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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총회

by Mark Yang   04/23/2022   Acts 15:1~35

Message


사도행전 제 10 강

예루살렘 총회

말씀/ 사도행전 15:1-35

요절/ 사도행전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오늘 말씀은 이방인 선교에서 문제가 된 복음과 율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 예루살렘 총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인 선교가 활발히 일어나자, 일부 바리새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교리 다툼으로 시끄럽게 되고, 이방양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그늘을 벗어나 세계화되느냐,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느냐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확증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 총회였습니다. 이 총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회의였으며, 이 총회의 결정은 “이방인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 헌장”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의 중요성과 그 역사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이를 배우고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바울과 바나바 (1-5)

1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들은 바리새파 출신의 믿는 형제들로서 안디옥에 역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찾아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나바나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진리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모세의 법대로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였습니다. 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했습니다(창17:27, 출12:48).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한 몸에 다 감당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더 할 일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이이든 다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영접할 때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 점차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로 빚어지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알지 못한다면 이들의 주장에 말려들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할례를 받게 된다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우리는 율법의 종이 되어 복음으로 인한 은혜와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하게 되고 좀 잘하면 교만해져서 남을 판단하고, 좀 못하면 자학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의 양떼들은 이들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만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율법적인 생각이 파고들어 오게 되고 심령이 막히고 얼굴이 딱딱해졌습니다. 어떤 성급한 형제들은 할례를 안 받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일단 할례부터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a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란 영어로 sharp dispute and debate인데 날카롭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성격이 좀 괄괄한 바울이 앞장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때로는 책상을 쾅쾅 쳐가며 싸웠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답지 못하고 은혜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까지 다투고 변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선택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도 좋고 율법도 다 좋은데 복음이 훨씬 더 좋다거나, 복음이 좋긴 좋은데 할례나 경건한 율법, 고상한 사상을 더하면 더 좋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으로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어떤 +α를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죄악입니다. 이때 복음은 그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서구의 기독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교회가 갈수록 텅텅 비어 가고 있는 것도 그들이 갖가지 이론과 사상, 신학으로 복음을 상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복음의 진리와 절대성을 굳게 붙들고 조금도 그들과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들과 타협하여 할례를 묵인했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유대교의 율법과 형식 속에 사장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또 이방 세계의 선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타문화권의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것은 다 양보한다해도 복음의 진리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자 한 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양떼들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습니다(갈2:4,5).

그러나 안디옥 교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많은 불신이 심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신을 심기는 쉬워도 한번 심겨진 불신을 뽑아내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또 할례파 유대인들도 물러서지 않고 여러 가지 이론과 말로 도전해왔습니다. 문제는 바울과 바나바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결국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바울과 바나바 및 그들 중의 몇 사람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은 교회의 전송을 받으며 안디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중간 경유지인 베니게와 사마리아 센타에 들려 세계선교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그곳의 형제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도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마땅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죄악된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갈3:24절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몽학선생이란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입시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십 수백 만원씩의 비싼 돈을 주어 가며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가정교사는 필요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후에는, 율법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 후에도 이 율법을 붙들고 있다면, 이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가로막는 암초가 될 뿐입니다.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좋은 것으로 여겨왔던 율법에 대한 미련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교와 복음의 진리를 앞세우는 기독교는 결코 양립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유대교에서 할례와 율법을 제거하면 유대교는 뿌리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한편 기독교에 율법을 도입하게 되면 복음의 생명력은 상실되고 기독교는 형식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Ⅱ. 예루살렘 총회 (6-35)

6,7a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갑론을박,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아마 높은 사회적 지위나, 학문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고, 모세도 할례를 행했으며, 특히 구주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사도님들, 장로님들도 다 할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주장할 때는 정말 이들의 말이 옳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b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12년 전의 고넬료 사건을 상기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래 전부터 자기를 택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고넬료 사건에 나타나 있는 객관적인 성령의 역사를 근거로 이방인들을 아무 조건없이 영접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8). 둘째,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분간치 아니하신 사실입니다(9).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 증거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이를 기초로 베드로는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그런데도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하는 죄악입니다. 또 베드로는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조상과 자신들도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이 조상과 우리도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대로 율법의 멍에는 누구도 멜 수 없는 무겁고 힘든 멍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율법의 멍에를 메고 구원을 얻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롬7:24).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자는 다 이런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도 지지 못하던 그 멍에를 어떻게 다시 양들에게 지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모순된 행위요, 양들을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 가운데 송아지같이 뛰놀던 양들 목에 무거운 멍에를 탁 씌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멍에를 쓰면 자유와 기쁨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더 이상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고 부정적이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베드로는 구원을 얻는데는 다른 조건이 필요없음을 단호히 선언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우리나 저희나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결코 율법의 행위나 할례를 행한다고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뒤에 반드시 양을 많이 치고 선행을 쌓는다고 해서, 혹은 매주 7회씩 일용할 양식을 먹고 소감을 열심히 쓴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앙의 결과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은혜를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아니하시고 믿기만 하면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3:16절에서 감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가 나중에는 나의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절대 기초는 바로 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이 은혜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은혜가 가져다주는 생명력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말은 참 간단한데, 실생활에서 은혜로 살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행위규범적인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으나,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확신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이 은혜에 대해서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그 순간에 누리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를 열심히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 ‘일용할 양식도 매일 감당하고 소감도 잘 감당하고, 또 양도 열심히 쳐야지’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이런 것들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 여전히 죄에 시달리는 자신을 바라보며 불의한 생각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을 자학하고 절망하며 자신은 UBF 체질이 아닌 것 같다며 성경에 없는 체질론을 들먹이기도 합니다. 심하면 사단의 참소에 빠져 “그래도 네가 신자냐? 그래도 네가 목자냐?”하는 음성에 괴로와합니다. 때로 주님의 은혜로 잘 되는 일이 있으면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가 참으로 은혜를 알고, 주님의 은혜로 사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이를 제대로 알려면 우리의 일생을 다 드려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고 누리고자 하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알고자 날마다 투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올해에는 이 은혜를 아는 데서 더욱 자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율법적인 생각, 인과응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님, 우리 주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신앙 생활을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말에 그 동안 열심히 변론을 하던 모든 무리들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이 나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 가운데 이루신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체험한 그 역사와 동일선상에 있음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나섰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서 현재 이 총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변화되어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 야고보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할례주의자들이 자기들 편으로 여길만큼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 엄격한 율법 준행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야고보서를 보면 그가 얼마나 행함을 강조한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주의자들은 야고보가 혹시 자기들 편을 들어주지나 않을까 기대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다 알고있는 대로 시므온(베드로를 말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구원의 역사를 처음으로 이루셨음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함을 증거했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아모스 9:11,12절을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실 때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고넬료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이방선교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신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도록 뜻을 두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으심을 확증해 보였습니다. 이로써 베드로의 말대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이 모든 사실을 기초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다만 이방문화 가운데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들로 복음 진리에 위배되거나,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이런 것을 금지해 주도록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이는 곳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교제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곧 이런 규례는 당시 율법적인 유대인 출신 신자들로 인해 잠정적으로 필요한 규칙들이었습니다. 결국 야고보의 결론은 사도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방인들을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도록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이방인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 헌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다 자유요 우상숭배를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해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또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덕을 위하여 삼가야 할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최소한의 삼가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은 감당해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초(酒草)문제나 마약, 노름, 음란비디오 같은 것들은 삼가야 할 것들입니다. 반면에 일용할 양식이나, 1:1양치기, 소감 등은 UBF의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영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하거나 권하는 것이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복음 진리에 서서 볼 때 최소한 이런 것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위해서 이 시대에서 삼가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는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을 보증할 사절로 뽑혔습니다. 23-29절은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이들 편에 부친 편지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편지의 수신인이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의 훼방이 안디옥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이방인 교회로 확산되어 갔음을 보여 줍니다. 24-27절은 편지를 보내게 된 동기를 적고 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사도와 장로들은 안디옥 교회에 가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사로이 가서 여러 가지 사악한 말로 양떼들을 괴롭게 했으며 마음을 혹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다에서 내려와 형제들을 미혹하던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최고의 칭찬을 함으로써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깊이 신뢰하는 훌륭한 목자임을 보증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이 무엇입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사도와 장로들은 이 결정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라고 하여 성령을 앞세웠습니다. 이는 총회의 결정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예루살렘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확증했습니다. 이로써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헛된 주장이었음이 만천하에 공포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율법주의와 복음신앙 사이의 싸움에서 복음의 진리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놓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세계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가 확고히 서게 되었습니다. 민족, 문화, 전통, 관습, 할례, 무할례 등 모든 문화의 장벽을 초월해서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또 선교지에서 일어난 문제를 본 교회가 해결해 주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줌으로써 본 교회와 이방 교회와의 사이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본 교회의 편지를 읽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동안 율법주의자들로 인한 무거운 멍에와 짐을 벗고 다시 주님의 은혜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그들은 흔들리던 신앙을 바로 잡고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더욱 더 세계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함께 내려온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으므로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제가 완전히 수습되자 형제들의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계속 머물며 다수한 다른 리더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또 성령께서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를 계기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을 벗어나 세계화되고 이방선교를 위한 교리적인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복음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거짓 진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진리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양떼들이 메고 있는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겨 주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세계 선교 사명을 줄기차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