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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by Mark Yang   04/23/2022   Acts 17:1~18:22

Message


사도행전 제 12 강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말씀/ 사도행전 17:1-18:22

요절/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계속으로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개척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도전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투철한 복음신앙과 불굴의 복음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Ⅰ.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개척 (17:1-34)

첫째, 데살로니가 개척(17:1-9)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정치, 무역,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늘 하는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그가 강론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성서적 메시야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고난이 없는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야관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경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선교 일선에는 이러한 유능한 성경선생이 필요합니다. 유능한 성경선생만 있으면 복음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바울의 메시지의 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 되시고 사랑과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생명의 구주요 왕 되심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복음 증거로 인해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니라.” 그들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살전1:9).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이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6). 데살로니가 전서 1:5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부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부인으로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차고 밍크 코트를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을 자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숨은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시장의 깡패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를 가르친다고 하며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영적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를 방해함으로 자기들의 죄를 채우고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살전2:14-16). 이를 볼 때 시기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큰 죄임을 배웁니다.

둘째, 베뢰아 개척(17:10-15)

데살로니가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를 밤에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당하면서도 또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의 많은 핍박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잘 영접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13절을 보면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 가운데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보다 말씀 받는 자세가 더 좋았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마음이 넓고 고상한 인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는 “마음이 트였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하여서 마음이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탁 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신사적이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를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실망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대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에 영적 소원이 없고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겸손하게 귀 기울여 말씀을 경청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 비밀을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주어집니다(막4:11).

둘째로, 그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받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자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그들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였을 때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심판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사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질하여 소동케 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비신사적이고 야만적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바울만 먼저 배로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양들을 위해서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속히 오라는 바울의 명을 받고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덴 개척(17:16-34)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시 주위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의 하나로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큐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 그의 기대는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덴에는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덴에는 시민들의 수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바울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그곳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분노는 영적 분노였습니다. 유명한 아레오바고 메시지가 이 영적 분노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영적 분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노입니다. 요사이는 영적으로 분노하는 사람이 심히도 드뭅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을 잘 부립니다. 이는 진리에 기초해서 살지 않고 물질과 육신을 기초로 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기초해서 살 때만이 영적인 분노가 생깁니다. 바울은 영적 분노가 일어나지만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아덴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이 분하여 견딜 수 없어서 회당과 시장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에피큐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에피큐로스(342-270 B.C.)가 세운 학파입니다. 그는 향락 추구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향락이란 육적이 아니요 정신적으로 모든 고통, 욕정, 미신적 공포에서 벗어난 심적 안정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타락하여 신약시대에 와서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쾌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지만 세상을 주관하지 않기 때문),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왜냐하면 죽음은 감미로운 잠에 불과하기 때문), 열심히 먹고 인생을 즐기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우주는 원자의 우연한 운동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며, 인간의 영혼도 원자들의 합성체로서 언젠가는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물론자들로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340-265 BC)라는 사람이 창설한 학파로서 에피큐로스 학파와 대립됩니다. 그는 물활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을 세계의 영이라고 하며 모든 사물에는 다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우주 이성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소멸하는 불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철저히 무관심함으로써 최고의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범신론으로 무장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모두 헬라의 2원론 사상에서 나온 학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몸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과 변론하며 복음을 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8b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혹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 교가 무엇인지 듣고자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이곳 언덕에는 평평한 바위 광장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공개 강연도 했으나 주로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은 최신 지식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만 시간을 소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새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논했으나 진리를 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즐기기만 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지성인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천박한 내면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는 철학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이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로서 성경이나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메시지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종교성이 많음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았는데 그 신에 대해서 알게 해 주겠다고 서두를 꺼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종교성이 강하여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들이 만든 신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들은 생명이 없기 대문에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또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초원하여 계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시다고 해서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할 수 있도록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헬라 시인의 싯귀를 인용하여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신을 우상 섬기듯이 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겨야 함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시를 통해 그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더듬어 발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님을 알기에 부족함으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과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무지를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메시지는 이교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교 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창세기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창세기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그 기쁘신 뜻대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사 친히 구원역사를 시작하시고, 그의 씨에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말씀은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기초를 깔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양들과 말씀 공부를 할 때 창세기 말씀으로 복음의 기초를 견고하게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도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다시 들어 보겠다고 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길가와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었습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메시지가 성공적이었는가 실패했는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간에 그의 메시지가 영적인 분노에서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II. 고린도 개척 (18:1-22)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60만이 넘는 거대한 신흥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번영하였지만 도덕적으로는 극히 타락하여 “고린도와 같이 됨”은 방탕아의 대명사가 되어습니다. 당시 고린도에 있는 유명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1천명의 여사제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창녀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복음역사를 이루기가 험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어떻게 복음역사를 이루었습니까?

첫째, 평신도 선교사 바울(1-4).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로마에서 떠나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로마서 16: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동역했습니다. 그들은 장막 만드는 업을 하고 있었는데 바울과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대의 랍비들은 율법 공부 외에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당시 천막은 목자와 군인들과 여행자들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평일에는 직장 생활을 하며 틈틈히 복음을 전했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하루 종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평신도 선교사 생활의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립적인 평신도 선교사요, 자립적인 성경선생으로서 자립적인 복음의 종이었습니다.

둘째, 잠잠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친 바울 (5-11).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습니다. 동역자가 없이 외롭게 투쟁하다가 믿음의 동역자들이 와서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자 바울은 말씀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히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린도에 올 때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2: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가 이렇게 결심한 이유는 그의 말과 전도함이 자신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였을 때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복음역사를 훼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방인 선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고 바로 옆집으로 옮겼습니다. 그 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회당을 중심으로하지 않고 홈 센타를 마련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가족이 믿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절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이 계속되자 바울의 마음 가운데 큰 두려움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2:3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심령이 위축되고 전신이 마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지키시기 때문에 아무도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이 심해지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고 잠잠히 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또 그동안 너무 말씀을 열심히 전하여 입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말씀의 종이 가만히 있게 되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피곤한 생각이 들고 잠잠히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얻기를 원하십니다(고전1:21).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때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척박한 고린도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귀환(12-22). 12-17절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또 핍박을 받는 사건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끌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일 줄 알고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회당장 소스데네를 재판 자리 앞에서 때렸습니다. 소스데네는 동족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참고 견디어 바울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고전1:1). 얼마 후에 바울은 형제들과 작별하고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수리아에 갈때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선교 동역자로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이 겐그레아에 이르렀을 때 일찍 서원한 바가 있어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는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삭발을 했습니다. 그후 에베소에 들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그곳에 남겨 두고 안디옥 교회로 내려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고린도와 같이 인본적이고 물질적이고 도덕적으로 심히 타락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면서 복음역사를 섬기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볼 때 결코 시대 환경이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는 고린도와 같이 힘든 환경이지만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붙잡혀서 잠잠하지 않고 말씀을 증거할 때 주님께서 친히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1:1말씀 전파를 통해 죄악의 탁류 속에 떠내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역사를 섬길 때 주님께서 전능하신 손으로 보호하시므로 우리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