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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13:14

by Mark Yang   04/29/2022   Romans 12:1~13:14

Message


로마서 제 8 강

신자의 윤리

말씀/ 로마서 12:1-13:14

요절/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자세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11장은 구원에 관한 교리편이었으나 12장부터는 실천편입니다. 본문 말씀을 하나님께 대한 자세(12:1,2), 신자 상호간의 자세(12:3-13), 불신자에 대한 자세(12:14-21), 국가와 이웃에 대한 자세(13장)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거룩한 산 제사 (12:1,2)

1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도 바울은 먼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1-11장까지를 받는 말씀으로 너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구원함을 덧입고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교리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의 실제 윤리 생활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기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이를 행하도록 명령으로 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먼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순교하라는 말입니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짐승을 희생시켜 제물로 드렸습니다. 온전한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은 육체를 말하지 않고 우리의 삶 전체, 인생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주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십니다. 주일이면 예배보는 것으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자신을 드리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순교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는 어떠합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므로 절대적인 진리가 없습니다. 모두가 상대적으로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이 변합니다. 옷 모양이 변하고 헤어스타일이 변합니다. 이런 일상적인 유행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합니다. 이 세대는 무엇보다 음란합니다. 이는 자유가 많고 여유가 많은 개인이나 나라일수록 더욱 심합니다. 음란한 잡지, 영화, TV, 요사이는 음란한 비디오가 판을 칩니다.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학문을 탐구해야 할 캠퍼스의 지성인들도 말로 다 할 수 없이 음란합니다. 캠퍼스에서나 직장에서 대화의 주제가 음담패설이 될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세대 가운데서 순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연애 안하는 것을 바보처럼 생각합니다. 방탕하고 죄악된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여깁니다. 또 이 세대는 물질적입니다. 딤후3장에 보면 말세의 특징으로 사람들이 3가지 사랑하는 것이 나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진리보다도 쾌락을 사랑하고 우정보다도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위해서는 이상도, 명예도, 우정도 필요 없습니다. 돈! 돈! 돈! 돈이 최고입니다. 모든 것이 돈을 중심으로 가치가 평가됩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음란하고 죄가 많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좋은 것이 많습니다. 세상은 편리하고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 세대의 영향을 받아 물질적이 되고 육신적이 되고 인본주의적이 되어 버립니다.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영력을 잃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 기준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과거 세상 풍속을 좇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질 수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을 도피해서 사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에 영향을 주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그들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적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도전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 풍조는 마치 거센 탁류와 같습니다. 세상에는 죄의 탁류가 넘실거립니다. 신자는 이 거센탁류를 따라 살지 않고 마치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와 같습니다. 거센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할 때 가만히 있으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맙니다. 적극적으로 투쟁을 해야 합니다. 신자생활이란 욕 안먹고 착하게 조용히 중심지키는 소극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투쟁하는 생활입니다.

둘째로,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항상 회개하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자 생활은 항상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와지고 성장하는 생활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다른 생활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행을 하고 음악 감상을 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새로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심령이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죄는 찌꺼기와 같아서 이것이 쌓이고 막히면 심령을 피곤하게 하고 부패하게 합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심령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습니다. 회개는 묵은 찌꺼기를 청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씻고 나면 시원해집니다. 이와같이 회개하고 나면 심령이 시원해지고 기쁨이 생깁니다. 회개할 때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사 변화를 주십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죄악된 습성을 없이하시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신자는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 뜻을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 공부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자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를 신자의 도덕 생활에 있어 제일 먼저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것이 신자의 도덕 생활의 대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어져야 신자 상호간과 신자와 불신자와의 관계성도 바로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공동생활과 사회 생활은 어떠해야 합니까?

Ⅱ. 신자의 공동 생활 (12:3-13)

(1) 그리스도의 지체 (3-8)

3절을 보십시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말씀은 신자의 공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겸손임을 말해 줍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높은 마음을 품고 분수에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행동하다가 넘어졌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인가를 잘 아는 자는 겸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아는 자는 겸손합니다. 겸손이란 결코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자기 위치와 직분을 알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또 나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만큼 상대방도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할 때 신자의 공동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4-8절까지는 은사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 상호간에 생기기 쉬운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신자는 혼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함께 모여 신도의 공동체, 즉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이 때 자연히 여러 가지 인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학하기도 하고 우월감에 젖어 교만을 떨기도 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다가 싸움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깁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사분 오열되고 그 사이에서 양떼들은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됩니다. 정말 이런 인간 문제는 신자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인간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자신에 대해서 또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4,5절을 봅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몸인 그리스도께 붙은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지체는 몸을 중심으로 상호간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지체는 어느 것이나 중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손이 중요한 만큼 발도 중요합니다. 발 중에서도 발톱은 길면 깎아야 되고 귀찮습니다. 그렇다고 발톱이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발톱이 조금만 살을 파고 들어가도 온 몸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지체중 어느 부분도 무시하고 학대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신자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지체들로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고통합니다. 만일 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지체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조직이 있습니다. Organization과 Organism입니다. Organization은 회사와 같이 상호 유익을 위해 모인 단체입니다. 이런 모임은 필요에 따라 만들 수도 있고 해체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Organism은 몸의 구조와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의 공동체는 바로 유기체(Organism)입니다.

또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이 지체들은 같은 직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눈이 중하다고 모두가 눈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 지체는 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 맡은 직분이 다릅니다. 손이 하는 일과 발이 하는 일이 다릅니다. 손이 발이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고 머리가 손이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이는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이란 단순히 미래사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와 권면과 교훈과 판단 등을 주는 것입니다 (고전14:3).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말합니다. 어떤 이는 섬기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잘 가르치는 성경 선생의 은사가 있습니다. 카운슬링을 잘하는 은사, 구제, 다스림,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란 남다른 능력이나 재능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자는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또 카운슬링을 잘하는 은사가 있으면 이를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이 은사를 묵혀 두고 주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쓰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또 은사란 여기에 나오는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습니다. 임문숙 사모님이나 강마리아 자매님은 음악에 재능이 있습니다. 또 정금미, 기계형, 심재호, 김병로 목자 같은 분들은 찬송에 특별한 은사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fishing하는데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cooking하는 데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은사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은사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개발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남과 비교해서 보잘 것 없다고 자학하고 적극적으로 쓰지 않고 묻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됩니다. 은사의 개발은 신자의 공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은사를 알 때 지체로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은사는 결코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고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거짓 없는 사랑 (9-13,15,16)

9절을 보십시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신자의 공동생활에서 겸손이 중요한 만큼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성도의 교제에 있어 윤활유와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전13:1,2). 그러면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에는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거짓이란 진실치 못한 가식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런 진실이 없는 사랑은 우리가 곧 느낄 수 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란 악을 미워하고 선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 주고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된 사랑에는 반드시 미워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것이 없이는 사랑하는 것도 없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된 사랑인 것입니다. 선악의 가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묵인하거나 죄를 책망치 않고 좋은 말만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 속에 있는 죄를 책망하고 선을 붙잡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10절을 봅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이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형제를 사랑해야 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형제를 한 식구와 같이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경할 때 함부로 할 수 없고 조심스럽게 됩니다. 저는 서제임스 목자님과 평신도 목자님들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합니다. 그래서 이 분들을 볼 때마다 조심스러워 집니다. 그런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합니다. 사실 먼저 하기는 힘듭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이 깎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꺾고 먼저 존경하게 되면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샘솟게 됩니다. 서로 존경할 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 낫다고 생각하고 서로 무시하면 분쟁이 생기고 지옥이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또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십니다(11). 게으름은 악의 근원입니다. 다윗도 게을러져서 늦잠을 잤을 때 죄를 범했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고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12,13).

15절을 보십시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이 말씀은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는 자들로 함께 잘 울어 줍니다. 자고로 우리 나라는 슬픔과 고통에 익숙하여 남이 불행한 일을 만나면 마음 아파하고 동정을 잘합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면 괜히 비위가 상하고 속이 메스껍습니다. 다른 사람이 메시지를 잘 전하면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고 몸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요회가 잘되면 마음이 상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어쩌다 실수하면 겉으로 동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기분이 좋습니다. 상대방이 잘되고 성공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자는 참으로 성숙한 자입니다. 우리는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짓 없는 진실된 사랑입니다.

Ⅲ.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4-21)

14-21절은 불신자들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신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므로 세상에서 여러모로 핍박을 받습니다. 이 때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핍박을 받으면 복수심이 생겨 저주하기 쉽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을 때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17).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며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격심한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자에게 선으로 대할 때 그 사람은 양심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복수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 둘을 죽인 공산 당원을 용서해 줄뿐만 아니라 자기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양심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불신자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21절에 나오는 대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할 때 결국 악에게 지게 됩니다. 교만은 교만으로 이길 수 없고 겸손으로만이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Ⅳ. 신자의 사회생활 (13:1-14)

1-7절은 신자의 국가에 대한 자세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13:1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란 정치 권세를 말합니다. 신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하이기 때문에 지상의 통치자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관원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행하는 자는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징벌합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두려워 아니하려면 선을 행하면 됩니다(3).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고자 할 때 권세가 두려워 할 것만이 아니라 양심을 인하여 할 것입니다(5). 그러면 구체적으로 권세에 복종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납세의 의무가 있습니다. 또 국방의 의무가 있습니다. 내야 할 세금은 내고 또 형제들은 군대를 기피하지 말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정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 아니라 권세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권세자들은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께로서 난 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권세를 남용하게 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는 일을 공정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의 사회 생활에 있어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질의 빚으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율법을 다 이룬 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이 모든 계명들은 모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게 되어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상대방을 어찌하든지 잘해 주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1-14절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사회의 질서에 복종하여 이웃을 사랑하여 선을 행해야 할 적극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일 재림하신다면 우리는 오늘을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부지런히 회개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주님을 맞이할 영적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도적같이 갑자기 임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영적인 긴장을 하고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말세지말이라고 합니다. 말세 중에서도 말세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핵공포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핵무기를 쌓아 놓고 살고 있습니다. 세계는 언제 종말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방탕과 술취하지 말고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13,14). 말씀과 기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행자지했습니다. 교만과 정욕으로 인해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가 영적인 잠을 깨도록 10년을 하루같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마침 어느 날 그가 정원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이웃집 어린 아이들이 놀면서 “가서 책을 들고 읽어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그는 집안으로 들어와 성경책을 펴서 읽었는데 바로 본문 13:11-17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영적 투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주의 일에 힘썼을 때 그는 인류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와 적극적으로 싸워야 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날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힘써 좇아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 전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받으심직한 거룩한 산 제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