권세를 내세우며 그 권세 밖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여 왔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확립딘 권세에 도전하는 세력은 모두 이단으로 몰아 가차없이 처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영국 국교도 청교도들이 확립된 권세 내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박해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독일 교회에서 우리 선교사님들을 핍박하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너희들이 무슨 권세로 1:1로 말씀을 가르치며 선교를 하는가”하며 눈에 보이는 자격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자격증이 그 사람을 진정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권세는 사람이나 단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위로부터 영적 권세를 덧입을 때 생명력 있는 복음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II. 포도원 농부의 비유 (9-19)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포도원은 어떤 형태의 농경보다도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꾸기가 까다롭다고 합니다. 이사야 5:1,2절을 보면 포도원 주인은 매우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단단한 바위를 파서 역청을 발라 즙짜는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또 짐승이나 외부에서 오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망대를 세웠습니다. 포도원은 농부가 가꾸기만 하면 극상품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주인은 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날품팔이를 하며 겨우 살아가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였습니다. 주인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겨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농부는 인간, 포도원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정복하고 다스리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과 일생동안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시고 거울과 같은 율법과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도 그들이 참 하나님을 섬기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 제도와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서 열국을 품고 섬기는 믿음의 아버지요 기도의 어머로 쓰임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9:5,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는 온 세계 캠퍼스입니다. 캠퍼스는 아름답고 광활합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은 세상에 때묻지 않고 순수하며 진리를 사랑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장차 이 시대를 감당할 지도자들입니다. 또 캠퍼스는 해마다 새롭게 들어오고 나감으로 흐르는 물과 같이 늘 신선합니다. Carl Wilson은 이런 캠퍼스를 가리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력 저수지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에 일할 곳이 많이 있지만 캠퍼스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것처럼 큰 은혜와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포도원 주인은 열매 맺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대개 포도나무는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인은 추수 때가 되자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받고자 종을 보내었습니다. 대개 6대 4로 소작료를 정하는데 주인은 소득의 10분의 1만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극진히 대접하고 소출 얼마만 세로 바치기만 하면 계속해서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꿀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를 바치기 싫어서 주인이 보낸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이를 본 주인은 당장에 그들을 징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고 좀 더 겸손한 다른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종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머리에 붕대를 가고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빈 손으로 왔습니다. 주인은 은혜를 악으로 갚은 일들을 당장에 진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번에도 또 참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범죄했다고 해서 쉽게 잘라버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계속해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 번째 종도 역시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은 이제 큰 딜레마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계속해서 종을 보낼 수도 없고 또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멸할 수도 없었습니다.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공의를 앞세우면 그들을 심판하게 되고, 사랑을 앞세우면 그들의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오랫동안 심히 고민하다가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의 포악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아들은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상속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실로 큰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만큼 농부들을 사랑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 한 가지 희망을 가졌습니다.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주인은 그들이 최소한 아들은 영접하고 공경하리라 믿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아들을 공경하기만 하면 지난 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보낸 것은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4,15a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들은 주인의 마지막 기대마저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인 힘이 없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종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사랑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진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농부들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인을 주인으로 공경치 않는 교만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고 세로 든 청기에 불과했으므로 마땅히 주인을 공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 보니 포도원이 내 것인 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주인도 타국에 가 있으므로 실제로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다보니 자신이 주인인 양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이 너무 지나쳐서 분수를 넘어 버렸습니다. 결국에는 주인의 은혜를 배반하고 은혜를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그들의 영적인 눈을 감기게 하였고 그들을 못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이나 된 양 우쭐하게 되어 하늘 높이 솟아 오르다가 결국에 사정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잠 16:18).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동기도 하나님과 동등되고자 하는 교만때문이었습니다(창 3:5; 롬 1:21). 

둘째로, 욕심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어 아름다운 극상품 포도열매를 많이 맺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열매를 많이 맺게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열심히 수고한 것은 자신들이고 주인이 일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주인에게 세를 바치려하니 억울했습니다. 그들은 세를 바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것을 꾸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역심은 눈덩이와 같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아들까지 죽여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사고자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 1:5).

셋째로, 은혜를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주인의 일방적인 은혜로 포도원을 맡게 되었을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부르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1년, 2년 세월이 지나자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났기 때문에 이런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그들의 심정은 완악해졌습니다. 얼굴은 시커멓게 되고 입이 튀어나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결국 은혜를 감사치 않을 때 그들은 사단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1:21절은 감사치 않는 것은 죄의 뿌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할찌라도 기본적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자였는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는가 감사해야 됩니다. 또 과거 할 일이 없어 방황하던 나를 부르사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움을 받고 많은 축복을 받았을 때 “내가 무엇인관대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하며 은혜를 깊이 감사했습니다(삼하 7:18). 사도 바울은 항상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의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과거 비참한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했기 때문입니다(딤전 1:13). 저는 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과거 과부의 아들로서 병든 병아리와 같이 살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이런 비참한 죄인을 구원하사 주님의 구속 역사에 써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나도 모르게 심령에 감사의 눈물이 고이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일생동안 이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감사치 아니하고 배은망덕하는 사람은 가장 몹쓸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몹쓸 짓은 배은망덕한 짓입니다.

이상의 비유에서 악한 농부들에게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시고 마침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신 주인은 어떤 분이십니까? 비유에서 종들은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기차게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선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잡아 때리고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포기치 않으시고 그들에게서 어찌하든지 소출을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소출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출을 통해 이들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파괴된 영적질서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소출을 바치게 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기쁨으로 소출을 바칠 수 있도록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희망을 결코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내하는 사랑이요 포기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인생들의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롬 2:4).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참으시는 무골호인이 아니십니다. 최후로 독생자를 보내셨기 때문에 이를 영접치 않을 때 남는 것은 심판뿐입니다. 그들이 받은 바 축복을 감당치 못했을 때 제사장 나라로서의 모든 축복과 특권을 빼앗기고 저주를 받습니다.

16b절을 보십시오. 이 비유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어다.”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시편에 기록된 말씀대로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죽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구속역사의 기촛돌로 삼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8절은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구원의 돌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영접치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돌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치 않는 자는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고 맙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1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하사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은혜와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세계선교의 열매를 드림으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