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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16-71(생명의 양식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4 강


생명의 양식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16-71
요절: 요한복음 6:35a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믿음을 축복하사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을 배웠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공급자가 되심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예수님과 무리들과의 대화로 엮어져 있습니다. 무리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육의 양식을 요구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의 양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인간은 육의 양식 이상의 것, 곧 영의 양식이 필요한 존재이며,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양식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양식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16-21)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 중에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자 무리들은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왕 추대위를 결성하여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는 대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모든 것을 뿌리치시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큰 역사를 섬긴 후라 심신이 지쳐서 파도와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항해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밤중에 그들을 돕기 위해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들은 유령인가 하고 두려워 했습니다(막6:49).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들 마음에 역사하던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목적지까지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무리들에게 주신 표적이라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제자들에게 주신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표적을 보여 주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자연세계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왜 헤엄을 쳐서 오시거나, 슈퍼맨같이 날아 오시지 않고 물 위를 걸어서 오셨을까요? 이는 현재 제자들이 광풍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광풍을 제어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세력을 능히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택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만일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물에 빠져 죽으면 구속 역사의 후계자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안 계실 때 큰 바람을 일으켜 택한 자들을 수장시킴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기의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택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확신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Ⅱ.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22-59)

첫째,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22-27)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인간의 빵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이 표적을 통하여 영적 의미를 발견하고 영적인 상황이 진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 삼으려는 정치적 야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행동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튿날이었습니다. 무리들은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늘 배고픈 생활을 하다가 오랫만에 떡을 배불리 먹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나니 또 배가 고파졌습니다. 그들은 전날 떡을 배불리 먹던 생각이 간절해져서 다시 떡 먹던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다가 마침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너무 반갑고 신기하여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이렇게 열심히 찾아 온 것을 보면 뜨겁게 환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예수님은 그들이 먹는 문제에 얽매여 벌레와 같이 추하게 된 것을 보셨습니다.

무리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좇은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기를 원했습니다(2). 그들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르자 영적 소원을 잃고 예수님보다도 떡 자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떡 공장 주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전락하게 된 것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영적 소원을 가지고 겸손하게 투쟁합니다. CIS의 양들을 보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마음이 겸손해져서 영적으로 갈급하여 말씀을 잘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배부른 나라의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여 복음을 잘 영접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마음이 부요해져서 영적 소원을 잃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동물과 달리 육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의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명인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위엣 것을 사모하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살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이 좀 어렵다고 해서 땅에 코를 박고 땅의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만 추구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전락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직장도 다니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썩어 없어질 것에다 인생의 목적과 소망을 두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물질만이 아니라 세상 명예나 권세일 수도 있고 학문이나 고상한 예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리 고상하다 할찌라도 결국에는 썩고 쇠하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벧전1:24). 이런 것들은 삶의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의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고귀한 만큼 우리의 인생 목적도 고귀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만족을 얻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쓰지만, 영생에 이르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육신의 복지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만 영적 복지에는 무관심합니다. 권세와 명예와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눈물겨운 투쟁을 하지만 영적인 일에는 한없이 게으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결국 다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내놓고 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피곤과 허무와 좌절 뿐입니다. 세상 명예와 권세와 부와 영광을 한 몸에 다 누렸던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헛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마지막 장인 12장에서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12:1). 그리고 결론적으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전12: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Pablo Star Oh 목자님은 과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외교관 생활이 너무 허무하고 지겨워서 하루 빨리 그만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서 교통사고를 만나 금식 기도를 하던 중 안요셉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요셉 선교사님과의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세계 캠퍼스 선교사명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외무부를 세계선교 역사를 섬기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근무하고 점심 때마다 동료 직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를 오병이어로 받으시고 축복하사 요사이 외무부에 큰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Pablo 목자님의 생활은 활기에 넘치고 생명력이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인생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과 복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치신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영원불멸하시는 분이십니다(요1:1, 딤전6:15). 또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지만 복음의 말씀은 영원합니다(벧전1:24,25a).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벧전1:4a).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또한 그의 영원하신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참 만족이 있고 가치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28-29)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노력의 댓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양을 fishing하고 1대1 하고 청소하고 serving하는 것 등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양 문제로 인해 문제에 빠지고 믿음을 상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양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되고 또 양 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롬1:17). 시작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큰 업적을 남긴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어 넘어져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별로 한 일이 없을지라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큰 일을 하게 됩니다. 김 아브라함(상규) 목자님은 의대 6년 동안 많은 양을 치지 못하고 김정우 형제님 한 사람을 섬겼습니다. 6년 동안 창세기 공부도 다 끝내지 못하고 아직 1강이 남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척기의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홀로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온전히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큰 일을 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영향력으로 인해 오늘날 고대 의대에 놀라운 복음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30-51)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지만 무리들은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떡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놀라운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예수님께 믿을 만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어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영적인 뜻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8:3). 예수님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이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참 양식을 주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2,33).

그러자 무리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며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본질로서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자시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이심을 말해 줍니다. 양식은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유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 배고픔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비참하게 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배고프면 힘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과 기쁨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은 영력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이 없고 참된 영혼의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내면에 항상 허무를 느낍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그 후에 찾아오는 허무 때문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텅빈 가슴을 안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는 영적으로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굶주림은 영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해소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참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목마른 자에게 영생수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빛이 되시고, 방황하는 자에게는 길이 되시며,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께 나아 갈 때 허무가 사라지고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막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축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고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시고 다 영접해 주십이다(37).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마지막 날에는 살려 주십니다(39b,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38,39a).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온 양식이라고 하자 무리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인간조건을 보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는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구세주께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영적 소원을 갖게 하시고 주님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주님께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적 소원이 없는 그들을 포기치 않으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47,48).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기 때문에 먹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입니다.

넷째,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52-59)
5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제 이 사람이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영적으로 꽉 막힌 이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53-5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예수님의 생명이 내 속에 거하게 되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영적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되고 나도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맛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58).

Ⅲ.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60-71)

예수님은 육의 것에 얽매여 있는 무리들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영생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며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된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지 않고 육적인 차원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앞에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뒤의 영은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육의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을 살리는 중생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또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결국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더 이상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물러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망가는 양들에게 미련을 두고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도망 가더라도 그들과 타협지 않으시고 분명한 복음 진리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의리나 또 직분이나 수제자로서의 지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을 맛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인생은 무의미하고 허무하기 때문에 갈 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생명이요, 기쁨이요, 희망이었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믿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 진리는 결코 이해한 후에 믿을 수 없습니다. 먼저 믿어야 영적인 눈이 떠져서 알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되고, 더 확실히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는 몸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리들과 같이 육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했을 때 결국에는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제와 사회 복지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실로 많은 수고를 합니다. 이는 물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커녕 피곤과 권태와 영혼의 불안만이 쌓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의 양식 이상의 것, 즉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