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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1-8:11

by Mark Yang   04/29/2022   Romans 7:1~8:11

Message


로마서 제 5 강

믿음의 성장

말씀/ 로마서 7:1-8:11

요절/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는 지난 4강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가 무엇이며, 또 믿는 자의 새 생활이 무엇인가를 공부했습니다. 믿는 자의 새 생활은 성결의 생활로서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생활입니다. 의의 종으로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입니다. 오늘 제 5강은 믿음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성장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자녀가 건강하게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심령이 강하여지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을 멈출 때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보배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거듭난 자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한지 10년이 되어도 성장이 없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볼 때 애늙은이를 대하는 듯 부담스럽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성장을 멈추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굳어 버립니다. 굳어 버리면 바리새인과 같이 쓸모 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거목으로 자라납니다. 이를 볼 때 신앙 성장은 육신의 성장과 달리 연수가 문제가 아니라 자세가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투쟁을 하는 자는 매년 몰라보게 자라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주 순탄하게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듯 기분 좋게 생활을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플라타너스 나무와 같이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구루마를 끌고 산비탈을 올라가듯 힘들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심령에 기쁨이 없이 시커먼 얼굴을 하고 억지로 마지못해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 이렇게도 힘든 것인가 하며 포기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신앙 성장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갈등 문제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좋은 줄 알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안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잘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이런 문제에 심각하게 부딪히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 공부는 이와 같은 문제를 마음에 두고 신앙 성장에 있어서 율법과 성령의 역할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Ⅰ. 율법에서의 자유 (7:1-13)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7장에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율법의 역할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6:14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입니까?

(1)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함 (1-6)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결혼에 비유하여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율법씨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씨는 조금도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와 살면 행복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율법씨는 이 여인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율법씨는 이 여인에게 높은 수준의 생활을 요구하였습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일용할 양식 먹을 것, 6-7시 아침 식사 준비, 7-9시 청소, 9-11시 1대1, 11-1시 심방, 이런 식으로 빈틈없이 계획표를 짜놓고 이대로 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처음에 한 두 번은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여인은 율법씨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씨는 그 여인에게 시어머니와 같이 심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매를 심하게 때리며 학대를 하였습니다. 율법씨는 조금도 여인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거나 봐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율법씨는 냉혈 인간과 같이 무정하고 무자비했습니다. 결국 여인은 엄격한 시어머니 밑에서 심하게 시달림 받는 며느리와 같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스스로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법적으로 남자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남편인 율법과의 법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7: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장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원래 법이란 사람의 살 동안만 효력이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율법에서 벗어나려면 율법이 죽거나 여인이 죽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여자들에게도 이혼 권리가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여인은 일단 결혼을 하면 일생 동안 남편의 법에 얽매였습니다. 여인이 남편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남편이 죽거나 여인이 죽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씨는 철인과 같아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4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더 이상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신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곧 예수님에게 가서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姓)은 예수님을 따라 Mrs. Jesus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씨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씨와 달리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해 주십니다. 우리가 실수를 해도 은혜로 봐 주시며 우리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적으로 결혼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결혼을 잘해야 합니다. 겉보기에 인간 조건이 좋고 훌륭하다고 해서 함부로 결혼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은혜씨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특히 초신자는 더욱 그러합니다. 대개 믿음의 새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에게 율법을 많이 만들어 놓고 지키려 합니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게 되고 또 자신도 판단하게 됩니다. 지키면 교만해지고 지키지 못하면 자학하고 불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율법에 대하여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은혜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과거 율법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생활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이 말씀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생활과 율법에서 자유한 생활의 차이를 말해 줍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생활은 얽매인 생활입니다. 이는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의문이란 법조문( Written Code)을 말합니다. 곧 신앙생활을 법조문을 지키듯이 하려고 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관계되는 십계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막10:17-22). 그러자 그는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법조문보다 계명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명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도 목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법조문을 지키듯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 심령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2) 거룩한 율법 (7-13)

이상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므로 율법은 나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정말 나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7a). 사도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설명함으로서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7b절을 보십시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제 9계명입니다. 다른 계명은 다 겉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죄로 생각지 않기 쉽습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우리는 과거 욕심을 죄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욕심을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심이 없으면 출세하거나 물질을 모으지 못하기 때문에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부려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욕심이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이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죄인 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자 죄가 살아나서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고 결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천로역정에서 재미있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도가 어떤 방에 들어가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그 방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먼지가 일어나 질식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또 한 사람이 물을 뿌리자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 방은 인간의 부패한 내면 상태를 말해 줍니다. 또 빗자루를 들고 쓴 자는 율법이요, 물을 뿌린 자는 은혜씨인 예수님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이지 죄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또 나를 질식시켜 죽게 만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간음으로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실제로 간음만 행치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욕을 품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음란한 생각이 들고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전보다 더 깊은 죄의식에 빠져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자체는 거룩하지만 이 말씀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됨으로 그 죄가 나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처음에는 말씀 공부를 하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할수록 우리는 점차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비쳐 줍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지 않으면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공부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또 죄를 깨닫게 되면 심령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말씀 공부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이를 기피합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통해서 죄를 깨닫고 죄인으로서 자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 나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가정교사와 같은 것입니다 (갈3:24).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혜를 덧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은혜 아래 산다고 율법을 무시하게 되면 은혜를 남용하게 되어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Ⅱ. 바울의 내적 갈등 (7:14-25)

(1) 죄 아래 팔린 자 (14-24)

14-24절에는 ‘나’라는 존재와 함께 죄가 의인화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주체는 ‘나’입니다. 이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말합니다. 이 자아는 진실되게 살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요한1서 3:16). 그래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미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미워지는가 하면 그의 말하는 것, 걷는 모습, 표정 등 모든 것이 밉게 보입니다. 내 마음은 사랑하려고 하는데 내가 원치 않게 미워지고 말이 거칠게 나옵니다. 이 때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왜 내가 원하는 것을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않게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육신에 선한 것이 없으며 ‘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의지로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 21절에서 말하는 법은 ‘principle’ 곧 이치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배웁니다. 이것은 성서적 인간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본래의 자아와 선을 행치 못하게 하는 죄의 세력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고자 하는 힘보다 죄의 세력이 더 강한 것이 문제입니다. 23절에서의 법은 힘, 세력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는 항상 선과 악의 싸움이 있습니다. 영육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항상 선이 악의 세력 앞에 K.O패 당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의 세력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다가 항상 실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깊이 절망하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자신이 사망의 늪에 빠진 비참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건져 줄 구세주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필사적으로 S.0.S를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문제는 사도 바울의 갈등 문제입니다. 이 갈등은 귀중한 갈등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데서 생기는 갈등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생기는 인간적인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생기는 신앙적인 갈등입니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단숨에 넘어뜨리고 개선하자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며 노래했습니다. 이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일생을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데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 기만과 뼈저린 비극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악령에 시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결국 이런 갈등은 인간의 선의지를 좀 먹어 사람을 못쓰게 만듭니다. 이런 인간적인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은 바 은혜도 까먹고 이로 인해 신앙 성장이 막히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믿기 전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경험한 신앙적인 갈등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고자 영적으로 투쟁하는 자가 겪는 갈등입니다. 믿음으로 은혜 받고 난 후 그 은혜를 감당하고자 몸부림치다가 생기는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신앙 성장에 유익합니다. 우리는 이런 갈등을 통해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요한 웨슬레 등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이런 갈등을 통해 참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거목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는 비바람을 맞은 나무가 더 깊이 뿌리를 내려 더욱 견고히 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갈등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또 갈등이 부담스럽다고 회피해서도 안됩니다. 이런 갈등이 없이는 결코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갈등을 한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증거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갈등이 아무리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갈등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갈등이 생길 때 빨리 신앙적인 갈등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신자의 공동체(Christian Community)를 통해서만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다보면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 문제가 생깁니다. 경쟁심이나 시기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자체에 얽매여 자학하거나 형제를 미워하기 쉽습니다. 인간적인 갈등만 하다가 사단의 밥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때 이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감으로 신앙적인 갈등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내놓고 기도할 때 영적인 투쟁을 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진누가 목자님은 남달리 경쟁심이 강한 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제 1인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Senior Seven Tiger가 되지못하고 Junior Seven Tiger가 되었습니다. 또 Junior 중에서도 김상규 목자님 때문에 1인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인간적인 갈등으로 뼈가 썩는 것같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문제를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인 갈등에서 신앙적인 갈등으로 방향 전환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예수님을 붙듦으로써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이제는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대 목자가 되었습니다.

(2) 문제의 해결자 예수 그리스도 (25)

이 때까지 절규하던 사도 바울은 갑자기 감사로 바뀝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새 번역) 그는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덧입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한 열병에 시달리던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고 열이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깊은 잠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서 빛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 것입니까?

Ⅲ. 영을 좇는 생활 (8:1-11)

(1)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하나님 (1-4)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의 요구와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해방 선언입니다. 이는 위대한 해방 선언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이제 율법의 판단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을 자학해서도 안되고 또 남을 정죄해서도 안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입니다(1,2,9,10,11).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할 때는 죄의 세력이 마음의 법보다 더 강하여 번번히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을 때는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하므로 능히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b, 4절을 보십시오.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는 너무나 엄격하여 안 지키면 심판 받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간은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예수님께 다 뒤집어 씌우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사 인간들이 져야 할 모든 죄의 짐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벧전2:24).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도록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입니다(4).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2) 영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 (5-11)

5,6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육신의 일이란 하나님 없이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행위를 기초한 자기 노력도 포함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추하고 더러운 생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중심한 생각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자기가 무엇을 해 보려고 합니다.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이런 자의 내면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갈등으로 인한 환난과 곤고뿐입니다. 결국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각이며 하나님을 중심한 생각입니다. 이런 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자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생각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생각은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은밀한 가운데서 육신의 생각을 즐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곳에서도 위엣 것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때 참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고의 복음화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을 좇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할 때는 육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할 때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임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셔서 친히 나를 인도하시고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실 때 더이상 육신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9). 또 10절 말씀에서 볼 때 참된 크리스천은 형식적으로 교회 잘 다니는 자가 아니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할 때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10). 또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할 때 결국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11).

결론 :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매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크신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보배피를 흘리신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영을 좇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내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사 내가 할 수 없던 것을 능히 하게 하시고 우리를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로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은 감사와 기쁨과 환희로 충만하며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같이 순탄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저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