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3 강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말씀/ 사도행전 18:23-21:16
요절/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사도 바울의 제 3차 전도 여행은 주로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복음역사를 감당한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복음역사는 이때까지 바울의 감당한 역사방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또 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바로 여기서 로마선교의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강의에서는 (1)두란노 서원의 역사와 (2)바울의 목자 생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I. 에베소 (18:23-19:41)
(1) 유능한 성경선생 아볼로 (18:23-28)
18:24-28에서는 아볼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서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아덴으로서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유명한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 성경이 나왔습니다. 아볼로는 이곳 출신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가 학문이 많다는 말에는 당시 수사학도 배워 웅변에 능했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그는 일찍부터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는 열심과 소원이 있었지만 아직 영적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지식적(학문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관한 것은 알았지만 아직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뿐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중생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에베소에 와서 담대히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보니 유식하기는 한데 어딘가 영적으로 한 쪽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주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평신도들이었지만 훌륭한 성경선생들이었습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아볼로는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아볼로는 학식과 은혜가 넘치는 종이 되어 아가야 지방을 다니면서 믿는 형제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28).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성경선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있을 때만이 그 속에 담겨진 영적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또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한 5:39).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아볼로가 유능한 성경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 버립니다.
(2)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19:1-7)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여독도 풀지 않은 채 안디옥을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였습니다(8:23).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때 바울은 에베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좀 이상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아볼로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던 때에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수리아와 아시아 지방에는 세례요한파가 있어 예수님을 가르쳤지만 요한을 더 숭상하였습니다. 이 파는 금욕적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것만 들었지 예수님이 참 생명의 구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생활은 금욕적이고 도덕적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도덕생활로 생각합니다. 남에게 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되지 않는가 생각하고 선하게 살고자 애씁니다. 이들은 죄도 도덕적인 죄만 죄로 여기고 영적인 죄는 알지 못합니다. 이런 도덕생활의 특징은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사함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또 자기 의가 강합니다. 이런 자는 은혜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요한의 세례의 참 뜻과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성령세례입니다. 이 성령세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임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기초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5).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였습니다. 방언은 특별한 상황에서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성령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자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은 도덕생활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할 때 근본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요3:3,5). 성령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생명과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와 기쁨, 영생의 소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결코 딱딱한 생활도 아니오, 형식에 얽매인 생활도 아닙니다. 또 금욕적인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활이요, 은혜로운 생활입니다. 무엇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에 넘치는 거룩한 순례자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죄를 짓고 또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기쁨은 이를 맛본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을 때에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영적인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또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2:38절 말씀을 볼 때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고전12:3), 예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고전12:31).
(3) 두란노 서원의 역사 (8-22)
사도 바울은 늘 하는 식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리 앞에서 비방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9b,10a) 바울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는 자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영접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소도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때까지 복음역사를 섬기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로 복음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역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중심의 역사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언제든지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과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말씀을 영접지 않고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며 복음역사를 감당해 왔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어떻게든지 굴복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처음 석 달 동안에는 바울은 이런 자들과 싸우며 역사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지치기만 하고 아무런 열매가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무모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곧 이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순수하게 영접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아마 7절에서 성령을 받은 12사람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중심으로 말씀역사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역사에로의 일대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무리 중심에서 제자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란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진리를 좇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겸손한 자들입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마음으로 뜨겁게 영접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성령의 그릇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는 자들과 싸우느라 말씀을 잘 영접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리할 때 순종하는 자들은 힘들어집니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루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둘째,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헬라 철학자들이 수사학과 철학 또 수학도 가르치는 강의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매 안식일마다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란노 서원에서는 매일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2년 동안 이 일을 줄기차게 감당했습니다. 저는 일주일만 계속해서 강의해도 스태미너가 딸려 어려움을 느끼는데 2년 동안 계속했으니 정말 대단한 정력입니다. 바울은 실로 위대한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때까지 여러 곳을 다니며 넓게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3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면서 한 곳에서 말씀의 샘을 팠습니다. 그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베자 사본에는 그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장막 만드는 일을 하여 자급자족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피눈물나는 투쟁을 많이 했을까 생각됩니다. 이로써 그의 복음역사는 절정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의 복음역사를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각 곳에서 모여드는 사람마다 바울의 유명한 두란노 강연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에베소 교회 개척뿐 아니라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개척된 것입니다(계1:11).
이런 가운데 저자 누가는 희한한 사건 하나를 기록함으로써 말씀 역사가 어느 정도 흥왕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행하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이를 남용하여 악귀를 쫓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 중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다가 악귀에게 큰 봉변을 당하고 혼이 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은(銀) 오만원어치(1은=1드라크마=하루 일군품삯)나 되는 마술책을 불사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당시 에베소지역에 얼마나 마술이 성행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두란노에서의 말씀 역사를 다음과 같이 comment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세력을 얻으니라”(20). 에베소에는 이때가지 마술이 세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마술이 그들의 생각과 마을과 생활을 지배해 왔습니다. 마술의 세력은 거대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파되었을 때 말씀이 힘이 있어 이를 파하였습니다. 이제는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세력도 파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맥을 못 추게 됩니다. 이는 강렬한 태양 아래 모든 것이 녹아나고 힘을 이렇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물질주의와 육신주의, 인본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세력들은 노도와 같이 우리를 삼키고자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영혼의 세계에까지 깊이 침투하여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력들 앞에 무력하게 삼킨 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이런 세력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꾸준히 공부해 나갈 때 말씀이 내 마음 가운데 세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두란노 서원의 역사를 줄기차게 감당할 때 말씀이 고대 캠퍼스와 세계 154개국 캠퍼스에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셋째, 로마 선교의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말씀 역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대개 일이 잘 되면 안일해지고 이에 만족하기 쉽습니다. 개척기에 감당한 고생을 생각하고 더 이상 개척하고 싶지 않습니다. 양들로부터 존경과 사랑만 받고 그곳에 주저앉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이때 놀라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개척지를 바라보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은 두란노 서원의 역사를 감당하는 가운데 새로운 믿음과 비전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말씀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도 말씀으로 능히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대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웅장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 비전 가운데는 로마를 통해 전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야 말리라는 의지와 희망이 불타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후에 미국을 거쳐 중공도 보아야 하리라”
(4) 데메드리오 사건 (19:23-41)
말씀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자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아데미 우상숭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데미의 은감실 제조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데메드리오와 그 동업자들이 실직을 하게 이르렀습니다. 아데미는 달신으로서 대지(大地)의 어머니라고 하는 최고의 여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감실로 만든 여신상을 집마다 안치하기도 하고 부적과 같이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데미 여신의 위신을 내세우며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며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으로 인해 기존 전통 문화가 큰 도전을 받고 무너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조용하던 이곳에 큰 파문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모든 기존 전통문화에 도전함으로 그릇된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핍박을 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복음역사가 일어날 때 낡은 전통문화가 파괴됨으로 반드시 이런 반대 세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II. 바울의 밀레도 고별 메시지 (20:1-21:16)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줄 구제헌금을 걷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헬라에 석 달 동안 머물면서 로마서를 집필하였습니다 (1-2). 그후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거쳐 드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6). 거기에서 바울은 밤중까지 말씀을 강론함으로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12). 바울은 가는 곳마다 지칠 줄 모르고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그후 바울 일행은 미둘레네와 기와 사모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 바울의 고별 메시지(17-38)
바울은 밀레도에 이르자 에베소에 있는 리더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의 목자생활에 대한 간증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메시지에는 그 동안 사도 바울이 어떤 자세로 복음역사를 감당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①목자의 기본 자세(18-20)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써 섬겼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양들을 섬길 때 근본적으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었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될 때 근본적으로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빌2:5). 양무리를 섬기는 목자생활을 하려면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 요구됩니다. 겸손은 교만을 정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바울은 눈물로 섬겼다고 합니다. 이는 상한 목자의 심정을 말합니다. 그는 양들로 인해 항상 그 심정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인내로 주를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죽이고자 목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핍박의 주동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핍박을 받을 때 얼마나 참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감정적으로 이들과 싸우지 않고 참았습니다.
또 그는 양들에게 유익한 것이면 개인적으로나 공중 앞에서나 꺼림이 없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고 온전히 양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는 진실로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② 증거의 핵심(21)
사도 바울이 말씀을 증거할 때 그 증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21) 유대인과 헬라인은 당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먼저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며 인간성이 훌륭한 사람들을 볼 때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특히 외모가 아름다운 선남선녀에게 회개하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올바른 성서적인 인간관을 가질 때 이에 속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롬 3:10)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3:23).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는 의로울 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추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등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심판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전해야 합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의를 주장하게 되고 믿음이 없는 회개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자기 불의만 주장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포함될 때 올바른 믿음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막 1:15).
③ 사명에 대한 자세(22-24)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의 증거를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에 대한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24절을 읽어보십시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또 명예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으면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26,27). 정말 사람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또 이 사명은 사람이 나 어떤 단체가 준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인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내 일생을 투자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의미없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명이 없는 인생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사명에도 여러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사명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사명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또 바울은 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코자 하였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잘 달리다가 마지막 골인 지점에 와서 주저앉아 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다가도 건강이 좋지 않거나 몸에 좀 무리가 오면 우선 살아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목숨을 아끼는 마음이 들어 사명을 뒤로 제쳐 두거나 중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는 사명을 절대로 완수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절대로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시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인류 구속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④ 증거자의 책임(25-27)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란 생명을 뜻합니다. 그는 증거자로서 마땅히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으므로 듣는 사람들의 영적 생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 33:8,9절을 읽어보십시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이 말씀은 증거자의 책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자로서 꼭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아픔을 감당하기 싫어서 회피해 버리면 그 책임을 목자가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치 않을 수 없게 됩니다.
⑤ 감독자(28-32)
바울은 에베소 리더들에게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흉악한 이리가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 일어나 영적 분위기를 흐려 놓습니다. 이를 감독하고 양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목자의 사명입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목자는 감독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3년 동안 감독자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⑥ 물질생활(33-35)
바울의 물질생활은 자급자족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에 탐심을 갖지 아니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벌어먹고 또 약한 자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는 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물질생활에서도 본을 보였습니다.
말씀을 마친 후 그들은 무릎을 꿇고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목을 안고 크게 울며 배에까지 전송을 했습니다. 바울과 이들이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져 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사도 바울의 목자생활을 살펴 볼 때 첫째로 그가 주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자세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조금도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뜻을 증거하였습니다. 둘째로, 그가 양떼들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양들을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원수들과 싸웠습니다. 그는 목자요, 감독자요, 원수와 싸우는 장군이요, 하나님의 대사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위대한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으로 (21:1-6)
바울은 그들과 작별한 후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바다라로 가서 그후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 구브로 옆을 지나 수리아로 진행하여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여기서 일주일을 머물고 돌레아이에 이르렀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가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13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러자 사람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며 그쳤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는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을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란노 서원의 복음역사입니다. 그는 여기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강론함으로 큰 복음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로마 선교의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공적인 복음역사를 이루었지만 조금도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끝까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이 한가지 사명을 어찌하든지 완수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 바울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며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은혜의 빚을 갚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 바울은 위대한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