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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0-47

by Mark Yang   04/23/2022   Luke 20:20~47

Message


누가복음 제2부 21 강

                           산 자의 하나님

말씀/ 누가복음 20:20-47
요절/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본문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책 잡고자 여러가지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이들의 궤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정당한 자세와 부활의 산 소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산 자의 하나님을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20-2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자 종교 지도자들은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이 찔리면서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두려워서 잡을 수 없었습니다(19).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자신들이 손 안대고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한 묘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책잡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잘하고 능청스런 정탐들을 보내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께 질문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 그들은 친구처럼 접근하여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달콤한 말로 예수님을 추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함정이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 질문은 어느쪽으로 대답하든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시켰는데 유대 백성들은 이에 대해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 하면 백성들로부터 반발을 사서 인기를 잃게 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과 백성들 사이를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 정부에 반항하는 것이 되어 즉시 용공분자로 체포 당하게 됩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진퇴양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틀림없이 백성들 편을 들어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는 꼼짝없이 덫에 걸려들었다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도록 하여 뉘 화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여지없이 K.O패를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에 대해 4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 교육의 의무, 노동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탈세를 하거나 병역을 기피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롬13:1)

  국가에 대한 의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감당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 물질, 시간, 자녀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자는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롬12:1)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어찌하든지 세를 바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부리고 열심히 꾸렸습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도, 하나님께도 어느 쪽도 바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쪽 다 모두에게 세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Ⅱ.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27-47)

  27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K.O패를 당하고 물러가자 이제는 머리를 잘 돌리는 사두개인들이 묘한 질문을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사두개라는 말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인 사독에게서 유래했습니다. 이들은 유다의 소수파로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 정치에 예민하여 정치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행23:8). 그들은 영생이나 장차 올 심판도 믿지않고 귀신의 존재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사후의 세계는 인정치 않고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만 집착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연히 현실의 부와 권세에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대부분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신학자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을 기초로 성경을 분석하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기적이나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이들의 이론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이론으로 영적 진리를 파괴하고 영적 생명을 죽입니다. 그들은 인간 이성이 전부인줄 알고 이성을 넘어선 신비한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입니다. 또 세상에는 신자라고 하면서 사두개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현실에 집착해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자가 아니라 교회의 일원으로서 종교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28-33절에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들은 신명기25:5-10절 말씀을 기초로 해괴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사를 중시하여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하여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여자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문제로 악령에 시달리다 결국 죽었습니다. 그 집안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이 다 아내를 취하였으므로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아내 쟁탈전을 벌이는 비극이 발생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만들어서 질문 하는 의도는 만일 부활이 있다면 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 잘 먹고 잘 살면 되었지 부활은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해괴한 질문으로 부활의 진리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부자였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볼 때 행복하게 보였으나 실상은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의 죽음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슬픈 여인과 부활 때에 일어날 참상들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슬픔과 운명과 비극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너무나 해괴하여서 대답해 줄만한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조근조근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막12:24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갑니다. 이는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저 세상에서의 삶을 이 세상의 연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되면 더 이상 육신의 생활은 하지 않고 영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자들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썩을 육신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맞도록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장차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육신은 썩고 욕되고 약하고 추하지만 장차 부활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한 몸이 됩니다(고전15:42-44). 그때는 다시는 죄의 소욕에 지배당하지 않고 또 더이상 장가가고 시집가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죽음의 고통으로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화로우신 우리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그들은 모세 오경에는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부활의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에서 부활의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 40년에 절망하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이 말씀은 성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출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sac, the God of Jacob." 이 말씀은 시제가 모두 현재형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나 항상 살아계신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 받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날 현재도 살아계셔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둘째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다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하나님 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마지막 부활시에는 우리의 육신도 구속되어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때 완전한 구속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부활의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생애를 주장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우상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는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되어 버립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새명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주시는 산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낙심치 아니하고 기쁨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 가운데서도 부활의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광야로 망명을 갔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모든 꿈과 이상이 다 박살났습니다. 그의 불타는 정열과 혈기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을 치며 처량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살아 능력으로 역사하셨지만 지금은 아무 힘이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실패감에 사로잡혀 깊이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나타나 지금도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의 내면에 역사하던 모든 불신과 패배감과 운명과 절망이 사라지고 부활의 생명력이 약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출애굽의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삶 가운데 부활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셔서 누구보다도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여기서 죽은 자는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없어 늘 부정적인 생각과 운명적인 생각, 한계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이들의 마음은 늘 슬프고 얼굴은 어둡습니다. 이들의 말은 죽어 있고 행동도 죽어 있습니다. 이들의 사고 방법은 죽은 사고 방법입니다. 이들은 안된다, 힘들다,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허무, 무의미, 절망, 운명, 패배라는 단어에 익숙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며 하나님도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니체 said, "God is dead." but God said, "니체 is dead."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한 니체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슬퍼하시고 분노하십니다. 

  반면 산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한마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능력 주셔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항상 살아 있습니다. 이들의 말은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눈빛도 살아 있고 생활에 활력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고 슬픈 운명이 없고 불가능이나 패배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희망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민수기 13,14장에 보면 이스라엘 12두령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같은 땅을 같은 기간에 같은 눈으로 보았는데 그 보고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10두령은 그 땅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부정적으로 보고하였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 백성은 신장이 장대하고 성도 견고하여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장군은 어떻게 보고하였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민14:9a). 하나님은 열 두령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모두 다 엎드러져 멸망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장군은 기뻐하시고 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이고 불신에 찬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되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당신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하나님께는 죽음이나 죽음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았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110:1절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은 다윗의 주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되십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1:4)  

  예수님은 계속해서 서기관들의 외식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45-47). 그들은 사람들 보는데서는 의로운척 하였으나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받는 판결은 더욱 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