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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12-39

by Mark Yang   04/29/2022   Romans 8:12~39

Message


로마서 제 6 강

믿는 자의 희망

말씀/ 로마서 8:12-39

요절/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신자들이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환난과 핍박, 조롱 등 외적 고난 뿐 아니라 사탄이 송사하는 내적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현실에 얽매이고 심령이 좁아지기 쉽습니다. 본문은 이런 고난받는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장차 나타날 영광과 믿는 자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희망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신자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고난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작은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신자로서 가져야 할 참된 희망이 무엇이며, 또한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가 그 비결을 배워야겠습니다.

Ⅰ.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12-17)

8: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8:10,11절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우리는 빚진 자이지만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요, 영에게 빚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육신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없고 영을 좇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본성대로 사는 생활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인간다운 생활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좇아 본성대로 살면 당시는 좋을지 모르나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과거에는 육이 영을 지배하여 육신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이 육을 지배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의 소욕에 지배당하는 자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입니다(14).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대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어떤 손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무엇입니까?

(1)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됨 (15,16)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사단의 영, 즉 악령을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 사단의 노예가 되었을 때는 남 모르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죄의식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는 대상도 없는 막연한 두려움 등 세상 사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꿈을 꿔도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고 깜짝 깜짝 놀랍니다. 이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항상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악령의 지배에서 벗어나 양자의 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법적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를 봐야 되고 부자유스럽습니다. 항상 긴장해야 되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근본적으로 은혜와 사랑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 줍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아빠, 아빠’하며 천진난만하게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언제든지 자유롭고 거리낌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힘든 세상에 살면서 괴롭고 답답한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아버지여!’ 하며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또 그 인자하신 품에 안기어 참 안식과 위로와 힘과 용기를 덧입을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바쁘다고 또 피곤하다고 이 특권을 누리지 아니할 때 심령이 딱딱해지고 은혜가 사라집니다.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실패한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품에 안길 때 주님께서 놀라운 하늘나라의 축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슨 호적등본이라도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이는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고 불러도 이상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2:3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해 주는 확실한 성령의 증거입니다.

(2)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됨 (17a)

17a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종이었을 때는 아무리 잘해도 상속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상속의 권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후사가 되면 아버지가 소유한 권리나 재산, 모든 특권을 다 물려 받았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회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누리게 될 특권과 영광과 권세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딤후2:12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상속이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요, 또 장차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실감이 안 갈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믿고 바라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짐에 따라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엡1:18).

(3)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게 됨 (17b)

17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영광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또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받는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많은 해를 받으시고 마침내 부활하사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눅24:2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심입니다 (벧전2:21).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특권으로 여기지만 고난받는 것은 특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것을 괴로움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난 없이 영광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결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는 특권을 누리고자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특권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빌3:10). 한번은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와서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을 장사지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절한 것입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자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행14:19-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큰 특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은혜 받으면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빌1:29).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생명력을 잃은 죽은 생활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병폐는 십자가가 교회 팻말만 되고 참된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특권입니다.

Ⅱ. 장차 나타날 영광 (18-27)

18절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나타날 엄청난 영광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어떤 것입니까? 본문 19-27절에는 세 종류의 탄식이 나옵니다. 탄식이란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에 대한 감정의 표시로써 너무 괴로울 때 끙끙 앓는 소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탄식함으로 바라는 것은 그 희망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잘 나타내 줍니다.

(1) 피조물의 탄식 (19-22)

19-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만물을 말합니다. 현재 피조물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피조물은 허무에 종속되어 썩어질 것에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저주하시면서 땅도 함께 저주하셨습니다 (창3:17).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실 때도 피조물도 함께 물심판을 받았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 지음 받았으므로 인간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인간이 구원되어야 함께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속히 허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사훈 박사님은 돼지고기가 불신자들의 입에 들어갈 때는 “억울하다, 억울하다”하며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입에 들어갈 때는 “감사, 감사”하며 들어간다고 표현했습니다. 피조물의 세계는 겉으로 볼 때 평온하고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치열한 생존 경쟁과 약육강식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고자 하며 개구리는 벌레를 잡아먹고자 합니다. 또 독수리의 눈은 뱀을 노리고 있습니다. 자연 동산은 숲이 우거지고 꾀꼬리 소리가 들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에덴 동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칠성장어는 다른 고기의 복부에 구멍을 뚫고 피를 빱니다. 날치나 꽁치는 고래나 돌고래의 먹이가 되고 고래나 돌고래는 범고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으르렁거리고, 고양이는 쥐를 사정없이 공격하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쥐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피는 꽃은 아름답지만 또 잎새를 갉아먹는 벌레가 있습니다. 실로 자연 만물은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귀를 땅에 대고 들어보면 이들의 신음 소리와 고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해산의 수고(The pains of child birth)’로써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희망 가운데서 고통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루 속히 이런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영광의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도 하루 속히 만유가 회복되어 무너진 천지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2) 신자의 확신 (23-25)

피조물 뿐만 아니라 신자도 탄식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여기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란 신자를 가리킵니다. 신자들이 정말 희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영혼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몸이 구원받지 못했으므로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인생, 신령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나도 원치 않게 죄를 짓고 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욕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정말 마음으로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만 육신 때문에 항상 제약을 받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루 속히 육신조차도 구원받아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하고 욕된 몸이 구속되어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연약한 몸이 강한 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몸의 구원은 신자들의 탄식하여 바라는 희망입니다. 우리 몸이 구원될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문제는 자유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에든지 속박되기를 싫어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합니다. 미국에는 이런 자유가 가장 많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항상 군복을 입고 다니십니다. 그러자 어떤 미국 대학생은 경관복을 입고 오더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데모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철학은 ‘Do as you like’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자유 때문에 병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8:32).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 예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 때문에 항상 자유가 제약을 받고 이로 인해 우리는 탄식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 몸이 죄로부터 완전히 구속함을 받을 때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다시는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또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이 일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마지막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이 부활하여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대 구속 사상입니다. 인간의 구원 뿐 아니라 자연 만물도 구속되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사상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만유가 회복됨으로 올 낙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의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함께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6-9) 우리 신자들이 바라야 할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땅에 붙은 시시한 희망이 아닙니다. 이런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신자들의 희망은 보이지 아니하는 참된 희망입니다.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희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런 희망을 가진 신자들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는 그 날 영광스러운 희망이 성취될 것을 바라며 끝까지 믿음으로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만이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3) 성령의 탄식 (26,27)

신자들이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살지만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연약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가장 막히는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쩔쩔맵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이 간구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중보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때로 응답 받지 못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기 때문에 기도의 효과가 100%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나 위로의 힘을 얻고 신앙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중보기도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생각할 때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성령을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또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Ⅲ. 하나님의 크신 뜻 (28-30)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신자들이 실수를 합리화하는 데 잘못 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신앙 체험에서 나온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제 세상을 사랑하던 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신자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두신 뜻은 완전무결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불행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요셉의 일생에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되게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로 갑자기 애굽의 노예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또 겨우 보디발의 집에서 적응을 하고 충성함으로 가정 총무가 되었을 때 무서운 내적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보디발 자매님의 끈질긴 유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이런 사건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의 전 인생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께서 크신 뜻을 두시고 역사하사 나의 일생을 가장 완전하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결코 실패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데서 겪는 고난과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다만 그때 그때 사람들과 비교해서 실패하는 것같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결코 내버려 주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후회 없는 삶, 실패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원치 않는 불의의 사고로 말미암아 절망하고 자포자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인생을 다 산 후 내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완전무결한 뜻 가운데서 성공적인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선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선은 일이 잘된다거나, 병이 낫는 다거나,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 것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맏아들로 삼으시고 그 형상을 본받도록 하셨습니다. 형제는 형제들끼리 영향을 가장 잘 받습니다. 동생들은 큰 형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의 큰 형님으로 세우사 그를 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미리 정하시고 또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마침내는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선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때 우리는 세상의 외적인 사건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조각시키사 명실공히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키우시는 하나님께 우리 모두를 맡길 뿐입니다.

Ⅳ. 하나님의 크신 사랑 (31-39)

신자들이 외적, 내적으로 고난을 당할 때 장차 나타날 영광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버릴 수 없는 신자의 확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때까지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뜻과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구속의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의 심정에는 벅차 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심정에서는 환희에 찬 사랑의 시가 흘러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수와 같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숱한 역경을 뚫고 정상에 오른 백전 노장의 승리의 찬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여러 가지 대적하는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 편이신가? 하나님이 나를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원수들에 의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히13:6)

또 예수님 믿다가 항상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피해 의식이 생깁니다. 시간 손해, 물질 손해, 청춘 손해, 이 손해를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심령이 딱딱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셨는데 어찌 다른 모든 필요한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피해 의식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사단의 송사로 말미암아 죄의식에 시달리며 자학하게 됩니다. 특히 실수를 하거나 실패할 때 내가 무슨 목자냐? 열국의 어미냐? 하는 사단의 고소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33,3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택하신 자를 송사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자신도 마음대로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로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의 어느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케 되었습니다. 다같이 35-3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순교), 질병 등의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애매하게도 도살할 양과 같이 천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도 남은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항상 고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는 더 큰 위협이 됩니다.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 세상의 권력과 명예심, 부모 친척들의 정,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기자기하게 살고 싶은 달콤한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가운데서도 확신하는 것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어날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사랑의 줄을 더욱 견고케 할뿐입니다. 믿는 자들이 태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어 진다해도 버릴 수 없는 확신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승리요, 또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절대적인 승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바라야 할 진정한 희망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뿐 아니라 온 천하 만물도 구속을 받아 만유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결코 기가 죽지 않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에게 두신 뜻을 반드시 이루시며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