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6 강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
말씀/ 사도행전 8:1-9:31
요절/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역사는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는 두가지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핍박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하신 것과 다른 하나는 핍박자 사울을 택하사 복음의 일군으로 세우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울을 택하사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빌립의 사마리아 복음역사 (8:1-40)
(1) 사마리아 복음역사 (1-25)
1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순교후 에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이 핍박을 주동한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교회를 잔멸하고자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성도들을 잡아 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철저하였고 무자비하였습니다 이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만 순교를 각오하고 중심을 굳게 지켰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성도들은 핍박 때문에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었지만 복음을 들고 선교사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센티멘탈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담대히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단은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을 끄고자 하다가 오히려 불똥들이 튀어 다른 곳에도 불을 붙여 놓게 했습니다 사단은 성장하는 교회를 박멸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를 통해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악의 세력이 결코 성령의 역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는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마술사였습니다. 그는 마술을 행하여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였습니다. 백성들도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시몬을 하나님의 큰 종이라 일컬었습니다. 이를 볼 때 현재 사마리아성은 마술문화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좇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성은 오랫동안 마술이 성행하여 시몬과 같은 마술사가 인기를 얻고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단순히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전하였는데 마술사까지도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온전히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죄악된 세력도 파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곳에는 그 어디나 나름대로의 토속문화,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인도는 힌두교가 있고, 중국은 용을 섬깁니다.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샤마니즘의 문화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불교, 유교도 샤마니즘화 되었고 기독교도 샤마니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일군들은 바로 이런 죄악된 퐁토에 대항하여 복음을 전파하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때 한가지 확신해야 할 바는 복음만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복음이 일군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단순히 복음을 전할 때 그 사회의 깊은 영적 잠을 깨우고 새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큰 복음의 역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물급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지원했습니다. 두 사도는 사마리아에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불길에 기름을 침으로써 더 큰 역사가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과거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 내려 멸망하기를 바라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며 이를 지원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시몬은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그런 권능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악독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그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으면 책망할 자는 책망하고, 격려할 자는 격려할 수 있게 됩니다.
(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26-40)
빌립이 한창 사마리아에서 복음역사를 활발히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남으로 향하는 가사로 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길은 광야였습니다. 빌립은 하던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일어나서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한 에디오피아 사람이 병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를 가지 자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제기획원 장관 정도 되었습니다. 그는 권세와 부와 명예를 가진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바쁜 국사를 제쳐두고 특별 휴가를 얻어 먼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그의 영적소원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겨울 특별 휴가 기간을 온통 다 투자하였습니다. 또한 물질과 정열을 투자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부와 권세와 명예 등 세상의 좋은 조건들이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만나 그를 예배할 때 참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간다게 내시와 같이 간절히 찾는 자를 찾으시고 만나주십니다. 잠언 8:17절을 보면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29:13절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영적소원이 있는 그를 빌립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빌립은 즉시 순종하여 달려 갔습니다. 마침 내시는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선생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물 마시듯이 영적 갈함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예정론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구원하실텐데 성경선생이 왜 필요한가?”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몰라서 이를 해석해 줄 성경선생을 찾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자에게 1:1로 성경을 조근조근 가르쳐 주면 영적비밀을 깨닫고 변화됩니다. 캠퍼스에는 내시와 같이 하나님을 찾고 생명의 말씀을 간구하는 지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아니라 세계 어느나라를 가든지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를 만나서 1:1로 성경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것입니다.
내시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빌립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빌립과 내시는 병거에서 1:1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말씀은 이사야53:7,8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입니다. 빌립은 이 말씀을 기초로 내시에게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내시의 마음가운데 복음이 역사하였습니다. 그는 즉시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하여 길을 갔습니다. 그의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 한 사람의 변화로 에디오피아에 구원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에디오피아는 최근까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사 빌립을 내시에게로 인도하시고 1:1 말씀공부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운데 영적 깨달음과 변화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빌립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빌립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빌립은 유능한 1:1성경선생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강의안도 없었고 1:1노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석에서 성경말씀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준비된 자립적인 성경선생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성령의 역사에 언제든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역사에 충성하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광야로 가라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신 사람은 아프리카 흑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양 때문에 멀리 이곳까지 와야만 했는가 회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지시하시면 어느때든지, 어느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이 준비된 사람이요, 마음이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자를 귀히 쓰십니다. 우리가 빌립과 같이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기 위해서는 평소에 1:1성경선생으로서 준비를 많이 해야 됩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복음의 종으로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성령께서는 핍박을 통해 예루살렘 복음역사를 유대와 사마리아로 넓히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핍박이 없었더라면 예루살렘 성도들은 유다이즘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또 흥황하는 예루살렘 역사에 만족하기 쉬웠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헤아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합니다. 성령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원대하고 깊고 넓은 뜻을 두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가지 확신해야 할 것은 성령께서는 복음역사를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이 있을 때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움추러 들 것이 아니라 흩어진 성도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Ⅱ. 사울의 회심 (9:1-31)
스데반의 핍박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에 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핍박자 사울의 존재는 여전히 교회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오히려 이런 사울을 잡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귀하게 쓰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에게 두신 뜻이 무엇입니까?
(1) 사울을 체포하신 예수님(1-9)
사울은 성도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인자의 독기가 서려 있었고, 그의 손에는 거룩한 성도들의 순교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잔멸하고자 철저한 수색작전을 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은 부족하여서 먼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잡아오고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습니까? 22:3절과 26:8,9절에서 그가 간증한 내용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이단이라 생각하고 이를 대적해야 될 줄을 스스로 확신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영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영접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저주요 실패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위하여 예수당을 이땅에서 싹쓸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금의 동정도 없었습니다.
사울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땅에 꼬꾸라졌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얼떨결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에서 이제는 눈뜬 장님이 되어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체포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체포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받고 있는 자들은 분명히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성도들을 결코 외면치 아니하시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성도들보다 더 고통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엡5:23) 이 예수님은 교회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시고 돌봐주십니다.
둘째로, 빛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빛은 너무나 강렬하여 사울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빛으로 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만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적으로 사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으로서 순수혈통을 자랑했습니다. 또 그는 교회를 핍박할 정도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열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한번하고자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해내고야 마는 끈질긴 투쟁심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서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범인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인간적으로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만하였습니다. 그의 교만은 결국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교만이 그의 영적인 눈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고 율법적으로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영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두움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빛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빛이 임하자 그의 심령에 있는 모든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이 빛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친 영광스런 부활의 빛이었습니다. 이 부활의 빛, 생명의 빛이 사울에게 임하자 죽어가던 그의 영혼은 소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겼던 그의 영적인 눈이 뜨여졌습니다. 이때 인간 사울은 죽고 새사람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죄의 종에서 의의 종, 사단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사울과 예수님과의 싸움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2) 택한 그릇(10-18)
예수님은 사울을 체포하신 후 그를 위해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상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을 찾아가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자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종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에게 악명높은 자로서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이때 주께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을 택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한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사울은 이때까지 자기 이름과 명예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완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많았습니다. 그의 이름도 초대왕 사울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 지었습니다. ‘사울’이란 큰 자,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큰 자가 되고자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진노의 그릇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구원하시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자기를 철저히 비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위하여 어느 정도 많은 고생을 했는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한 간증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강도의 위협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번 자기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9) 하나님은 결코 손해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고생을 하더라도 그 이름을 위하여 하는 고생은 영광스런 것입니다. 이 고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심령에 조각되고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울을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큰 뜻을 두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방 세계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이지만 다소 출신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당시의 철학과 사상을 정통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양대 사상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세계를 잘 이해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놀라운 충성심과 열정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방향만 잘 잡아주면 크게 쓰임받을 그릇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택하셔서 쓰시고자 절대주권으로 사로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택하심을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그 주권대로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절대주권으로 어거스틴을 택하시고 5세기 혼란한 사상적 배경 가운데서 그를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시대마다 그 주권대로 사람을 택하시고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즉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울 한 사람의 변화는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무서운 폭풍우가 지난뒤 평온함이 교회에 깃들게 되었습니다. 사울 한 사람의 변화로 인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더 흥왕하게 일어났습니다. 뿐만아니라 세계선교를 위한 새로운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주권적으로 사람을 택하사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던 우리를 구원하사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는 택한 그릇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