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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빛, 바울

by Mark Yang   04/23/2022   Acts 13:1~14:28

Message


사도행전 제 9 강

이방의 빛, 바울

말씀/ 사도행전 13:1-14:28

요절/ 사도행전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역사와 유대와 사마리아에 일어난 복음역사입니다. 13-28장까지는 사도행전 Ⅱ부로서 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역사로 바울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사도 바울의 4차에 걸친 전도 여행은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교적 기독교를 범세계적인 기독교로 전환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의 선교 신앙과 사도 바울의 투철한 복음 정신과 개척 spirit은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이방의 세속 역사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진입하는 제 1보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역사의 선봉장으로 쓰임 받은 사도 바울로부터 그의 복음 정신과 불타는 선교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어떻게 바울을 쓰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Ⅰ. 구브로에서 박수를 제압한 바울 (1-12)

1-12장까지의 모든 역사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13장부터 이방 선교의 중심지는 안디옥 교회로 옮겨집니다. 안디옥은 어떤 교회였습니까?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 선지자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 예언도 하고 말씀도 가르치는 자입니다. 교사는 성경을 연구하여 가르칠 수 있는 자립적인 성경 선생입니다. 이러한 성경 선생 1명만 있어도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는 이러한 성경 선생이 5명이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에 쓰임 받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이들 중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아프리카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의 젖먹이 동기 동창생으로 그의 친밀한 친구요, 궁중 고관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으며 마나엔과 같은 귀족도 있었고 천인도 있었습니다. 처음 안디옥 교회를 세울 때부터 있었던 본토인도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합심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를 섬기는 열정으로 one spirit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주를 섬겨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실질적인 Leader로서 기둥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파송한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로서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세계 선교를 위해 가장 빼어난 사람들을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선교사는 모임에서 걸리적거리는 사람이나 취직도 못해 갈 데 없는 사람들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쓸 만한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즉시 기도하고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령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구브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살라미에서 말씀을 전한 후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예수라 하는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났습니다. 바예수란 예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아들이라 하며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수인 것을 보면 가끔 가다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며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반면 총독 서기오 바울은 인생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있는 선량한 구도자요 지혜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목자를 잘못 만나 바예수같은 사기꾼 밑에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목자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셨습니다. 총독은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수 엘루마가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사건건 방해를 하였습니다. 엘루마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데 한 선량한 영혼을 이용해 온 사단의 자식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무섭게 저주하였습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그리고 소경이 되도록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버렸습니다. 그는 졸지에 개처럼 땅바닥을 기며 인도할 자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원수 노릇하는 그를 한 방에 KO시켜 버렸습니다. 이를 본 총독은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원수를 철저히 대적하는 투사로서의 바울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박수 엘루마가 복음역사를 방해할 때 마음 좋게 타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철저히 대적하여 무섭게 저주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역사를 감당코자 할 때 반드시 역사를 방해하는 복음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요즘도 점점 보편화 되어 가는 음란 문화의 세력, 안일 문화, 절대성을 파괴하는 인본주의의 세력은 우리가 대적해야 할 복음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양들과 자신을 위해 이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철저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사단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은 영적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종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투사입니다.

Ⅱ.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메시지 (13-52)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 타고 버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동역자로 따라 왔던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는 아마 삼촌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간다기에 선교라는 말보다는 여행이라는 말에 은혜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수 엘루마 사건에 충격 받고 두려움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예루살렘 부자집 과부 외아들로 연약하였습니다. 하여튼 이는 바울 일행을 낙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보고자 했습니다.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6-41절까지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 대상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17-21절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저희의 범죄함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후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다가, 40년 간 사울을 그들에게 왕으로 주신 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간략하지만 이 메시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행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까? 이는 사울의 인본주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예보다 자신의 명예를 중시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임의로 행동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한번도 하지 않은 데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왕이요, 전쟁에 용맹스런 장군이요, 모사요, 시인이요, 음악가로서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재능이 훌륭한 자였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그가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잘 나타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것,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자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허락하시니 곧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자를 만나면 기뻐하시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섬기다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campus시절 우리를 쓰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를 찾고 이루어 드리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24,25).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 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선지자들의 말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말씀을 경외함으로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말씀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27절부터 37절까지 메시지의 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이 또한 성경을 응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는 많은 증인들과 성경의 증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시편 2:7절과 이사야 55:3,4절, 시편 16:10절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합니다. 특히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한 다윗의 예언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을 한 다윗은 그 시대를 섬기다가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메시지의 결론으로 예수님을 통한 사죄의 은혜를 증거합니다(39).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자 많은 투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 의지는 타락하여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하고자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력함과 연약함만 발견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학대하고 또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젊기 때문에 정욕 문제에 잘 시달립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겨 보고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 자신이 이중인격자 같이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수양으로 자아완성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좀먹고 있는 죄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세력은 너무나 강하여 늘 우리를 패배시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내 마음 가운데 끊임없이 역사하는 죄의 세력을 멸할 수 있습니까? 29절을 읽어봅시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연약함과 숨은 죄악을 단순히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이것이 사죄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지라도 그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는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까다롭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놀라고 망하게 됩니다(41).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의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사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대 철학자요, 사상가이지만 순수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43).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말씀을 듣고자 모일 만큼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멋있게 말씀을 전해야 큰 역사가 일어날 줄 생각하기 쉽습니다. 단순히 말씀에 기초해서 복음만 증거하면 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시시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순수 복음은 아무리 되풀이해서 이야기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인간의 행위로 해결할 수 없는 죄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듣기 원하는 것은 순수 복음입니다. 철학이나 인간의 사상은 새롭고 그때그때 귀를 즐겁게 해 줄지는 모르지만 조금 지나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되고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순수 복음은 좀 재미는 없지만 죄로 말미암아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줍니다.

그 다음 안식일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몰려 왔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 시기심이 생겨 바울의 말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의 비방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유대인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들에게 먼저 전한 것입니다(요4:22).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불신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49:6절 ‘이방의 빛이 되리라’는 말씀을 기초로 이방 개척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마음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였습니다. 죄의식에 눌리고 율법에 눌리던 자들이 사죄의 복음, 은혜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듣자 살아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방 세계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이었습니다.

오늘날 CIS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라트비아는 양들이 1:1 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10억 영혼이 성경 선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UBF의 세계 선교 방향을 크게 기뻐하시고 각 처에서 큰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80여 개국에 1000여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의 1/3이 넘습니다. 우리 모임을 이방의 빛 삼으시고 축복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Ⅲ.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를 거쳐 다시 안디옥으로 (14:1-28)

두 사도는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이고니온으로 쫓겨 났습니다. 이 때 그들은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갔습니다(13:30). 그들은 도망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고니온에서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있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고 대적하게 했습니다. 이 때 그들은 같은 동족들이 복음역사를 방해하는 것을 보고 심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원수들과 싸우다가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그들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할 때 주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달려들므로 그들은 루스드라로 도망갔습니다. 좀 우습게 들리지만 도망가는 것도 선교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마10:23에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낼 때 이 방법을 적극 활용토록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두 세력이 대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좇는 빛의 세력이요, 다른 하나는 이 복음을 미워하여 악감을 가진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나타나는 이런 원수의 세력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말씀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런 어두운 세력이 있는 줄 알고 이럴 때일수록 더욱 더 확신을 갖고 사도들과 같이 더욱 주를 의지하며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루스드라에 가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어나도록 큰 소리로 명하였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 그러자 그는 뛰어 걷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본 무리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며 바나바와 바울을 신과 같이 대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는 뒤에 서 있으므로 바울을 조종하는 자로 보고 모든 신을 총 지휘하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말씀을 전하므로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웅변의 신인 허메라 하였습니다. 이 지방에는 일찍이 쓰스와 허메신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찾아 왔으나 두 사람만 환영하고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을은 홍수로 잠겼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전설 탓인지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극진히 대접하기 위하여 쓰스 신당에서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제사 지내고자 하였습니다. 처음에 두 사도는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에 잘 알아 듣지 못하다가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창세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이 헛된 신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함이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을 볼 때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성이 강하였지만 참 신을 알지 못해 인간이 만들어 낸 헛된 신들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무신론자라고 자처하지만 실상 무신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물은 물질로 되어 있다며 유물론에 빠져 있는 운동권 학생들도 때를 따라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도 세우고 점쟁이들을 찾아갑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섬기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섬깁니다. 또한 평소 때는 큰소리 치는 사람도 막상 무슨 일이 생기면 의지할 것을 찾습니다. 한 시사 잡지에서는 얼마 전 최근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역술 바람에 대해 특집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업적인 점쟁이나 무당을 제외하고도 사주팔자, 궁합을 봐 주며 먹고 사는 사람이 약 1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신문보도에 의하면 지난 해 국회의원 선거일도 점을 쳐서 길일을 택했다고 합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기계 회사도 열심히 설계하며 첨단 기계를 만들어 놓고는 기계가 고장 없이 잘 돌아가게 해 달라고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미아리에 가 보면 지금도 처녀 보살, 삼각산 보살, 방금 내린 아기 보살 등 불황을 타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골에 가보면 좀 그럴싸한 나무 밑에는 예외없이 다 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섬길 것을 찾지 못해 하다 못해 썩은 고목나무도 섬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림으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우준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3).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바로 이러한 헛된 신을 섬기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위해 예수님을 허락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진정 복되고 생명력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불안하면서도 거짓된 세상, 허무가 난무하는 이 세상 중에서 이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큰 은혜요, 특권으로 여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약간의 핍박은 받아도 손에 이 복음을 들고 Campus영혼들을 섬기는 목자요, 선교사가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기쁨입니다. 우리를 천사도 흠모하는 목자요, 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쫓아와서 바울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충동시켜 돌로 바울을 치게 했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정신을 차린 바울은 곧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돌로 쳐서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조와 같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넘어졌지만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는 마치 오뚜기와 같았습니다. 넘어뜨리면 또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일어났습니다. 이런 바울을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언 24:16절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진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칠전팔기, 구전십기 이길 때까지 일어나는 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22)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그는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나 조금도 낙심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 가운데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롬8:18).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환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두 사도는 이제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에서 앗달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모아 선교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힘들었던 일이나 수고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는가를 보고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복음은 유대인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므로 복음을 전하는 특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방 세계는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두웠습니다. 이들에게는 빛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의 빛이 필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빛을 밝히는 이방의 빛이었습니다(13:47).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된 이 복음의 물결은 이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국에까지 이르고 이 물결은 다시 미국, 유럽, 인도, CIS, 중국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세계는 어둡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인본주의 문화, 과학 문명은 발달하였지만 헛된 우상을 숭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모든 가치 기준을 상실하고 절망 가운데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밝혀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이 마지막 시대 땅끝까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역사에 귀히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