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4 강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말씀/ 사도행전21:17-28:31
요절/ 사도행전28:20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우리는 제 7강에서 사도바울이 두란노 서원의 역사를 통해 로마선교의 비전을 보게 된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어떻게 로마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런 과정에서 총독과 왕 앞에서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제 8강에서는 (1)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서 (2)증거자 바울에 대해서 (3) 성령께서 그의 뜻을 어떻게 성취해 나가시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유대인 앞에서의 증거 (21:17-23:35)
1. 체포(21:17-40)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야고보에게로 가니 장로들도 다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방 가운데 이루신 역사를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믿게된 사실 뿐 아니라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생각하여 보내준 구제헌금으로 인하여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유대 신자들로부터 오해받고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중에 믿는 수가 수만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이들은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서 복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 유대 신자들은 아직 초보적이며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율법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사실 그들의 허위 선전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수를 가르쳤을 뿐이었습니다(13:39). 야고보는 그들이 오해를 풀도록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율법을 좇아 결례를 행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결례란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보통 30일간 했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7일간 했습니다. 그 시작과 끝에 머리를 깎고 그 기간 동안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기간이 차면 제물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이에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26).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하던 자들로서 그의 얼굴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3대 자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민이라는 자부심과 모세의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세 가지를 모두 모독하고 훼방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28).
그 증거로 그가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극시키는데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소요 소식을 듣고 천부장이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와 바울을 체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위기일발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바울은 결박된 채 영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바울은 말씀 전할 기회를 붙잡았습니다(37-40). 바울은 돌로 맞고 쇠사슬로 결박되어 정신없이 끌려가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코자 하는 한가지 사명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즉석에서 유명한 그의 간증 메시지가 생겨났습니다.
2. 유대 백성들 앞에서의 증거(22:1-30)
바울은 영문으로 들어가는 층계 위에서 쇠사슬로 결박된 채 손짓하며 백성들을 조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방언인 아람어로 간증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도를 핍박하여 성도들을 죽이기까지 하나님께 열심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큰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9장의 사건을 그들이 알기 쉽게 유대교적 정통 입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17절부터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회심이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하던 중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들이 너의 증거를 듣지 아니할 것이니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니라.“(21)
이때까지 말을 잘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이방선교에 대해 이야기하자 즉시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하면서 티끌을 날리며 떠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그렇게 이방선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선민사상에 깊이 젖은 복음을 유대인의 독점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죽어라고 멸시했습니다. (이들의 유다이즘에 대해서는 10장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참조할 것.) 그는 자신의 회심과 이방인 전도의 사명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방 선교를 용납치 않으므로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변명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간증 메시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임하셨다는 사실과 또 그를 통해 이방 선교를 이루고자 하시는 큰 뜻을 두고 계셨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즉, 그는 이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과 또한 이방 선교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증거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시 영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로마법의 보호를 받게 되고 장차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로마도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3. 공회 앞에서의 증거(23:1-11)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그토록 죽이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공회를 통해 그 실상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그들을 주목하면서 자신이 오늘날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에 저촉됨이 없는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말이 오만불손하다고 생각하여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가 법을 따라 재판하지 않는 약점을 물고 늘어져 그의 외식을 도리어 책망하였습니다. 재판도 하기 전에 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네가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하자 바울은 몰라서 그랬다고 슬쩍 넘겨 버렸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 부분은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부활을 주장하는 바라새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자신은 바리새인으로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바리새인의 동정에 호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회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싸움이 벌어지고, 바울은 그 사이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로 모사였습니다. 그는 위기를 당할 때 이를 모면할 수 있는 기지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은 원수들 틈에서 홀로 심문을 당하는 가운데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날 밤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11절을 읽어 봅시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말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주님께서는 바울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증거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 같이 로망에서도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는 그가 앞으로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반드시 로마로 가게 되며, 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회피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이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4. 가이사랴로의 호송(23:12-35)
그 다음날 유대인들은 40여명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바울을 공회에 청하여 올 때 중간에서 매복하였다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 정보가 바울의 생질을 통해 천부장에게 알려졌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밤 제 삼시, 곧 밤 9시에 백부장들과 보병200, 마병70,창군200명 도합 472명이 바울을 호위하여 벨릭스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바울을 섬세하게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황태자와 같이 호위를 받으며 벨릭스 총독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바울이 1대1로 가르칠 양을 미리 예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Ⅱ.총독과 왕 앞에서의 증거(24:1-26:30)
1. 벨릭스 앞에서의 증거(24:1-27)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와 함께 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송사하였습니다. 더둘로는 감미로운 말로 총독을 추켜세운 뒤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고소내용은 그는 염병, 즉 trouble maker로서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고소는 로마법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죄목이었습니다. 총독은 이에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아무 증거가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사렛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분명히 하였습니다.(14) 그리고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은 그들이고 고소하는 대로 율법이나 성전 문제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 문제임을 밝혔습니다.(21)
재판의 결과는 무죄함이 판명되었지만 벨릭스는 막연히 연기를 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고자 하는 탐욕과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27) 그는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 믿는 도를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석방을 위해 돈을 주거나 구차히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강론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의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는 자객을 보내어 대제사장 요나단을 살해하고 포악한 짓을 행한 자였습니다. 또 드루실라는 남의 아내였는데 그가 절세의 미인이므로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중매로 그를 빼앗아 세번째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의 죄악된 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강론한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심판을 받게 됨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임한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총독이요,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위치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에게 담대히 심판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들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생활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25:1-27)
벨릭스 후임으로 베스도가 도임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바울을 죽이고자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재판하였으나 아무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하며 상소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것은 로마시민의 특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에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 죄가 지고 있다 하더라도 죄수로서보다 자유인으로 가서 자유롭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유인이 된다면 언제, 어디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자유스럽지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것이 그에게는 로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므로 더 안전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요 기대였습니다. (롬1:10,13)
또 로마에 복음 증거하는 것은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는 뜻이기 때문에 그는 어떠하든지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드디어 로마로 가는 티켓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티켓은 완전 무료였습니다.
수일 후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왔습니다. 그는 12장에서 충이 먹어 죽은 헤롯 아그립바의 아들이었습니다. 또 버니게는 그의 누이로서 요부였습니다. 그들은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자 즉시 찾아온 것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의 일로 문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으나 무슨 죄목으로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또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3.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증거(26:1-32)
이 부분의 바울의 증거는 결박된 후 두번째의 간증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첫번째의 경우와 대상이 다르므로 강조점이 다릅니다. 1-7절까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심문을 받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6,7절을 읽어봅시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및 선지자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고대하였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소원은 그들이 어려운 현실 가운데 처할 수록 더욱 불타 올랐습니다. 이 소망은 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가장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들은 절망 중에서도 메시야에 대한 소망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망으로 인해 위로와 힘을 얻고 어떤 역경과 시련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민족의 박해를 받았지만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더욱 불타 올랐습니다. 이들은 메시야가 오면 국가적인 문제나 개인적인 문제나 모든 인생 문제가 해결될 줄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경 바디메오도,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야를 갈망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소망을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8-18절에서 자신의 극적인 회심과 부르심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임을 증거했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여 나사렛 예수가 이단으로 생각하고 철저히 대적했습니다. 그를 좇는 성도들을 죽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비추셨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환과 증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바울을 어두움 가운데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요.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 한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그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모르고 사단의 권세에 얽매여 신음하는 자들을 구원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죄사함과 성도들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도록 함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나 한 사람을 어두움 가운데서 구원하신 목적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나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통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8). 그리고 이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고 소망하던 바로 그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23절까지는 이후 바울이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곧 사방에 다니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도록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높은 사람 앞에서나 낮은 사람 앞에서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함으로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야임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만이 참 소망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정신병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에게 계속해서 믿음을 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결박한 것 외에는 모은 사람이 자신과 같이 참된 크리스챤이 되기를 원한다는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바울이 체포당한 후부터 유대인 앞에서나 총독과 왕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얼른 보기에는 길기만 길 뿐, 아무런 뜻이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왜 이렇게 6장이나 되는 긴 부분에 걸쳐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증거자 바울: 바울은 현재 죄수의 몸입니다. 그는 쇠사슬에 얽매여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또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공회와 총독과 왕과 같은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홀로 외롭게 투쟁을 해야했습니다. 그는 이들 앞에 설 때 조금도 비굴한 자세를 취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증거자로 섰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섰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섰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자신에 대해 변명하기 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비록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실패하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 앞에 벨릭스 같은 총독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또한 낮은 자이든 높은 자이든 그 자세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하건 조금도 상관치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는 참된 증거자였습니다. 우리는 증거자 바울을 통해 증거자로서의 그의 내면성과 증거하는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둘째, 성령의 뜻: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사로잡으실 때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두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뜻 두신 대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를 인도하시고 그를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도구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부활이 왕이나 총독 같은 권세잡은 자들에게 증거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들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만과 체면과 죄악된 생활을 끊기 싫어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들도 복음을 들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이 높고 낮은 자나 누구에게든지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Ⅲ. 로마로 향하여 (27:1-28:15)
사도 바울은 무죄가 판명되었지만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로마로 보내야 했습니다. 드디어 사도바울의 꿈에도 소원인 로마행이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든든한 호위병들과 무료로 가게 된 것입니다.
(1) 로마로 가는 배에서 (27:1-44)
바울은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백부장 율리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몇 사람의 죄수들은 중죄인으로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처형될 죄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시돈을 거쳐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습니다. 이 배는 로마와 애굽을 왕래하는 큰 곡물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풍세에 의지하여 항해를 해야했기 때문에 시일이 많이 걸리고 위험도가 높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향해를 하다가 니도를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미항을 출발시 사도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기 때문에 항해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대개 오늘날 9월20일 전후로서 이 절기 이후에는 항해하기가 위험하였습니다. 바울은 많은 전도여행으로 항해에 풍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선장은 배의 지휘권을 가진 자요 선주는 배의 소유자입니다. 선장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고, 선주는 이해타산에서 의지하여 항해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권면했지만 백부장은 목자의 말을 무시하고 세상 사람들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순풍이 불어 득의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휩싸여 그대로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짐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배의 기구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별은 나침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방향도 잃어버리고 되는대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여망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생의 목표를 잃고 절망 상태에서 좌절하고 있는 인생들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목자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절망 상태에서 빠져 음식 먹을 힘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날 먹지 못해 기진맥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 지쳐서라도 죽을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절망하고 있을 때 바울은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어나서 절망 중에 있는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5) 여기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 한 사람 때문에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도 보호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나타나사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서 바울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의지할 반석이 되시고 환난 중에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환난 가운데서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평소에는 득의한 줄 알고 자신의 힘과 지혜와 세상 지식과 기술을 믿고 까불어 댑니다. 그러나 질병, 사업적인 파산, 불의의 사고, 전쟁 등 불의의 광풍을 만날 때 절망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가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딘가 속하고 또 무엇인가 섬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항해한 지 열 나흘째 되던 날밤 그들은 겨우 육지에 가까이 이르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사공들이 닻을 주려는 체하고 자기들만 살려고 거루(배에 달린 구멍보트)를 바다에 내려 놓고 그 배를 타고 도망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백부장에게 군사들로 하여금 거룻줄을 끊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이 이 배의 지휘자요 백부장은 그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목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먹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고 떡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무시하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순순히 그의 말을 잘 듣는 어린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날이 새자 육지가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배는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큰 물결에 부딪혀 깨어져 버렸습니다. 군사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봐 책임 때문에 죽이고자 했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코자 하여 모두들 헤엄쳐서 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헤엄쳐서 마침내 육지에 상륙하여 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2) 로마 도착(28:1-15)
그들이 상륙한 곳은 멜리데섬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섬에서 추장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기도로 고쳐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후한 대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디오스구로 배를 타고 수라구사와 레기온, 보디올, 삼관을 거쳐 로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주 안에서 사모하고 사모하던 형제들을 볼 때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얻었겠습니까?
Ⅳ.로마의 셋집에서(28:16-31)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수호하는 군사의 왼손과 죄수의 오른손을 같이 쇠고랑으로 채웠습니다. 이들은 보통 3,4시간마다 교대했습니다. 3,4시간마다 새로운 1대1 양이 말씀공부하러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 중 리더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가이사에게 송사한 것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오 어쩔 수 없이 한 것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쇠사슬의 대사가 된 근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20절을 읽어봅시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있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26장에서 공부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쇠사슬의 사도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들은 바는 없고 다만 이 파에 대해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받는 사실만 알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일자를 정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성경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 중에는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믿지 않는 완악한 자들로 인하여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에 대해 경고를 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적극 방향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어떻게 복음역사를 감당했습니까? 30,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은 셋집에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의 셋집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감옥소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2년동안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는 두란노 서원에서와 같이 날마다 2년 동안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축복하사 313년 만250년 만에 로마가 복음으로 완전히 정복된 것입니다. 바울의 셋집 역사는 아주 보잘 것 없고 미미했지만 대로마를 무너뜨리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것입니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8강 공부를 통해 증거자 사도 바울과 성령께서 어떻게 그들 로마까지 인도하시고 쓰셨는가를 배웠습니다. 이 시간을 요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죄수의 몸으로 심문을 받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야를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한 민족에게 국한된 소망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주신 소망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에게 소망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왜 소망이라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 인생들은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희망을 가지고 살더라도 죽음 앞에 모든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죽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갖게 되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런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은 불변해야 하고 또 영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이 도저히 성취될 수 없으므로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벧전1:3,4). 예수님은 그 자체가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자체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바라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선교사 유학생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믿음의 결혼을 하여 훌륭한 평신도 목자 가정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또 훌륭한 의사가 되어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주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회사 중역이 되어 학생복음역사를 support하는 물주로서 쓰임 받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희망들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세상의 헛된 희망과는 비교도 안되는 고귀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들도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얽매여야 할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자체에다 소망을 두지 않을 때 결국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꿈과 이상을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소망도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빌3:8).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만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본받고자 몸부림친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 소망 때문에 쇠사슬의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 때문에 사명의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참된 소망 때문에 기꺼이 사명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의 수고는 헛되지 않는다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얽매이는 것이 많습니다. 공부가 우리를 얽어매고 때로는 가정이 또 군대가 얽어 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얽어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번 봄학기 사도바울과 같이 쇠사슬의 사도가 되어 캠퍼스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증거자의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희망을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체에다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행전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특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도행전의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택하신 사도들을 통해 복음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