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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1-53

by Mark Yang   04/23/2022   Luke 24:1~53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27 강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말씀/ 누가복음 24:1-53
요절/ 누가복음 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쁘고 희망찬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절망의 세계에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무덤으로 간 여인들,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열 한 제자들, 이들은 모두 우리와 꼭 같이 슬픔과 염려, 실의와 좌절,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큰 기쁨과 벅찬 희망과 부활의 생명력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외쳤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우리의 삶 속에 또한 우리의 생애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말씀대로 살아나신 예수님(1-12)

  때는 안식일이 지나고 첫 날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그외 다른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고 뒤에서 기도와 물질과 사랑으로 복음 역사를 희생적으로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눅8:2,3).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신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23:49,55).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유대인은 금요일 해질 저녁부터 안식일 예비일이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씻고 향품을 바를 겨를도 없이 세마포에 싸서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23:54). 여인들은 그날 밤부터 안식후 첫 날 이른 새벽이 되기까지 악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선한 예수님을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후 첫 날 매우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평소 큰소리 치던 형제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지만 자매님들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누가 무덤을 막은 큰 돌을 굴려 줄 것인가 염려하였습니다(막16:3). 당시 유대인의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들고 입구는 큰 바위로 막았습니다. 고대 복음서 사본들은 이 돌을  20명의 남자들이 간신히 굴릴 수 있는 돌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돌이 이미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 들어가 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안 보이자 근심 중에 방황하였습니다. 누가 사랑하는 주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단 말인가? 여인들은 시체마저 없었을 때 더욱 슬펐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아침이었습니다.

  여인들이 근심 중에 방황할 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습니다. 천사들이왜 찬란한 옷을 입었을까요? 보통 초상집에 갈 때는 밝은 옷을 입지 않고 검은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상복이 필요없고 밝고 환하고 빛나는 부활예복이 필요했습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났을 때 여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들바들 떨며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이때 천사는 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평소 하신 말씀을 상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6,7).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여러차례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눅9:22,44,18:31-33). 예수님은 예언하신대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인생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천사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산 자와 죽은 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가 되십니다. 이 산 자는 부활한 나사로와 같이 또 죽을 운명에 처할 자가 아니요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계시록 1:18절은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게 되자 그 허리 안에 있던 모든 인류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담은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아무리 무공해 건강식품을 먹으며 건강관리를 잘한다 할찌라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음의 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참된 기쁨과 진정한 희망과 승리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가 감옥 안에서 참된 기쁨과 희망과 승리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나 결국 죽는다는 것 때문에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며,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며, 패배적이고 절망적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 죽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인생들을 죽음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서 인류의 대표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나 산 자가 됩니다. 이는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 자는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산 자는 슬퍼하며 운명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산 자는 무기력하여 드러눕지 않습니다. 산 자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결코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산 자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산 자는 늘 생명력이 넘치며 그 얼굴이 밝고 환합니다. 어두움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생각이 밝고 행동이 밝고 생활이 밝습니다. 산 자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긍정적입니다. 또 비젼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이 넘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생명의 세계, 부활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은 천사들의 부활 메시지를 듣고 평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최초로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가? 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을 듣고 허탄하게 생각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병자의 헛소리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여인들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환각 현상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과거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는 여덟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형제로서의 자존심이 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험상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다는 선입감과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부활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로 규정짓고 병자의 헛소리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사도들조차도 처음에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부활도 능히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허탄하게 생각했으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 무덤 속을 구푸려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세마포만 놓였고 시체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18C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 다녔던  길버트 웨스트 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결코 무덤에서 살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구하여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를 연구하는 중에 오히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역사와 증거에 관한 고찰 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 표지에  당신이 진리를 조사하기 전에는 결코 비난하지 말라 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중거가 무었입니까?
첫째로,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거나 아니면 누가 시체를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비판하는 자들은 제자들이 신화를 꾸미기 위해 훔쳐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시체 도난설이라고 합니다. 또 상치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덤 근처에 찾아와 무덤 근처에 심어 놓은 상치씨를 밟게 되자 동산지기는 화가 나서 예수님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후 사람들이 와서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부활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에 불신자들이 사용했던 비판입니다. 그 외에도 무덤을 잘못 알았다는 무덤 오인설,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살아났다는 기절설, 환각설, 예수님과 꼭같이 생긴 쌍동이 동생이 있어 예수님이 돌아가지자 부활하신 주님 행세를 했다는 쌍동이 형제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을 확인하려면 최소한 부활 자체를 믿는 것 만큼의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염려하여 무덤을 큰 돌로 막고 돌에 도장을 찍어 인봉하고 파숫군들로 하여금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살아나셨기 때문에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 예언한 바요(시16:8-11), 또 예수님 자신이 평소에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열 한 사도에게도 이를 강조해서 가르치셨습니다.(24:25-27,44-46)

셋째로,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달리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타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열 한 제자와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시고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일시에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최후에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절망하고 실의와 낭패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숨어 있었습니다.또 바울은 무자비하게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큰 기쁨과 확신과 희망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복음의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타오르는 활화산과 같이 생명력과 비젼으로 불탔습니다. 아무도 타오르는 그들의 열정을 꺽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 심지어 예루살렘의 많은 제사장들까지도 예수님을 믿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행6:7).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기만적으로 세상에 새로운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고귀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었을까요? 신화는 순교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살아나셨으므로 그들은 확신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는, 이교도들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또한 1세기의 유명한 사가였던 요세푸스는 로마 사람들을 위해 쓴  고대 풍습 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였다   그는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부활하셨습니다.

II .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3-53)

  13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제자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되는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2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신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희망 가운데서 부모님의 기대와 간곡한 만류도 뒤로 하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무력하게 돌아가시자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절망도 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사명인의 생활도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낙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나 무거웠습니다. 그들은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짓고 그동안 사명 감당하느라 하지 못한 효도나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훈련받던 시절이 참 좋았지.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 그 능력 많은 예수님께서 힘 한번 안쓰시고 왜 그렇게 무력하게 돌아가셨을까?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봐. 죽음이 원수지, 막달라 마리아가 불쌍하지,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너무 슬픈 나머지 귀신들렸지 뭐야 

  그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그들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까이 가셔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시며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저깨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나의 인생의 동반자요 친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내가 가장 절망적인 때도 겸손하게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실의와 좌절, 슬픔과 고통, 고뇌와 갈등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늘 실제적인 삶 속에서 나와 동행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분명 나와 동행하고 계시지만 두 제자와 같이 불신과 자기 연민에 빠져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이를 인식할 때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인식할 때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독을 이길 수 있고 슬픔을 이길 수 있고 운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천성을 향해 힘찬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문제는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도시화 될수록 고독문제는 더욱 심각해 집니다. 사람들은 진실된 영혼의 대화를 나눌 대상을 찾지만 그런 자는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저마다 불만이 가득한 응어리진 가슴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신경질을 내고 화를 냅니다. 어떤 분은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너무 괴로우니까 내면의 문제를 쉴사이 없이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고양이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독을 이기기 위해 고양이를 친구삼아 지냅니다. 또 서독에서는 개를 무척 좋아합니다. 개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같이 자기도 합니다. 개와 동행하며 개와 대화를 나눕니다. 이러한 고독은 현대인들만의 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의 병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인과 같이 쉼이 없이 유리방황하며 고독을 씹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고독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독할 때 대화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고 진리의 말씀으로 카운슬링해 주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대개가 다 남의 아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문제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상처를 입고 사람들에 대한 불신의 골만 깊어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진실한 친구가 되셔서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말씀공부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진실된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우리를 저 깊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저 높은 영광의 세계로 이끄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길 가면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정색을 하면서 머물러 섰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간첩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야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들었으나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실의와 좌절 가운데 낙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요한5:39).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본래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시지만 성육신하셔서 죄인들을 섬기시고 또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다시 자기 영광에 들어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세상을 통치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의 경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과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치루어야 할 죄의 댓가를 대신 치루심으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습니다(사53:4-6).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죄의 삯인 죽음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류의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두 제자에게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메시야관입니다. 이는 부활의 원리요 생명의 원리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고, 씨가 죽지 않고서는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노력 없이 공부를 잘 할 수 없고, 해산의 수고 없이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몸에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죄악된 본성과 자기 욕심과 이상, 자기 계획 등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척하면 안되고 정말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그때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부활신앙을 심으신 후 저희를 떠나 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감동을 받고 강권하여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할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 떼어 저희에게 주시자 비로소 그들의 영적인 눈이 떠져 예수님인 줄알아 보았습니다. 먹어야 영적인 눈도 떠지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조근조근 풀어 줄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시로 일어나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여 단숨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달려 갔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부활 심포지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 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두 사람도 질세라 주께서 과연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도 아니요 또 과장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심령깊이 영접할 때 우리의 내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됩니다.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 희망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그들이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평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몸이 부활했음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생선 한토막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선지서와 시편에 이르기까지 성경 공부를 하시며 부활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신앙을 심으시는 것은 이것이 가장 건전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신앙을 심으신 후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사죄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는 세계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할 성령의 능력도 약속해 주시고 저희 보는데서 승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쁨과 찬송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창조하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을 살리는 구원역사에 부활의 증인으로 귀히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