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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1-20(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6 강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8:1-20
요절: 요한복음 8: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본문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간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죄 중의 하나로서 이 죄가 끼치는 악영향은 매우 지대합니다. 이 죄는 한 개인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기초하여 여인을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여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순결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Ⅰ.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1-11)

첫째, 새벽부터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1,2)
7장에서 백성들은 7일 동안 초막절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축제가 끝나자 백성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 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기간 동안 적대 분위기 가운데서 상한 심정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얼마간의 휴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개 큰 행사를 치루고 나면 며칠 동안 정신없이 잠을 자며 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역사를 치룬 후에는 반드시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요 6:15). 예수님은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심으로 모든 피곤을 극복하시고 영적 쉼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영력을 덧입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백성들은 초막절 행사 후 내면에 공허함을 더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음을 아시고 새벽부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인간은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신 8:3절 말씀은 인간이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존재의미와 삶의 목적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이 나아가야 할 길과 삶의 가치관과 산 소망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며 무엇보다 영생을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치료 불가능한 죄인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시켜 줍니다. 사람을 가장 잘 돕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 가르치는 사명을 힘써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심으로써 어두운 그 시대를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두운 이 시대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시대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어두운 이 시대를 밝혀야 합니다.

둘째, 종교 지도자들과 간음 중에 잡힌 여인(3-6a)
예수님께서 한창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를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지체 높은 근엄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마땅히 고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간음 중에 있는 여자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사창가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 그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함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시험이 됩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 하게 되면 로마법에 저촉되어 살인교사 죄로 고소당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모순을 범하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이중인격자,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만일 돌로 치지 말라 할 경우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되어 유대 종교상의 고소 조건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선한 목자요 좋은 성경 선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무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법과 약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감정으로 충만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신 22:22), 그들은 연약한 여자만 끌고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고 사랑과 용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여인이 왜 엄격한 율법 사회에서 간음을 했을까요?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도 원치 않게 죄를 지었을까요? 우리는 이 여인이 왜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이와 같이 냄새나는 추한 여인이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행동의 동기는 정욕 때문입니다. 정욕에는 짜릿한 쾌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즐기면 행복할 줄로 생각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간적일 뿐 그 후에는 무서운 죄의식과 수치심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한두 번 은밀하게 죄를 즐기고 그만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를 놓치지 않고 죄의 노예로 삼아 버립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면 이런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력에 이끌려 반복해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사슬이 되어 사람을 강하게 얽어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은 아주 심각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도적질은 배상하도록 하였지만 간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랍비들은 간음을 우상 숭배와 살인과 동일한 죄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음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간음죄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크고 그 결과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정욕으로 인해 패가망신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특히 오늘날은 음란 비디오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큽니다. 음란 비디오를 본 자들은 그 정신이 황폐하게 되어 정신 질환에 걸리게 됩니다. 어떤 고등학교 학생이 공부도 전교에서 1, 2등을 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호기심에 이끌려 음란 비디오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학생은 정욕의 노예가 되어 공부도 못하게 되고 나중에는 정신 이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정욕은 건전한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고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고 재능을 말살시켜 인간을 못쓰게 만듭니다. 심하면 정신 질환에 걸려 미치게 됩니다. 미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욕은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 뿐만 아니라 가정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정욕으로 인해 파괴된 가정이 생겨 납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반항적이 되고 사회에 대해서 파괴적이 됩니다. 이런 자들이 성장하여서 또 파괴된 가정을 이루게 되어 치료 불가능한 악순환이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도덕적으로 부패했을 때 하루 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를 사모하는 죄의 소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창 4:7). 이 죄의 소욕은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를 다스리지 않고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죄 짓는 것을 차 마시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가장 먼저 양심의 고발로 인해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죄의식은 아무리 합리화하고 비상한 노력으로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천하 장사나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도 무력해지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죄는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 원을 그리며 주위에 영향을 미치 듯이, 죄를 범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각과 생활과 인격 형성과 인생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악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호기심으로 범한 죄로 인해 일생을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피우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a). 여인은 은밀하게 죄를 즐겼지만, 이제는 공중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여인은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사색이 되었습니다.

셋째,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6b-8)
예수님은 정죄 받고 있는 이 여인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6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다는 기록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을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말씀을 쓰셨을까요? 아니면 “너 자신을 알라”고 쓰셨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죄목을 쓰셨을까요?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가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썼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인가 썼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무리들의 흥분된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보셨을 때 여인의 죄악된 삶과 또 목자없는 삶을 인하여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분노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죄와 마귀의 세력에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시자 그들은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다그쳐 물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통쾌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사 11:2). 아무도 예수님의 지혜를 당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지만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는 자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감히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이 순간은 여인이 정죄를 받고 예수님이 덫에 걸려들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인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영적 지혜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배웁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요(히 4:15), 또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요한 5:22).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살펴 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기 전에는 의인의 심정을 가지고 여인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살펴 보았을 때 여인을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넷째, 여인을 정죄치 않으신 예수님(9-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도전하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왜 어른들로부터 먼저 나갔을까요? 어른들이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죄의식을 더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이성적이기 때문에 죄를 더 빨리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모두 나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양심의 소유자임을 배웁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이성과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양심은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여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바른 행동을 하려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죄의식과 수치심을 느끼고 회개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양심은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무디워지고 사회 관습과 전통에 의해 상대화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예수님의 보배 피로 씻음 받고 거듭날 때 청결한 양심이 되어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양심이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았을 때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b)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통회하는 눈물을 보시고 따뜻이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사죄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재판장이요 여인은 그 앞에 선 죄수입니다. 재판장 되신 예수님께서 죄를 정하게 되면 여인은 정죄를 받게 되고, 사면을 내리면 무죄 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여인의 운명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그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면을 내리심으로 여인을 옭아매고 있던 죄의 사슬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여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대신 정죄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벧전 2:24). 갈라디아서 3:13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셨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8:1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께서 나를 정죄치 않으시고 의롭다 하셨으므로 아무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롬 8:33,34)

죄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억제하고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임으로써 그들 중에 악을 제하도록 하였습니다(신 22:22b). 그러나 율법으로 아무리 강력히 규제하여도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죄의 소욕은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사우디에서는 오늘날도 도적질하면 손을 자르고 간음하면 돌로 쳐 죽입니다. 그래서 강간을 하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아예 죽여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는 법으로 인간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죄는 사죄의 권세자 되신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실 때 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죄를 용서받은 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 되어 죄를 즐기는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죄와 싸우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여인으로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내면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황공주와 같은 하나님의 딸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공주답게 세상과 구별된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는 생활입니다. 만일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도 옛생활로 돌아가 죄의 낙을 즐기는 생활을 한다면 이는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때로 죄를 범하고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죄와 싸우는 성결한 생활을 하고, 적극적으로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롬 6:12,13)

Ⅱ. 나는 세상의 빛이니(12-20)

우리가 빛된 삶을 영위하려면 죄와 싸우는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이는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어두움에 다닌다는 것은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인은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어두움에 다녔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시기심과 교만과 외식으로 인해 어두움에 다녔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시기하고 미워하면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요, 또 음란한 생각을 하고 죄의 소욕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마음에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생명의 빛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줍니다. 또한 무기력한 자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어 생명력을 공급해 줍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을 때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가 참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증거가 참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그 자체가 진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자증하므로 증거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아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길을 찾는 구도자였지 길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 자체가 되십니다.(요14:6)

둘째로, 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판단할 자격이 있는 분이시지만 인생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십니다.

셋째로, 율법에 비추어 볼 때도 참되십니다.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고 하였는데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하시기 때문에 참되십니다(17,18).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도 알지 못하고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가 문제였습니다(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20).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우리를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고 빛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