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일어나 잡아 먹으라

by Mark Yang   04/23/2022   Acts 9:32~11:18

Message


사도행전 제 7 강

일어나 잡아 먹으라

말씀/ 사도행전 9:32-11:18

요절/ 사도행전 10: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주권적으로 택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심으로 이방 선교의 기초를 놓으셨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이방 선교의 사상적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역사가 좁은 유대세계를 벗어나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좁은 유다이즘의 세계에서 벗어나 주님의 원대한 소원을 영접함으로 만민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 (9:320-11:18)

(1)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9:32-10:16)

9:32-43절까지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복음 역사를 능력있게 감당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애니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또한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기도로 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자를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사방에 영향력을 끼치는 큰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범위는 유대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세계적인 복음의 일군으로 쓰시기 위해 넓은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유다이즘을 깨야 했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가아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입니다. 이는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므로 오늘날 중대장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권세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식민지 지역인 가아사랴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그 지역에서는 상당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군인들은 음란하고 육신적입니다. 또 무자비하고 율법적입니다. 명예심이 강하여 출세하기 위해 부하들을 달달 볶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강포하고 거짓 고소를 일삼아 식민지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도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또 그는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여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그의 구제는 식민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환심을 사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구제였습니다. 또 그는 항상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敬天愛人하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훌륭한 자였으나 복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심령에는 참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구제를 받으시고 그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성경선생인 시몬 베드로를 청하도록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고넬료에게 환상이 임하고 난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때는 낮 12시였습니다. 점심 때라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훈련 받을 때나 성숙한 목자가 되어서나 항상 식욕이 왕성한 베드로는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배가 고팠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배는 고프고 기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비몽사몽간이 되었습니다. 비몽사몽이란 황홀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때 베드로에게 환상이 임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를 매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배고픈 것을 잘 아시고 내가 좋아하는 불고기, 탕수육, 만두와 같은 음식들을 보내 주시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그 안에는 구약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돼지, 쪽제비, 쥐, 도마뱀, 부엉이, 따오기, 박쥐, 까마귀와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만 해도 징그러워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체질적으로 꺼리는 것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보고 식욕이 싹 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베드로의 이 대답 가운데서 우리는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상 만민 중에 구별하사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 만민을 품고 기도해 주고 말씀을 가르치며 겸손히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선민 사상 때문에 교만해지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선민 사상 외에 유대인들을 유대인 되게 한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율법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자녀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자녀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율법 교육을 시켰습니다. 유대인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 반드시 자녀에게 성서와 탈무드를 가르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였습니다.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까다로운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훈련을 받고 자랐습니다. 물론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부정한 것에 가까이 하지 않는 훈련도 철저히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생활의 중심을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생활화되어 그들의 골수에까지 새겨졌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연단된 백성으로 만들어 어느 곳에 가든지, 아무리 강한 이방 문화 가운데서도 선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자기 의를 쌓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2,3 절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바른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자기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복종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 때문에 복음을 영접치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또 그들은 율법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반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육신과 감정을 좇아 살며 도덕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생각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불법으로 여겼습니다. (행10:28) 이런 배타적인 민족성 때문에 그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택하시고 그들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선민 사상이 바로 유다이즘입니다. 이러한 유다이즘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좁고 편협하고 폐쇄적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그의 무의식 세계 깊은 곳에 이런 유다이즘적인 요소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은 먹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런 부정한 음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비몽사몽 가운데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두번째 소리가 들여 왔습니다. 10:15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번이나 이렇게 하신 것은 이것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세계적인 복음의 종으로 쓰시기 위해서 그에게 있는 유다이즘을 깨시고자 세번이나 반복해서 훈련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본래 범 세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이 범 세계적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도 범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족속도 품고 섬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이즘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서 이방인들을 품고 섬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크게 쓰시기를 원하셨지만 유다이즘 때문에 쓰실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그를 훈련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뜻을 두시고 우리를 세계적인 인물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이 만민 구원 역사에 쓰임받기에 힘든 유다이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세계선교를 하고자 할 때 체질적으로 꺼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을 잘 영접하지 못하는 배타성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국제 결혼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꺼립니다. 우리에게는 백의 민족이라는 자기 의가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유교 사상과 불교 사상이 우리의 사고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교 사상은 이조 500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사상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깊숙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장남이면 의례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이 때문에 체질적으로 세계 선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유교 사상은 우리에게 체면과 권위주의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권위적이고 체면이 강합니다. 음식을 안 먹어도 먹은 척, 배고파도 안 고픈 척,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잘합니다. 이런 것들은 세계 선교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불교 사상이 심어준 은둔적이고 도피적이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요소가 사고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체질탓, 팔자탓을 합니다. 세계 선교 역사를 섬기고자 하면 적극적이고 투쟁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하는데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사고 방법은 큰 장애물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자의식이 큰 문제입니다. 세계선교를 하고자 하면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을 붙이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자의식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영어도 엉터리라도 담대하게 해야 느는데 자의식 때문에 말을 잘 못하고 Timothy 목자를 보면 씩 웃기만 합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를 하고자 할 때 이러한 유다이즘적인 요소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유다이즘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일어나 잡아 먹으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 잡아 먹으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 잡아 먹으라” 이 말씀에는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서 먹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양을 치고, 내가 가고 싶은 나라에만 선교사로 가고자 합니다. 선진국에 선교사로 가라고 하면 좋아하지만 아프리카나 동남아 오지로 가라고 하면 “주여 그러 수 없나이다”하며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음식이든지 잘 먹고 소화해낼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하다는 것은 위가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어떤 종류의 죄인이나, 어떤 나라의 사람이든지 일어나 잡아 먹기를 원하십니다.

보자기 안에 있는 부정한 짐승들은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또 하나님이 깨끗케 하셨다 하는 것은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케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케 된다는 것입니다. (롬10:3,4)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쌓아도 구원을 얻는 조건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죄라도 씻음받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보편성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이 복음의 보편성을 심령 깊이 영접할 수 있도록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 시키셨습니다.

(2)고넬료에게 전한 베드로의 메시지 (17-48)

베드로는 도대체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환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에 마침 때를 맞추어 보낸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대인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현대의 저명한 독일 신학자인 마틴부버는 나와 너의 만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만남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을 그리스도와의 만남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를 허무에서 의미있는 삶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연결시켜 주는 만남입니다. 이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생애는 보람있고 희망차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참된 우정과 진실한 사랑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는 민족의 장벽, 신분의 장벽, 문화의 장벽, 사상의 장벽,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장벽 때문에 도저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들이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도록 중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중재로 말미암앙 서로 허물 없이 영접하며 참된 우정을 나룰 수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발 아래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는 선진국 백성이요 지배국의 지도자이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베드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뜨겁게 영접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라 하며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서로 성령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로부터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33).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4,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는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며 또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ㅇ하나님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일 같이 보이지만 유다이즘에 깊이 젖어 있는 유대인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또 그는 36절에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라고 부르고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복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불신과 반목, 질시가 생겨 서로 미워하고 끊임없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민족간의 갈등, 인종간의 갈등, 신분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으로 늘 긴장감이 감돌고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복음은 이런 모든 갈등을 없애고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만이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를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미리 택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는 주로 예수님의 부활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고넬료에게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심판, 죄사함의 은혜, 곧 복음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놀라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11:1-18 절에는 유대 크리스챤들이 이방인들에게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영접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한 것을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감정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그동안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조근조근 차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한마디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다이즘을 깨시고 장차 왕성하게 일어날 이방 선교 역사를 지원할 수 있는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III. 안디옥 교회 (11:19-30)

안디옥 교회는 초기 세계선교 역사의 발전소(power station)로서 귀하게 쓰임 받은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개척되고 또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모임으로 성장하였습니까?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일어난 핍박으로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와서 복음늘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동적인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몇 사람이 용기를 내어 밑져봤자 본전 식으로 헬라인들에게 주 에수를 전파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성을 최고의 덕성으로 삼고 이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가 힘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조 예수를 전파했을 때 허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방 선교를 심히 기뻐하시고 믿음으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따지기 좋아하고 인본주의적인 헬라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의 손이 함꼐 할 떄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께 굳게 붙어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그의 권면으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 이렇게 수적으로 불어나게 되면 이에 말려들어 붕붕 뜨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로 이때 말슴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일을 환자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유능한 성경 선생 바울을 불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로 인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1년동안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마릈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계 선교 역사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특징이 무었입니까?

첫째로, 말씀에 기초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모임은 반드시 부흥하게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임이었습니다. 11:26b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당시 신자들은 제자들, 형제들, 또는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챤이란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신자들을 조롱 비슷하게 부른 별명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수쟁이란 뜻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니까 예수님께 미친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영광스렵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챤이란 “a man in christ"의 준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란 뜻입니다. 당시 크리스챤들은 이 이름 때문에 많은 핍박과 수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챤으로서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이란 값싼 이름이 아니라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셋째로, 주는 교회였습니다. 유대 형제들이 흉년이 들어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힘대로 부조를 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사업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신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음정신과 선교정신이 강한 안디옥 교회를 축복하사 세계 선교의 발전소로 귀히 쓰셨습니다.

12장에서는 헤롯이 교회를 핍박함으로 정치적인 핍박이 가해졌습니다. 헤롯은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이를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옥에 잡아 넣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와 최고 지도자 베드로가 옥게 갇힘으로 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들은 다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의 정치권세에 비해 성도들의 기도는 너무나 무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기도의 힘이 정치권세를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을 옥에서 풀어 주셨습니다(7-19). 하나님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헤롯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교만하게 굴다가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23).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한 자들은 결국 다 비참하게 멸망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였습니다. (24). 말씀의 역사는 어떤 가운데서도 승리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큰 뜻을 두시고 그를 세계적인 복음의 종으로 귀하게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다이즘 때문에 크게 쓰실 수 없었습니다. 그의 유다이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유다이즘을 깨기 위해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소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의 모든 족속을 잡아 먹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팔이 안으로 굽듯이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생각이 좁아지고 마음이 오그라 들어서 자기 중심적이 되어 좁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000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