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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63-23:25

by Mark Yang   04/23/2022   Luke 22:63~23:25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25 강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22:63-23:25
요절/ 누가복음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말이 옳도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공회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시고 사형언도를 받으신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위축되시지 않으시고 당당한 모습으로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의 위협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 시간 심문 받으면서도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Ⅰ.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22:63-71)

  예수님은 체포 당하신 후 바로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요한18:13). 예수님은 안나스로부터 심문을 받으시고 결박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요한18:24).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밤에는 모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야간 불법집회를 열어 예수님 사형으로 정죄한 후 형식적으로 새벽에 공회를 열었습니다.(막14:64,15:1)

  그들은 공회를 열기 전에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님을 지켰습니다. 63-65절을 보십시오. 그 사이에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며 희롱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말로 욕했습니다. 사람이 조롱과 모욕을 참는 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하잘 것 없는 종들로부터 조롱과 무시와 멸시를 받으실 때 얼마나 참기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날이 새자 그들은 예수님을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70여명이나 되는 공회원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떨려 그 앞에 제대로 설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고자 확증을 얻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작정했기 때문에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고자 하는 유도심문이었습니다. 유대에서는 신성모독이 가장 큰 죄로서 이는 사형에 해당되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도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다는 신성모독 죄 때문이었습니다(행6:14).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잘 아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말할 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라”(67,68).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부활, 승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온 세상을 다스릴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다윗 왕이 시110:1절에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주요 세상을 그 뜻대로 다시리시는 만왕의 왕이시요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존귀와 위엄이 넘치는 영광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시면서도 영광스러운 비젼에 불타셨습니다. 

  그들이 만일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하든지 꼬투리만 잡고자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다구쳐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그니라.” 70b절을 보십시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내가 그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서슬이 시퍼런 공회원 앞에서 예수님은 조금도 기가 죽거나 움츠러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수로서 심판을 받으면서도 심판장의 입장에 서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고난 자체에 얽매이지 아니하시고 고난 후에 올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숱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도 고난 후에 올 영광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지금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로서 오실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하며 사형으로 정죄했습니다. 

Ⅱ.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23:1-25)

  공회는 사형언도는 하였으나 로마 식민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빌라도 앞에 서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그들은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았으나 로마 법정에서는 예수님을 백성을 미혹하고 선동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 자로 고소했습니다. 이들의 고소 내용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바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20:25).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지만 세상 관원들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셨습니다(마17:24-27).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식과 위선에 찬 악마들이었습니다. 발라도는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재판관으로서 정치적인 측면에서 질문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현재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예수님의 생명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정치성 있는 대답은 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묻는 의미를 잘 아셨습니다. 만일 이를 시인하다면 예수님은 정치범으로서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무엇이라 증거하셨습니까? “네 말이 옳도다”(3b).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고소에는 잠잠하셨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실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37절에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분명한 소신을 배웁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하다거나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자기 신분을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 것은 잡혀서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물로 이를 회개한 후에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임을 분명히 증거했습니다(벧전1:1,벧후1). 사도 바울은 서신 첫머리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자랑스럽게 증거했습니다(롬1:1,빌1:1,디도서1:1). 이는 당시 예수님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대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떳떳하게 밝혔습니다. 초대 로마가 크리스챤들을 박해할 때는 크리스챤이라는 사실만 밝혀져도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때는 크리스챤임을 밝히는 것은 생사에 관계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밝히므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가정에서 식사 기도하기도 꺼려하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밝히기를 꺼려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크리스챤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신자들과 같이 행동합니다.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드러내면 조롱과 핍박을 받거나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분명한 소신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부끄러움을 받을 것입니다(눅9:26). 우리는 신자로서 분명한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의 목자로서, 선교사로서 분명한 소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소신 있는 인생을 살아야 겠습니다. 이런 자가 진정으로 용기있는 자이며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에 아무런  정치성이 없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러나 무리들은 더욱 굳세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부터 여기까지 백성을 소란케 하는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헤롯에게로 보냈습니다(7). 

  헤롯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보고자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자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기심은 영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심심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을 찾는 호기심이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마술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 그는 예수님에게 여러 말로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답할 가치 조차 없는 천박하고 속이 없는 자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따라 다니면서 헤롯 앞에서도 예수님을 힘써 고소했습니다(10). 헤롯은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하시므로 재미가 없자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12). 예수님은 속없고 천박한 헤롯의 조롱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며 갖은 조롱과 모욕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에 이 모든 조롱과 모욕을 참으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빌라도는 이방인 재판관으로서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과 악한 마음 때문에 심문 받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수님을 때려서 무죄 석방하고자 했습니다(16). 그러나 무리들은 일제히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주소서”하며 소리질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말할 때마다 무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20-23). 마침내 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 무리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열렬하게 환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력하게 체포당하심으로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이제는 성난 군중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유익을 따라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고 분명한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습니다. 또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용 당하여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현실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소인배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실리를 좇아 행동하는 소인배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순간적으로 유익을 보고 지혜롭게 행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를 좇아 행동하면 처음에는 좀 손해를 볼찌라도 결국에는 인정을 받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 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는 결국 인류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진리를 알고서도 진리대로 행치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법과 양심에 따라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소신껏 판결하여 예수님을 무죄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알고도 이를 행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진리대로 행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는 폭동이 일어나서 총독의 지위를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Security를 잃지 않고자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그는 탸협의 명수로서 현실적으로 훌륭한 정치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알고도 진리대로 행치 않는 가장 악한 자요 가장 약한 자였습니다. “연약한 자 그대 이름은 빌라도.” 그는 연약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지도자에게는 특권이 있는 반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 총독으로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엄청난 권세와 특권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는 자신의 판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판결은 사실에 부합되어야 하고 진리에 기초해서 공정해야 합니다. 그는 사실을 다 조사하고도 그 사실대로 행치 않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판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이 사람의 피에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며 손을 씻었습니다(마27:24). 그러나 손을 씻는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하여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으로서 영원토록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한마디로 진리를 알고도 행할 용기가 없는 창백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창백한 지성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습니다.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공부를 많이 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알기만 하고 행치 않는다면 그 진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때 진리는 상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좀 부족할지라도 실제 생활에서 아는 진리를 행하기에 힘씀으로서 진리를 행할 내적 힘을 길러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같이 진정으로 용기있는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