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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26-56

by Mark Yang   04/23/2022   Luke 23:26~56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26강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 누가복음 23:26-56
요절/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사건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총 결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죽음은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한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참으시고 인류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죽으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역사적인 진리로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가운데 은혜 받고자 합니다.

I.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26-38)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당하시고 공회에서 철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22:47-71). 그 후 빌라도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마침내는 십자가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23:1-26). 26절을 보십시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죄수들은 각자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약 70Kg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는 피가 섞인 땀이 맺혀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쓰러지고 또 일어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15-20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겪은 고난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로마인을 몽둥이 40대, 비로마인은 채찍 40대, 유대인은 채찍 120대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죄인을 홀랑 벗겨서 태형대에 묶어 놓고 실신해서 축 늘어질 때까지 온 몸을 채찍으로 쳤다고 합니다. 채찍 끝에는 납이나 뼈로 만든 더엉리가 달려 있어 채찍을 맞으면 피가 튀기고 피부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서운 채찍을 120대나 맞으신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육신은 지칠대로 지쳐 십자가를 지고 갈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이를 본 군병들은 시골에서 구경하러 온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좇게 했습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를 통해 그와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 루포가 유명한 기독교 인사가 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롬 16:13).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뒤를 따라오는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백성과 여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여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게 되자 동정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예수님은 우는 여인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되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여인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은 행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환난의 날이 이르게 되면 어린 아이로 인해 더 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 없는 자들이 더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재앙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사람들이 산 밑에 깔려서 죽기를 원하게 됩니다(30). 31절을 보십시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푸른 나무는 젊고 생명력이 넘치고 무죄한 예수님을 가리키고, 마른 나무는 노쇠하고 생명력을 상실하고 불의한 유대 민족을 가리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하물며 악한 유대 민족이 받을 형벌은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받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 19:41-44).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대장 디도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그때 그 환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굶주림으로 인해 어린 아이를 삶아 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고통보다 장차 예루살렘 백성이 받을 심판의 고통을 더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경고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예루살렘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납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 갔습니다. 마침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흉악한 죄인들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 중의 하나로 취급 받으신 것입니다(사 53:12). 그것도 중앙에 못박히심으로 죄인 중의 괴수로 취급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눅 2:2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죄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총살이나 단두대에 매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그 고통이 끝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면 2~3일 동안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맛보다가 기아와 갈증올 진이 빠져 죽는다고 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십자가에 못박힌 후부터 죽기까지 1000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사형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다리를 망치로 때려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손에 못을 박으면 찢어지기 때문에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손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손목에는 손으로 들어가는 신경이 모여 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군병들은 무자비하게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쾅쾅 박았습니다. 붉은 피가 쏟아졌습니다. 사지가 뒤틀리고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마랄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 22:14,15) 예수님은 너무 고통스러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절규하셨습니다(막 15:34)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무서운 고통을 받으셔야만 하셨습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극심한 만큼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고 악독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 이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모든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4,5).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반드시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 대가는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대가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장자 우리가 받을 무서운 형벌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 죄로 인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신음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가인과 같이 늘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참된 평안을 알지 못하고 유리방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는 즐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용감하게 죄를 짓습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기 때문에 인간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잊어 버리거나 합리화 한다고 결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대가를 요구하며 마침내는 우리를 파멸시키고 맙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받을 죄의 대가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채찍을 맞으시고, 내 대신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무서운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내 대신 야단만 맞아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으니 그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내 대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고통보다도 인간들의 죄로 인해 더욱 고통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도 자신들의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죄가 죄인지도 알지 못하고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죄인들을 마땅히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롬 3:25). 예수님은 이러한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누리게 된 영적 축복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14-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도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장벽이 생겼습니다. 인간 사이에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는 대신, 불신과 반목, 질시가 생겼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짓밟고 파괴시키는 죄악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원수를 갚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싸움은 싸움을 불러 세상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이 계속됩니다. 인간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해를 끼치면 그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은혜를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과 같이 마음 깊이 복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어디 두고 보자하며 남 몰래 칼을 갑니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수할 기회를 노립니다. 사무엘하 13장을 보면 다윗 왕가의 비극이 압살롬의 복수심으로 시작됩니다. 암몬이 압살롬의 누이 동생 다말을 연애하다가 강간을 한 후 쫓아 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압살롬의 마음에 무서운 복수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가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당대에 갚지 못하면 자식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는 한맺힌 유언을 함으로써 복수의 유산을 남기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당파 싸움, 족벌 싸움, 지역과의 싸움, 학생과 전경과의 싸움, 나라와 나라와의 사움 등 세상은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조금만 용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을 용성하지 못함으로 문제는 점점 더 확대되고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1:4). 그것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원수된 것을 소멸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고 인간 상호 간에도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고 인간과도 화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사람의 손에서 칼을 놓게 합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잡아 가두고 자기를 노예로 판 친구 멧살라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복수심으로 마침내 마차 경기장에서 그를 통쾌하게 무찔렀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의 복수심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그의 손에서 칼을 놓게 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응어리진 모든 원한과 복수심을 물리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미워하고 해치는 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행 7:60). 또한 손양원 목사님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양자로까지 삼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녹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인류의 죄악을 녹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친구를 시기하고 미워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러한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35절을 보십시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을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를 구원할지어다.” 그리고 군병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순미의 옷을 제비 뽑으며 희롱을 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 조롱은 메시야로서 참으로 참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를 참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신다면 인류 구속 사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실 때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며 시험했습니다(눅 4:3).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단은 끝가지 인류 구속 사업을 방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시험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남을 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II. 십자가에서 강도를 구원하신 예수님 (39-43)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달리 두 행악자는 서로 상반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라.”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 너무 무력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어찌 이런 비방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그가 자기 죄를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치 않을 때 그의 마음은 더욱 완악해 졌습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비방하는 행악자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0,41)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뉘우쳤습니다. 동시에 에수님의 무죄도 깨닫고 입으로 예수님의 옮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염치없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가 흉악한 지를 짓고 어떻게 죽기 1분전에 염치없이 이런 간구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에 가실 것을 믿었습니다. 과거 그는 부활도, 하나님 나라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흉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되게 회개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부활3도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 나라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놀랍기만 합니다. 이는 그가 십자가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완악한 심령을 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시커먼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할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오늘’이라는 말씀은 회개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해 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낙원으로 인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강도는 사는 날 동안 실컷 죄만 짓고 아무 한 일이 없이 다만 믿기만 했는데 그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했습니다. 이를 볼 때 어떤 죄인도 소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 이제는 염치가 없어서는 주님께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한 강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1:1을 하심으로 한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III.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 (44-56)

때가 제 육시쯤 되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 하늘도 슬퍼하고 땅도 슬퍼했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선이 악에게 짓밟히고 사단의 권세가 승리한 듯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 삼시(오전 9시)에 못박혀 제 구시(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고통하셨습니다. 그 후에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며 운명하셨습니다(4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받아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성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 집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커텐입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once and for all)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심으로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20).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7,48절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일어나 회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형 집행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로마 장교로서 잔인하고 무자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회개하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습니다. 예수의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다 멀리 사서 이 일을 보았습니다(49).

50절을 보십시오. 공회의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하시고 의로운 자요 불의와 타협치 않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형 판결에 부표를 던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마포로 싸서 자기를 위해 예비한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53).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54). 갈릴리에서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예비했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습니다(55,56). 이로써 예수님은 죽으시고 완전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 우리의 죄도 함께 죽고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롬 6:4).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짐을 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마음에 모든 응어리진 것을 풀고 심령에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온 인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