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부 22강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실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21:1-38
요절/ 누가복음 21:27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재림은 기독교의 네 기둥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종말이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완성과 최후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신자들에게는 궁극적인 희망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말세의 징조가 어떠하며, 또 말세에 사는 윌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
I. 과부의 두 렙돈 (1-4)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 있을 때 사람들이 연보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두툼한 지페 뭉치를 꺼내어 모든 사람들이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넣었습니다. 어떤 부자는 1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의기양양하게 넣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난한 과부는 초라한 옷을 입고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한 데나리온의 1/128정도 됩니다. 그러므로 두 렙돈은 200원 정도 되는 보잘것 없는 돈이었습니다. 과부는 바치기에 자의식이 들었으나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드릴 때 너무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며 아무도 몰래 넣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전이라 쨍그랑 소리가 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헌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사람들은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두 렙돈을 넣는 과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돈이냐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예수님은 과부의 진심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는 눈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양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질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았지만 예수님은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가치를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가치를 평가하십니다. 과부는 마게도냐 성도들 같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희생적으로 드렸습니다(고후 8:1-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쳐 헌금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II. 인류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 (5-38)
첫째, 말세의 징조 (5-19).
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마가복음 13:1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아름다움과 그 웅장함에 위압되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당시 성전은 헤롯대왕이 정권을 잡고 나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해 지었다고 합니다. 헤롯 18년에 착공하여 46년만에 봉헌 예배를 드리고 A.D. 63년에 완성한 82년에 걸친 대 역사였습니다. 성전 입구에는 40척이나 되는 큰 대리석 기둥들이 서 있고 성전 건물을 온통 아름다운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천정과 지붕은 금으로 장식하고 문들은 두꺼운 황금으로 장식하여 햇살이 비출 때는 눈이 부시어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전은 히브리 문하의 금자탑이었습니다.
성전 건물을 보고 감탄사를 발하는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성전의 외형적인 것에 마음이 현혹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반면 먼지 묻은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배를 내밀면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을 볼 때 항상 가난하고 배고픈 자신들이 불쌍히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은 것에 마음이 현혹되고 세상 영광에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칠 영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역사 창조의 주체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역사 의식과 하나님의 눈으로 시대 상황과 인류 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선지자적인 통찰력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중심을 꿰뚫어 보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부패한 내면보다 외형적인 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외형적인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예수님은 성전 내면의 부패를 보시고 예루살렘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 건물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을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인류 문화 문명의 몰락과 함께 인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 그들은 현실의 조그만 일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세상 종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세에 나타날 징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말세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짓 메시야야 출현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난리와 난리 소문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의지할 것을 찾게 됩니다. 이때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산 기도를 통해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재림주, 인류의 희망, 말세의 마지막 사명자, 이긴자 아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거짓 메시야는 사람을 미혹하여 근본적으로 진리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거짓 메시야는 거짓 사상과 거짓 희망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생명의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메시야는 십자가의 길보다 쉽고 편한 길을 가르칩니다. 또한 하늘나라보다 이 땅에서 평화와 안전을 누리며 잘 살 수 있다는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들입니다.
한 때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인 이념이 거짓 메시야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계급없는 이상사회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 강한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였습니다. 이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도 이것이 현실에 맞지 않은 유토피아임을 깨닫고 조금씩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이름하에 형성된 자본주의 노동착취와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의 현상만 낳고 온갖 부정과 부패, 부조리만 쌓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젊은 지성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거짓 메시야는 막시즘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막시즘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사회 구조나 제도와 같은 외적인 개혁만 부르짖고 인간 내면의 죄 문제를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의 부정부패는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자신의 죄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메시야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둘째로, 재난의 연속입니다(9-11). 각곳에서 난리와 난리 소란이 일어납니다(9). 또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납니다(10). 유엔 전쟁 보고서에 의하면 2차대전후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 무력 충돌로 사망한 사람은 2,100만명에 이르고, 85년 한해 동안 75개국에서 무력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처처에서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지진이 일어나면 땅에 쌓아 둔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또 기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2절에서는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 되어 남에게 무관심합니다. 이로 인해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대증으로 신음하고 한쪽에서는 기아로 고통하며 굶어 죽어 갑니다. 뿐만 아니라 온역이 있게 됩니다. 온역은 흑사병이나 AIDS와 같은 전염병입니다. 14세기경 유럽에 흑사병이 나돌았을 때 당시 유럽 인구의 1/4인 약 2500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온 세계에 AIDS병이 무섭게 번지고 있습니다. 세계 본건 기구에 의하면 100나라가 넘는 곳에서 500~1000 만명의 사람이 이 병에 감염되어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에 1억은 감염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하나님께서 성적 타락에 대한 경로로 주신 천역입니다.
이런 재난들은 그 자체가 종말이 아니라 종말의 징조요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난들을 통해 인생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마가복음 13:8절에서는 재난의 시작, 즉 해산 고통의 시작이록 하였습니다(The beginning of birth pain). 여인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전에 무서운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과 같이 재난은 장차 올 새 시대를 탄생시키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이 계속해서 일어나다가 큰 환난이 있게 되고 마침내는 세상 종말이 오게 됩니다.
그러면 재난이 연속되는 세상에서 신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9b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런 재난이 일어나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피웁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재난들을 통해 신자들은 세상에 붙은 거짓 희마을 털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신자들을 핍박하는 역사가 많이 있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위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는 크리스챤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종교적인 핍박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성도들은 이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은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핍박은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서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역사를 이루십니다. 캐나다에 핍박이 있게 되자 Toronto와 Hamilton이 개척되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신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명할 리허설까지 해도 막상 핍박을 받게 되면 리허설 한 것을 다 까먹게 됩니다. 이때는 성령을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장 견디기 힘든 가정의 핍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통 문화속에서 부모를 중심으로 가치관을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을 중심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그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에 자연히 마찰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나로 인해 가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복음이 전파되고 언젠가는 모든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진실되게 살면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칭찬을 커녕 미워하고 조롱합니다. 과거 죄짓는 생활을 할 때는 아무 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믿고 진실되게 살면 아무 이유도 없이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5:19)
우리가 이렇게 가정이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고 타협하거나 신앙생활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18). 우리의 생명은 사람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의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끝까지 죽는 순간까지 주님을 배반하고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때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해줍니다.
둘째, 인자의 재림(20-28).
20-24절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날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의 날인지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도 화가 있게 됩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큰 축복이지만 그 날에는 화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여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A.D. 70년 후 약 1900년 동안 각 나라에서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며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 종말에 관한 예언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25-26절 말씀은 인류 종말의 날에 일어날 현상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마태복음 24:29절에 보면 해가 어두워지면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해가 빛을 내기 아니하면 모든 생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별들은 이때까지 한번도 서로 부딪힘이 없이 질서 정연하게 운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수많은 별들이 태풍에 과일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됩니다(계 6:13). 그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 소리에 놀라 기절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려워 떨게 됩니다.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서 기절하게 됩니다. 그때는 쌓아 놓은 모든 과학문명도 순식간에 몰락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10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도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의 날은 최후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핵이 다 폭발하여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환난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시게 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습니다. 정욕과 욕심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몰래 극장에 가서 음란한 영화를 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구름타고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실 때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말구유간에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무도 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때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우렁차게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천군천사들을 대동하시고 가슴에 빛난 금띠를 띠고, 가시 면류관 대신 금 면류관을 쓰고 능력과 영광의 주로 강림하시게 됩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이 날은 불신자들에게는 형벌의 날이지만 신자들에게는 최후 승리의 날이요 영광의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서 늘 자신을 죽이고 죄인처럼 늘 머리를 숙이고 살았습니다. 또 신자들을 핍박하는 자들로 위해 기를 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당당히 머리를 들게 됩니다(막 13:27). 그때에는 생명책에 기록된대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머리를 들고 힘차게 대답하게 됩니다. 그때는 주 안에서 잠자던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서 공중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세상의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게 하는 내적 힘을 줍니다.
셋째, 깨어 있으라(29-38).
예수님은 재림을 희망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에서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압니다. 이처럼 세상에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살펴볼 때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32,33절은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하여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해 줍니다. 역사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릅니다(막 13:32).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됩니다(34). 이 날은 온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날을 준비해야 합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언제 주님 앞에 설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라도 부끄럼이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깨어 기도하시며 말씀을 가르치기에 힘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금세기 최대의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 문명이 해체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는 것과 중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온 인류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아야 함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민 구원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십니다. 이 인류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인류 구속 역사의 주체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그날까지 항상 깨어 기도하며 생명 구원역사를 감당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