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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8-3:20

by Mark Yang   04/29/2022   Romans 1:18~3:20

Message


로마서 제 2 강

믿음이 없는 세상

말씀/ 로마서 1:18-3:20

요절/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7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없이 사는 이방세계와 율법을 기초로 사는 유대인 세계를 살펴봄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죄악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 복음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없는 세상이 어떤 형편 가운데 있으며, 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복음을 믿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이방인들의 죄 (1:18-32)

(1) 죄의 뿌리 (1:18-23)

1: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 마음대로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았을 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와 죄에 빠져 불경건하였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불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죄에 대해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그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리를 막았습니까?

첫째,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함 (19,20).

19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날 때부터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생득적인 지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무의식 깊은 곳에 절대자를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는 사실 가운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인간과 제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도서3:11). 이는 사후세계에 대한 동경과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 가운데 잘 나타납니다. 인간은 어거스틴이 고백한 대로 그 마음 한 곳에는 하나님이 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로 만족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을 소유할 때만이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은 생득적 지식에 속합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어머니 젖을 빨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내재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으신 자연만물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시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봄이 오면 진달래 피고, 여름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 되면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탐스러운 열매를 내고, 겨울이 되면 소복소복 눈이 내립니다. 이러한 사시사철의 변화와, 갖가지 진기한 동․식물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충돌 한 번 없이 운행하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 또한 인간의 신비한 신체조직 등 실로 자연의 신비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지나쳐 각 사물마다 신이 있다고 하는 범신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연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지으신 만물과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 있습니다 (행17:27).

자연계시 외에 특수계시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내재적인 지식을 통해, 과학자들은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 인식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을 직접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히1:1,2). 요한복음 1: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특수계시입니다. 우리는 이 특수계시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책입니다.

이상을 살펴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3에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요, 고의적인 배반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함 (21).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인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마땅히 인간들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25).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제 1되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는 교만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인 양 착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근본원인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도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살기에 필요한 모든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생명을 주시고 두뇌를 주시고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생명에 필요한 무한한 공기와 빛나는 태양빛을 허락하셨습니다. 씨만 뿌리면 열매가 나는 땅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왔지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당연히 생각하고 감사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까지 주신 것도 감사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감사하지 아니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또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신경질을 내게 됩니다. 불신자들의 특징은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감사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일이 잘되면 운이 좋거나 자기가 잘해서 잘된 줄로 생각합니다. 일이 안 되면 재수가 없어서, 또는 팔자가 사나와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상탓, 부모탓, 환경탓을 하며 운명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신자의 특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되도 감사, 못 되도 감사, 몸이 건강해도 감사, 아파도 감사, 범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고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각이 허망하여졌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갖가지 퇴폐적이고 허무한 사상이 난무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헛생각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은 미련하여져서 어둡고 운명적이 되어 얼굴이 까맣게 됩니다.

셋째, 우상숭배로 진리를 막음 (22,23).

인간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배반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형편이 어떠합니까? 결국 우준하게 되어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자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케 됩니다. 인본주의 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의 본산인 헬라에서 가장 많은 신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을 의지하고 섬겼습니다 (행17:23). 로마에서는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하나님 대신 수많은 신을 만들어 놓고 섬깁니다. 일본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신사를 만들어 절하며 섬깁니다. 우리 나라는 명절 때만 되면 제사상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합니다. 이렇게 썩어질 사람을 우상으로 섬길 뿐 아니라 돼지나 소, 개, 고양이, 뱀, 악어 등 짐승을 섬깁니다. 지성인들도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피조물로 바꿈으로써 인간의 가치는 금수와 버러지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2) 죄의 보응 (1:24-32)

인간들은 하나님을 고의로 배반했습니다.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24:26,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버려 두셨다”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같이 직접적으로 진노를 쏟으시기도 하고 또 내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어버려 두는 것은 자유로 생각하고 심판으로 생각지 않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처럼 무서운 형벌은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이는 비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간은 이미 심판을 받아 죽은 상태나 다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곤고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결국 악령에 시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간들의 실제생활은 어떠합니까? 마음의 정욕대로 살게 됩니다 (엡2:3). 하나님 없이 살 때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적인 타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정욕대로 살다가 이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부끄러운 욕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대신 변태적인 것을 즐깁니다(26). 남자들도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행위대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 망측한 짓을 합니다(17, 공동번역). 동성연애(Homo-Sex)가 그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파마를 하고 스커트를 입고 입술에 화장을 하고 핸드백을 들고 다닙니다. 이들은 정욕과 욕심의 노예가 되어 미친 듯이 악령에 시달립니다. 이런 자들은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습니다. 남몰래 성병으로,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합니다. AIDS(후천성 면역결핍증)는 반드시 Homo-Sex주의자들에게만 걸립니다. 이로 인해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행복의 요람은 깨어집니다. 오늘날 날로 증가하는 이혼현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인간내면의 생활을 잘 말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결국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인간이 하지 못할 갖가지 악독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28절에서 상실한 마음이란 인간의 타락한 마음자리란 뜻입니다. 인간들은 이성조차 상실하고 악한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이 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등 갖은 죄악이 난무하게 됩니다. 사회의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신용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 없는 사회는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서로 이용하고 짓밟는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를 죄로 인정치 않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32).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양심이 마비된 상태는 가장 최악의 상태입니다. 오늘날도 심리학, 사회학, 상황윤리 등으로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의식을 없이 해 주고 마음놓고 죄짓도록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볼 때 인간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을 버린 신앙적인 죄에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사회제도의 개편, 정화운동, 도덕재무장 운동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도덕적인 문제는 자연히 해결됩니다.

하나님없이 사는 이방세계를 살펴볼 때 한 가지 깊이 들어오는 것은 그들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불신자들이 육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생활이 자유롭고 멋있게 보이고, 하나님을 믿고 사명인으로 사는 생활이 너무 폐쇄적이고 구속된 생활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그들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없이 사는 자들을 볼 때 자유롭기는 커녕 육신과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여 동물과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방인들의 죄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에 대해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셨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그러했고, 폼페이시가 그러했습니다. 폼페이는 각 가정마다 신을 모시는 재단이 있었으며 음란한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하루 아침에 화산으로 인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Ⅱ. 유대인의 죄 (2:1-3:8)

사도 바울은 이방세계에서 유대인의 세계로 눈을 돌립니다. 이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도 있는 반면, 양심대로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도 죄인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자신들도 스스로 자기 의를 주장하며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들도 예외없이 죄인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1) 판단하는 유대인 (2:1-16)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심판에는 공적인 심판이 있고, 사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공적인 심판은 국가의 질서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 하는 사법상의 재판이 있고, 또 예언자들과 같이 죄를 책망하는 종교상의 재판이 있습니다. 또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것도 이에 속합니다. 이런 공적인 심판은 꼭 필요합니다. 사적인 심판은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남을 판단하여 그 죄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적인 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말없는 죄인으로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침해로써 가장 큰 교만입니다. 남을 판단하게 되면 결국 그 판단으로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결국 남을 판단할 때 상대방으로 향하는 손가락은 두 개이지만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은 세 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나가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률을 가지고 삽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생활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는 자들은 양심이나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이 이를 대신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도덕률이 무너질 때 질서가 파괴되고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양심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성실하게 인생을 삽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자기 의가 되어 그렇지 못한 자들을 판단합니다. 이들이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판단하는 자는 의로운 재판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판단하는 자도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또 남이 보지 않는 데서는 갖은 추한 짓을 다하면서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인 체 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위선과 허위하는 죄를 더 짓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보다 더 치료하기 힘듭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보이는 외상에 비유한다면, 이들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질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를 깊이 시인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숨은 죄를 깨닫고 회개할 줄 모릅니다. 이들의 문제는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입니다(5).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기 힘들어도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봅니다. 그래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그것을 빼 주고자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실족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남을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눈에 대들보가 있는 것을 깨닫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 때 결코 남을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이 여인과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먼저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셨습니다. 이들은 결국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모두 물러가 버렸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남을 판단하는 자들은 자신은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합니다. 당장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은 심판에서 제외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5).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이며 확실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심판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6).

하나님의 심판은 개별적입니다. 인간은 각각 자기가 행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각 그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직고하게 됩니다 (고후5:10, 롬14:10-12). 또한 하나님은 각자가 행한 열매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6,7,9,10절에는 ‘행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행위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심판하는 것은 가장 공정합니다. 만일 행위로 하지 않고 부나 지식으로 한다면 이는 불공평합니다. 부자는 구원받고 가난한 자는 심판 받는다면 그것처럼 불공평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지식으로 한다면 신학박사는 무조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로 할 때 신학박사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심판 받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범죄한 행위를 기초로 심판하심을 말해 줍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공부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 착각하기 쉽습니다. 또 많이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알지만 한 마디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있는 유대인은 그 율법을 행했는가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또한 마음에 새긴 율법 곧 자연법이 있습니다(15). 마음의 도덕률이 있습니다. 양심과 이성은 마음의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와 같이 서로 송사하고 변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로마서의 근본 교리와 모순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행위가 구원을 얻는데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행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아는 길은 행위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행위를 동반합니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낳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행위가 좋지 않은 자들, 열매가 좋지 않는 자들은 그 믿음이 거짓 믿음입니다. 2: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날에 심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날에는 태양 앞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듯 우리의 모든 행위가 벌거벗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생목적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7,8).

7,8절을 보십시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인생목적과 방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는 것을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이요, 당을 지어 불의를 좇는다는 것은 자기 유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NIV). 선이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악이란 자기 유익을 좇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선사업을 많이 하고 양심대로 산다고 해도 그 인생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아니할 때 결국 자기 명예나 유익을 좇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부분적으로 심판하시기보다 전체적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십니다. 또 그런 자의 내면에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10).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십니다. 또 악을 행하는 자의 내면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9).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1).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 있느냐 자신에게 있느냐 하는 인생항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회개는 세상이나 자기에게로 향해 있는 인생항로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한 성품 때문에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인생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한3:17). 2:4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장에 심판하시지 않고 그토록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2) 형식적인 유대인 (2:17-29)

유대인들에 있어서 다른 하나의 문제는 할례 문제입니다. 할례는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인치는 도장과 같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백성 중에 끊어졌습니다 (창17:14). 할례는 안식일과 함께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선민의 긍지를 갖게 해 준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난 지 8일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만큼은 꼭 행했습니다 (요한7:22).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할례 받는 것으로 다 된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선민으로서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거울과 같은 율법을 주셔서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18).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17). 또 스스로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원을 터득하였으므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스승이라고 믿었습니다(19,20).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실제 생활은 달랐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남은 가르치지만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의 이중생활은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오늘날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는 자들로 인해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율법을 행할 때 할례가 유익한 율법을 범한즉 무할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오늘날 세례에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진실 되게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할례의 형식만을 주장하고 내용이 없는 쓸모 없는 자들이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요한5:44).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살 때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됩니다.

(3) 사명을 버린 유대인 (3:1-8)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가 중요하지 않다면 할례 받은 유대인들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1). 3:2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들이 많은 특권을 받았으나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맡은 것이라고 말합니다(2). 유대인들은 세계 만백성의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특권에는 반드시 사명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특권을 자랑하고 사명은 저버렸습니다. 이들이 사명을 저버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 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들의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당신의 참되심과 영광을 더 풍성히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저버린 자들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러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보탬이 되었다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잘못이 아닌가 하고 항의합니다. 이런 자들은 죄를 회개하기 싫어서 해괴한 이론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8b).

결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온 세상 (3:9-20)

이상에서 이방세계와 유대인세계를 살펴 볼 때 모두 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의 세력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10).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입은 마음에 쌓은 악에서 독을 발하고 행동으로는 사람을 파괴시켰습니다. 사람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저주스러운 세상에 살면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진노의 자식이요, 멸망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실로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자아발견을 해야겠습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세상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친히 예비하신 구원의 복음을 심령으로 영접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