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5 강
스데반의 순교신앙
말씀/ 사도행전 6:8-7:60
요절/ 사도행전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거짓과 술수와 음란과 폭력 등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순수하고 진실되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딤후3:12) 세상은 순수하고 진실되게 사는 자를 용납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고 짓밟아 없애 버리고자 합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무너드리고자 하는 복음의 원수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안일한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 할 때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없고 오히려 거대한 죄의 세력에 잡혀 먹히게 됩니다. 스데반과 같이 순교 신앙을 가질 때만이 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교신앙이라고 하면 순교하라는 말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순교신앙이란 부활신앙이요 복음신앙입니다. 이 시간 스데반의 순교신앙을 배워서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 (6:8-15)
스데반은 최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을 보면 그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좋은 영향력의 소유자였습니다.(3) 또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였습니다.(8) 그는 한마디로 충만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신경질이 충만하고 음란과 욕설로 충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혜가 있는 사람은 힘이 부족하고, 힘이 있는 자는 은헤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잘 조화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을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권능이 가장 잘 조화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깊은 은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내면이 강해지고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을 수 있게 됩니다.
스데반은 베드로와 달리 사도가 아니라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와 같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능력있는 종이었습니다. 또 그는 7장에서 볼 때 능력있는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능력있는 종이 되려면 사도와 같이 타이틀이나 직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full time목자가 되어야 큰 일을 할 수 있고 평신도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스데반이나 8장에 나오는 빌립은 모두 평시도였지만 능력있는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쓰실만한 능력있는 종이 되려면 타이틀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자 이를 시기한 어떤 사람들이 각 회당에서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지혜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을 충동시켜 그를 잡아 공회 앞에 세워 거짓 고소를 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은 성전과 율법 문제였습니다. 그드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 함을 들었다고 하며 신성모독죄로 고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절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성전과 율법의 참 뜻을 상실하고 점점 형식적이고 의식화되어 부패해져 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부패가 극에 달하여 전혀 쓸모없는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 포도주와 같은 신선한 복음이 전파되자 그들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이 충돌은 기존 전통 가치관과 복음의 충돌이었습니다. 이 충돌에는 불꽃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로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의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는 영국 런던 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능통하게 말하는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1863년 만 24세의 나이에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지푸(Chefoo)라는 곳에서 두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를 만난 후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1865년 중국 배를 타고 한국에 와서 얼마동안 머물면서 한국어를 열심히 습득했습니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샤만호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대동강가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박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을 쓰고 있어 외국인들을 무조건 적대시 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전하는 기독교는 사교라 하여 이를 믿는 자는 참수형에 처했고, 성경은 위험한 책이라 하여 버리거나 벽지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제네럴 샤먼호는 불타고 상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때 토마스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병사에게 성경을 나눠 주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칼에 맞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 나의 만 27세였습니다. 이러한 토마스 목사님의 순교의 피는 터툴리안이 말한대로 교회의 씨가 되어 오늘날과 같이 한국에 놀라운 복음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찌기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명절이면 제사상을 차려놓고 조상들에게 절을 하는 조상숭배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자 크리스챤들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우상숭배이므로 절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복음과 전통적인 가치관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충돌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통해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깨어지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을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이때 공회의 분위기는 거짓 고소와 위협으로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권세맡은 자들은 스데반에게 겁을 주며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조그도 움추려들거나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두려움과 불안 대신에 은헤와 평강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대개 환경에 따라 신앙이 좌우됩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믿음의 중심을 잘 지키지만, 불신적인 분위기나 핍박하는 곳에서는 기가 죽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압도했습니다.
Ⅱ. 스데반의 메시지 (7:1-53)
대 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소 내용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데반은 이대 자기를 변명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변명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이 고소한 성전과 율법에 대한 위대한 변증 메시지로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초로 그 본래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메시지의 내용을 구분해 보면 1-16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해설하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삭, 야곱, 요셉의 역사를 말합니다. 17-43절은 모세의 율법을 해설하는 것으로서 모세의 역사를 말하고, 44-53절은 성전의 역사와 최후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ⅰ) 1-16 : 스데반은 “여러분 부형드이여 들으소서”하며 부드럽고 친근하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친히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이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우상들과 구별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당대에는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으시고 다만 그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되어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그 후에 출애굽하게 될 것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그가 후에 이삭을 낳아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후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이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 때문임을 깨닫도록 함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언약이 앞선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는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의 총리로 삼으시고 흉년 때 조상들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귀하게 쓰셨습니다. 형들은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은 실패치 않으시고 이를 통해 구속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는 아무 죄없이 형들에게 팔려 환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사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아무 죄 없으신 에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사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ⅱ) 17-43절 : 스데반은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서 모세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내어 버려져야 하는 비참한 운명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여서 석달동안 길리우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게 되었사. 그는 지도자로서 인간 기초를 쌓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려면 광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어 장성하게 되었을 때 인생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압제받고 있는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구 사람에게 압제 받는 것을 보고 궁중에서배운 무술로 한 방에 쓰러뜨려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백성들의 구원자로 세우셨음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화목시키려 하자 백성들은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배척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고 광야로 도주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철저히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할 수 있는 광야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통해 철저히 낮아지는 겸손 훈련과 참고 인내하는 인내 훈련과 말 없이 양ㄸ들을 섬기는 섬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시고 애굽에서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을 백성의 구원자로 생각하고 자기 힘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철저히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교만한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도저히 쓰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훈련을 통해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때, 즉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쓰실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배척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도자와 구원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 모세가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37) 또한 모세는 조상들과 함께 성막, 즉 광야 교회에 있었고, 생명의 도, 곧 율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세우시고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세에게 순종치 않고 그를 거절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사 바벨론 밖으로 옮기셨습니다.(44)
이상에서 스데반이 모세를 배척하고 불순종한 조상들의 죄악상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변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세도 조상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으로 인해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세우시고 구원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이와같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주가 되십니다. 그들이행하고 있는 죄악은 과거 조상들이 행한 죄악과 꼭 같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ⅲ) 44-50절 : 스데반은 이제 주제를 바꾸어 성전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양식을 따라 만든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정거의 장막의 모형이었습니다. 원형은 변형되거나 없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모형은 언제든지 변개되고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가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솔로론 때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사람이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하늘이 그 보좌요 당이 그의 발등상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크신 하나님을 손으로 지은 곳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성전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성전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친히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전을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성전에 대한 이런 견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그들의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51)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형식적이고 그 마음에 순종과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한대로 의인을 살인하였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의 죄악을 역사적 입장에서 날카롭게 지적함으로써 그들이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Ⅲ. 스데반의 순교 (54-60)
스데반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면 사죄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게 되면 마음이 더 완악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이만 부드득 갈다가 이만 다 상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니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스데반은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기가 싫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합심하여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그는 이 말을 하고 잤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사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그것으로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순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가 되어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19) 뿐만 아니라 핍박자 사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교를 받으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죽음은 그 사람의 일생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해진 것으로서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살았을 때 어떻게 사는 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고 실족시키는 생활을 하더니 죽을 때 미쳐서 악을 쓰며 죽었습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인생을 마치기를 원한다면 평소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순교자적인 생활의 결산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순교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순교자적인 생활이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우리가 어떻게 음란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며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이는 스데반과 같이 순교신앙을 가지고 도전적으로 신앙생활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저는 늘 넥타이를 맵니다. 이는 첫째로,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키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목을 내놓고 순교자적인 자세로 복음 역사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목숨을 내놓고 할 때 못할 일이 없습니다. 순교신앙이란 부활신앙이요 복음신앙입니다. 투철한 복음신앙으로 무장하여서 대적이 심한 사회에서 죄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