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1 강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씀/ 사도행전 15:36-16:40
요절/ 사도행전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으로 유럽이 어떻게 개척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큰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신 크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것처럼 우리도 환상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은 바울 (1-5)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15:36절을 보십시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며칠 후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돌아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단 며칠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1:1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계획과 준비 속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2차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런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가운데 큰 뜻을 두고 역사하셨습니다.
16: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은 그가 제 1차 선교여행 때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개척한 곳입니다. 루스드라에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울의 전도로 어머니와 함께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어머니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튀기였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로서 믿음의 영향력이 좋았습니다. 또 딤후 1:4,5절을 보면 그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이는 그가 마음이 순수하고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그는 거짓없는 믿음을 가진 진실된 자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줍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떠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동역자로 삼은 것입니다. 복음역사를 감당코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의 동역자를 얻는 일입니다. 복음역사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독불장군처럼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께는 배사라 선교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동역자들이 있듯이 복음역사는 반드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복음역사를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동역자를 얻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복음의 동역자로 삼고자 할 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얻기 위해 데려다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15장에서의 바울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이때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 진리를 필사적으로 수호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는 복음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유대인들의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고전 9:20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1차 선교여행 때 개척했던 선교지 이고니온,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등의 양들을 심방하여 예루살렘 총회에서 작성한 규례를 전했습니다. 바울 목자가 개척 선교지의 어린양들을 심방하며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벗겨 주고 격려하자 이들의 믿음이 굳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Ⅱ. 환상을 본 바울 (6-10)
6-10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역사의 주체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므로 바울의 아시아 선교 전망은 밝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더욱 더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성령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어떻게 막으셨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폭설설, 파업설(소수유력설), 차표 한 장 손에 들다 분실설(단독무력설). 또 바울이 음식을 먹으면 체하고 설사가 났습니다. 또 1:1을 하고자 하면 혀가 잘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북쪽으로 북쪽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동북부인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서 마침내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아시아 선교 열정에 사로잡혔을까요? 이는 1차 선교여행을 통해 갖게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와 마술과 음행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개척정신도 충만했습니다. 무시아에 이른 바울은 흑해 바로 밑쪽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결코 뒤로 물러 설 줄 모르는 불굴의 투사입니다. 그의 인생 철학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였습니다. 그는 “안 되면 되게 하라. 막힌 길도 뚫어라” 외치며 계속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계속 bus를 놓치고 또 타면 거꾸로 가는 것을 탔습니다. 오랜만에 바르게 가는 것을 탔는데 이제는 또 펑크가 났습니다. 운전사는 “토큰을 돌려 줄테니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막으실 때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역사의 주체자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길을 여시기도 하시고 막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개 복음역사의 주관자를 단체나 개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임도 성령께서 주관자가 되셔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어느 나라를 개척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인간적인 이상이나 야망이 개입되어 있으면 성령께서 막으십니다. 혹은 성령의 다른 뜻이 있어도 막으십니다. 현재 중국 상해를 개척하고 계시는 정안드레 선교사님은 8년 전 봉제공 선교 방향이 주어졌을 때 미국 선교사로 나가고자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비자도 받기 전에 비행기 표도 사놓고 또 미리미리 파송예배도 보았습니다. 형제자매들로부터 푸짐한 선물도 받고 “선교사로 나가면 이렇게 선물도 많이 받습니다”라고 간증도 했습니다. 또 전국목자 모임에서 파송 안수기도도 받았습니다. 이제 출발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비자가 나오지 않아 미국행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분은 형제자매님을 다시 볼 면목도 없었고, 어디론가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인도네시아로 발령을 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안드레 선교사님의 인생은 미국 영사나 회사 고위 관리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시 홍콩으로 발령내시고 이제는 상해를 개척토록 하셨습니다. 미국행을 막으시고 인도네시아와 홍콩을 거쳐 중국 길을 여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둘째, 환상을 본 바울입니다(8,9).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인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 길이 막히자 북쪽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고 확신이 안 생겼습니다. 드로아로 내려간 바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도 sorry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시아 선교를 하고자 하는데 왜 막으시는가?” 답답한 마음으로 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방향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환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환상 중에 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에 시커멓고 힘이 하나도 없고 두 눈이 쑥 들어간 유럽인이었습니다. 그는 서서 빼빼 마른손을 흔들며 계속 간청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제발 도와 주시오!” 마게도냐 사람들은 인간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곳은 당시 헬라 문화가 꽃핀 곳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철학자를 만나지 않고는 거리를 거닐 수 없을 만큼 철학자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로마의 물질문명 속에서 풍요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이며 선진국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불안으로 점을 치기 때문에 점쟁이 재벌들이 많았습니다(행16:16). 이들은 미신과 악령에 지배당하며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고 있었습니다(행17:22,23).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것을 좇으며 허무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허무하기 때문에 쾌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큐로스학파가 있었고,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명 이상의 매춘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쾌락에 빠진 후에는 죄의식과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와서 자기들에게 복음을 주고 말씀을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이를 볼 때 이들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죄의 복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목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로마, 미국은 세계 각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드는 선진국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겉은 마치 에덴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소돔, 고모라 같이 부패해 있습니다. 유명스타들은 AIDS로 죽어가고, 클린턴 행정부는 게이들이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코자 하고 있습니다. 또 이전의 Bush 행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몽롱한 상태에서 흐느적거리며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하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의 붕괴로 성립된 CIS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지난 70년 동안 신봉해 온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버림으로 사상의 진공상태를 겪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중국은 어떠합니까? 현재 중국에는 일찍이 수많은 선교사들이 뿌린 순교의 피로 인해 가정 교회만 5,000만의 신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택동 공산 정권이 들어선 이후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조치 당함으로 현재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자 없이 임의로 모여 예배 보고 성경이 없어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개인신앙이 약하여 이단이 와서 유혹하면 쉽게 넘어간다고 합니다. 이들은 복음 진리에 기초한 훈련된 성경선생들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서구나 동구나 아시아나 어디나 다 영적으로 갈급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미국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CIS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중국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라트비아로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세계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간절한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본국에서 안주하지 않고 이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예민하게 순종하는 바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즉시 자기 청사진을 버리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를 개척코자 했기 때문에 미련을 두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련없이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방향을 민감하게 좇았습니다. 바울은 마치 군인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자기 욕심이나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야심이나 욕심을 부리고자 하면 성령의 방향에 즉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러시야 양이 손짓하고 중국 양이 손짓해도 안 보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방향에 예민하게 즉시 순종할 수 있으려면 좀더 순수해지고 좀더 영적인 종들이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배울 수 있는 것은 선교지는 내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바울을 왜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까? 성령께서는 바울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 뜻을 두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시아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흑해에 가로막혀 버립니다.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마게도냐로 인도하시고 아울러 로마 개척의 기초를 놓고 땅끝까지 이르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은 목자의 심정이 있고 세계선교에 대한 소원이 강렬하나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막힌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눈먼 강아지와 같습니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좋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은 시공간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만 왔다 갔다 하다보면 마음이 좁아지고 눈앞의 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63빌딩이라도 올라가 보면 멀리 보이고 가슴이 탁 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멀리 내다보시며 전체적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더 역사적이고 더 높고 깊으며 더 크십니다. 이사야 55: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바울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 뜻을 두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모임을 인도해 오실 때도 우리보다 더 큰 뜻을 두시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1960년대에 우리 모임은 동남아 선교만 부르짖었습니다. 신문 제목도 “동남아의 주춧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동남아의 사도 바울이라 불렀습니다. 모두다 동남아 선교를 위해 자나깨나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 1차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기도하다가 드디어 동남아 싱가폴에 선교사 한 분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곳에 가서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동남아 선교의 길을 막으시고 대신에 서독과 미국 같은 선진국 선교의 길을 여셨습니다. 특히 1977년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미국으로 파송한 이후 10년 동안 미국 개척 역사를 흥왕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도와 브라질과 로마 등 세계 61개국 105개 지구에 95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셨습니다. 지난 1985년부터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 선교를 위해 기도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고로비인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쓰셔서 철의 장막을 개방케 하시고 현재 CIS에 많은 선교사님을 파송하여 왕성한 복음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등소평을 통해 중국의 개혁, 개방을 가속화하게 하심으로 중국 선교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한중수교는 중국선교의 서막을 알리는 팡파르 소리입니다. 이제 중국에 나갈 길은 얼마든지 열렸습니다. 성령께서 CIS와 중국 선교를 위해 강력히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자, 이런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좇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영적 그린베레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Ⅲ. 빌립보 개척 (16:11-40)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마침내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럽 개척과 큰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왔지만 아무도 그를 (welcome!) 피켓을 들고 환영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환상 속의 손짓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내가 혹시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거대한 유럽을 개척할 것인가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환상은 컸지만 현실은 광야와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 개척 역사를 시작하였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기도처가 없는가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문밖 강가에 이르자 여자들 몇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자매님들이 모이면 대개 좀 시끄럽습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접시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다가 깨집니다. 또 당시 자매님들은 수에도 넣지 않을 만큼 무시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을 주목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통해 우리는 개척 역사를 감당하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바울은 기도로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 갔을 때 회당이 없어 복음 전할 환경이 안된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센타도 없고 강당도 없지만 기도로서 환경을 극복하고 강가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구체적으로 복음역사를 감당했습니다. 보통 환상을 본 후 큰 환상 때문에 구체적으로 역사를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환상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환상은 망상으로 끝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유럽 선교의 큰 환상 가운데 구체적으로 자매님 몇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현재 187개국 캠퍼스 개척의 큰 환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환상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1:1 역사입니다. 또 구체적으로 어학을 정복하기 위해 한 단어 한 단어를 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의 마음 문을 여시고 복음을 영접케 하셨습니다. 루디아는 즉시로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영접하며 섬겼습니다(15). 하나님이 루디아 한 사람을 복음의 동역자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복음적인 여종 루디아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정은 house church가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이제는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 여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여종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번만 이렇게 하면 괜찮았을텐데 며칠동안 계속 이렇게 하자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쫓아냈습니다. 이로 인해 종의 주인들은 이익의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고소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 옷을 벗기우고 태장을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들은 애매하게 심한 매를 맞고 깊숙한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좌절하고 낙담하여 비전을 상실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은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옥중에서 midnight-chorus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바울과 실라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홀연히 큰 지진을 일으키셔서 옥문을 다 열어 주시고 매인 쇠사슬도 풀어 주셨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당시 로마 법률에는 죄수가 도망가면 간수가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기 전에 자살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려워 떨며 엎드린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 이로 인해 간수와 그 온 집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태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간수를 주 안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house church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 이튿날 바울은 아무 죄가 없는 것이 판명되어 놓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분명히 밝히고 당당히 그 성에서 나갔습니다. 거대한 유럽 선교는 자주 장사 루디아와 옥중의 간수를 동역자로 얻음으로 시작되는 기이한 역사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계획과 뜻대로 일이 잘 안될 때 낙담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절망의 때가 오히려 성령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큰 뜻을 두시고 강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사심을 버리고 성령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주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