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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7:1-53(생수의 강을 약속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5 강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7:1-53
요절: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오늘 말씀은 유대인의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초막절에 참석한 사람들의 주된 화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무리들은 예수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목마른 인생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 시간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과 제자들(1-9)

첫째, 믿지 않는 예수님의 형제들(1-5)
7장은 5장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에 가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다니시며 복음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6장과 7장 사이는 약 6개월 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거국적으로 행해지는 3대 명절이 있는데 그것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요, 오순절은 출애굽 후 50일 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초막절은 조상들이 출애굽 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장막생활 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가지 등 무성한 가지를 취하여 원두막과 같이 초막을 짓고 살며 7일 동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했습니다(레23:33-43). 초막절은 곡식을 추수하고 수장한 후에 지켰기 때문에 수장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신 16:13). 이 날은 추수한 곡식을 마음껏 먹고 즐기기 때문에 유대 명절 중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날을 가리켜 “가장 엄숙하고 위대한 명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막절이 가까워 오자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며 명절 분위기에 들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답답하게 보여 참다 못해 충고를 했습니다. “당신의 행하시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3,4).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촌구석에만 있지 말고 수도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능력을 행함으로 유명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형님인 예수님 덕분에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능력을 세상에 과시하기만 하면 대권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되며, 또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는 등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명예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자는 5절에서 형제들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가까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야심과 세상 영광을 구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영적인 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 영광을 구하는 욕심 때문에 영적으로 꽉 막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세상 영광을 구하는 세상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 예수님(6-9)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내 때”는 요한복음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이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때를 향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때를 나타내는 단어가 hora(ωρα)와 Kairos(Καιροσ)의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hora'는 하나님의 예정된 때로서 우리 인간이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Kairos'는 어떤 역사를 이루는데 가장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6절에 나오는 “내 때”는 ‘Kairos'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형제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원하는 때 언제든지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도 있고 또 축제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때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을 때 형제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시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형제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가치관과 세상 조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가치관과 세상 조류대로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치 않고 믿음으로 살게 되면 세상 사람으로부터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딤후3:12). 예수님은 세상 죄를 드러내시고 책망하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죄악과 싸우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고 죄가 많습니다. 또한 가치관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인본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죄악과 싸워야 합니다.

Ⅱ.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10-36)

첫째,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10-17).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비밀히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비밀히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들레지도 않으시고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사42:2)

11-13절은 명절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찾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혹은 예수님이 좋은 사람이다, 혹은 무리를 미혹케 한다는 등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장안의 화제거리는 온통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통제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당국에 의해 체포될지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때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명절 중간에 대담하게도 성전에 올라가셔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천 상륙 작전과 같이 시간차 공격을 하시고 중앙 돌파를 하셨습니다. 당국자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예수님께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섬기는데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려면 사단의 계략을 파할 수 있는 영적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산상수훈과 같이 신비스럽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놀라운 영적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랍비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또 Ph.D 학위도 없고 갈릴리 출신이라는 인간 조건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 그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온 진리의 말씀임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비결도 말씀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말씀도 그 기원이 사람에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로서 순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금반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감정을 해 봐야 됩니다. 만일 금반지가 순금이면 감정을 통해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순종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진리의 사람이 되십니다(18).
1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참된 사람과 거짓된 사람을 구별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느냐 자기 영광을 구하느냐 하는데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에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납니다. 이런 자는 아무리 자신이 참된 자인 것처럼 꾸며도 근본적으로 거짓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죄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납니다. 일하는 동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1대1을 하거나 시험 공부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참되며 조금도 불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체가 참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계획,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참되다는 말은 ‘a man of truth’ 진리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자기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셋째, 공의의 판단(19-24)
19-24절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율법을 어기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또 할례는 난 지 8일 만에 행하여야 하는데 그날이 안식일과 겹치게 되면 안식일 일지라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38년 된 병자를 고침으로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은 얼마나 잘 한 일입니까? 유대인들의 문제는 공의로 판단치 않고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공의의 판단이란 올바른 판단입니다. 우리는 늘 판단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순수하게 됩니다. 그 동기가 순수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감정이나 자신의 고정된 생각에 기초해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올바른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나 변치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판단할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합니다(51). 어느 한쪽 이야기만 들을 때 공정성을 상실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양쪽 이야기를 다 들을 때 객관성을 갖고 비교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25-36절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Ⅲ.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 예수님(37-52)

이제 초막절의 끝날이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명절 중의 절정으로서 큰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에는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돌며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절기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매일 아침 제사장이 금으로 만든 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부었습니다. 이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성들은 이사야 12:3절을 노래했습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러한 의식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울부짖고 있을 때 반석에서 나온 샘물로 목마름 문제를 해결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하면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샘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메마른 땅에 물을 공급하사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 추수 때에도 풍성한 비를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서서 상한 심정으로 외치셨습니다. 37b,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적대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영적 소원도 없고 힘든 사람들을 구원에로 초대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가운데서 영원한 파멸로 향해 치닫고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둘째로,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명절 끝날은 장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축제가 끝나면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안고 방황하다가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목마름을 보시고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 가면서 목마른 인생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만족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목마른 인생 문제로 고통하며 신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 인정에 대한 목마름, 자유에 대한 목마름,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신음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갈증은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만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로, 풍성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배에서’란 within him, 즉, ‘심령 깊이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때 내면 깊이에서 알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심장에서 피가 박동하여 온 몸을 힘차게 돌 듯이, 성령은 믿는 자의 마음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여 힘과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진실되고 순결하게 됩니다.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역사할 때 현실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비젼에 불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행2:17). 또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죄의식과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 자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요20:22,23). 뿐만 아니라 죄의 열매만을 맺을 수 밖에 없는 데서 사랑,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갈5:22,23). 성령은 진리의 말씀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요14:26,27, 16:13). 성령은 보혜사로서 상담자가 되시고 위로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난다는 것은 개울물과 같이 쫄쫄쫄 겨우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강과 같이 풍성하게 또 지속적으로 흘러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풍성하고 은혜도 풍성하고 평강도 풍성하고 기쁨도 풍성하고 자유도 풍성합니다. 우리를 사랑이 메마르고 은혜가 메마르고 모든 것이 메마른 세상에서 모든 것이 풍성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내 가정과 이웃과 캠퍼스와 직장과 이 나라와 온 세계에까지 흘러 넘치게 하십니다.

40-44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혹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고 혹은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전파로 인하여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속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굴레에 갇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들과 달리 공정하게 판단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50,51).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이 인생의 목마름 문제가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