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 사도행전 4:32-6:7
요절/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초대 교회는 외적으로 심한 핍박과 내적으로는 불 같은 시험을 겪으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연단되고 성장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도들은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을 때 이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성령의 방향을 좇아 적극적으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또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기도와 말씀 전파에 전무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말씀 전파하는 것으로 모든 역경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외적 내적으로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성령 충만하여 쉬임없이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역경을 이길 수 있는 비결과 모임이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아나니아와 삽비라 (4:32-5:11)
4:32-37절에는 초대 성도들의 물질 생활이 나옵니다. 그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데서 하나님 중심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자진해서 기쁨으로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눠줌으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이기심과 욕심과 물질에 대한 애착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런 생활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이런 생활의 기초는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씀 증거를 통해 큰 은혜를 덧입고 부활신앙으로 모든 소유를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았습니다.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있을 때 땅의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을 꾸리고 인색하고 이기적이고 물질에 얽매이는 것은 소망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물질을 바친 사람 가운데 구브로 태생으로 레위족인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란 권위자 즉, 권면과 위로 잘하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힘을 빼는 말을 잘 합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에게 힘과 용기를 잘 북돋아 주는 자였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관용에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내적으로 무서운 사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인 것처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기 자신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이 왜 땅 값 얼마를 감추었을까요? 그들은 소유를 다 바치게 되면 지금은 몰라도 장래가 염려되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결국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몰래 자기 것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사단의 시험에 든 것입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불신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때까지 인도해 오신 것 같이 장래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마디로 부활신앙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체면과 인정 때문에 사단의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분량대로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사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고 외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만 보고 제2의 바나바가 나타났다고 칭찬했습니다. 아무도 그들 가운데 파고 들어온 내부의 적을 식별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으로 이 무서운 내부의 적을 간파해 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엎드러져 혼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듣는 자가 다 크게 두려워하고 하나님과 주님의 종들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땅값 얼마를 감춘 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 죄가 될까요?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치고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꼭 죽어야만 했는가? 하나님도 너무하시고 베드로도 너무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들 부부에게 동정심이 갑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단순히 물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무서운 사단의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막 3:28,29). 그들의 죄는 성령의 역사가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고의로 외식함으로 성령을 속이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한 것입니다. 만일 이를 방치해 두게 되면 인본주의 누룩이 순식간에 퍼져서 이제 막 시작된 신자의 공동체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내부에 파고든 무서운 사단의 역사를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 편에서 과감하게 짤랐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켰습니다.
Ⅱ. 쉬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 (5:12-42)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후로 더욱 큰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능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12).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가면 혹 그 그림자라도 덮일까 하여 병든 사람을 침대에 누이고 거리에 나왔습니다. 병든 자와 악령에 시달림받던 자들이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큰 역사가 있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양들을 다 빼앗기므로 시기심이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내적 시련이 끝나자 외부적인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도들이 모두 옥에 갇힘으로 복음역사는 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사도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9,20 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아마 사도들은 감옥에서 실의와 좌절 속에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핍박을 받게 되면 마음이 안으로 오그라들고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어 성전에 가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핍박을 감해 주시거나 원수들을 제거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역사를 잘 이룰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들이 있는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 말씀에는 말씀 전파를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단은 말씀 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말씀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말씀의 종들인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풀어 주면서까지 생명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말씀 전파를 통해서만이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생명 구원의 역사는 말씀 전파와 정비례합니다. 우리가 100만큼의 말씀을 전파하면 100만큼의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200만큼의 말씀을 전파하면 200만큼의 생명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구원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에 따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극성스럽게 1:1 역사를 이루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 전파는 실로 절박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응급환자와 같습니다. 응급환자는 우선적으로 생명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잠하지 말고 생명의 말씀을 이 시대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다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자 그 내면에 두려움이 생겨 더 이상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사도 바울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1년 6개월 동안 힘써 말씀을 전파했을 때 항구도시인 고린도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주의 사자가 명하는대로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모아서 사도들은 성전에서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는데 왜 계속해서 가르치는가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고자 했기 때문에 권세잡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의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0-32)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크게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말리엘의 현명한 권고를 통해 사도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34-39).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찍을 맞은 사도들의 자세가 어떠했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에 떠나니라” 그들은 채찍을 맞고 움츠러들거나 슬픈 생각에 빠지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핍박받을 만한 자격이 인정된 사실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핍박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5:11,12). 사도들과 같이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가 복음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Ⅱ부의 이종우 목자님은 지난 해 한의대를 졸업하고 계속해서 한의대 복음역사를 섬기기 위해 인턴으로 남았습니다. 한의대 인턴훈련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종우 목자님은 처음부터 다니엘과 같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턴 신고식 때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인턴 역사상 이 때까지 없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종우 목자님은 역적으로 몰리고 모든 인턴이 4주 동안 외출금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인턴들을 강제로 술을 먹이지 말자는 말이 나오게 되고 또 올해 레지던트로 들어간 소아과에서는 아예 술 먹는 것을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소아과 과장이 이종우 목자님에게 포도주도 안되겠는가 물어보자 그것도 안 마시겠다고 말함으로 조금도 타협치 않았습니다. 이로써 이종우 목자님은 다니엘과 같이 믿음의 순결을 지켰을 뿐 아니라 죄악된 전통을 깨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싸워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는 먹힐 수 밖에 없고 맛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위협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쉬지 않고 1:1 말씀 역사와 Fishing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다고 1:1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울수록 더욱 힘써 말씀 전파에 힘썼습니다.
Ⅲ. 기도와 말씀 전파에 전무한 사도들 (6:1-7)
사도들의 계속된 말씀 전파로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구제하는 일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구제대상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역간 차별대우를 한다고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자 사도들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이른 것입니다. 모임에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면 사단이 이를 통해 역사하여 분열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사도들은 회개하고 더 힘써 그들을 섬기고자 방향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의 영향력이 좋은 자 일곱을 택하여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고자 하였습니다(4). 사도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와 말씀임을 알고 이 일에 전력투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복음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어떤 것보다도 말씀과 기도를 통한 영혼 구원역사에 최고의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업 중심으로 흐르기 쉬운 때에도 기도와 말씀 중심의 분명한 영적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복음역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 1대1 말씀 역사가 점점 왕성하여지자 이에 비례해서 수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기존 종교세력인 제사장의 무리도 말씀에 복종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론: 이상에서 예루살렘 복음역사를 살펴볼 때 말씀 역사임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외적으로 심한 핍박을 받을 때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쉬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 역사가 비대해짐에 따라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들이 외적, 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말씀을 놓지 않고 말씀 전파에 힘썼을 때 그들은 역경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고, 모임도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고전 1:21절에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또 로마서 10:17절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지식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 지식은 오히려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우리를 번뇌케 하고 근심케 하고 교만케 하고 두렵게 합니다. 또 어떤 지식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참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사람들은 노아시대와 같이 육신의 감정대로 살게 되고,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인간은 자연히 육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의 사명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적 무지 가운데서 그대로 죽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