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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7-요한복음 8:21-59(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7 강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 요한복음 8:21-47
요절: 요한복음 8:31,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크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배웠습니다. 또한 용서받은 자가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순결하고 거룩한 사명인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강의와 연결되는 말씀으로서 ‘진리’와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죄의 속박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된 자유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유’라는 단어처럼 많이 쓰여지는 단어가 없지만 자유의 참된 본질을 알고 이를 누리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늘 본문은 참된 자유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Ⅰ.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21-30)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을 영접치 않는 유대인들을 포기치 않으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데 왜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없이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고침 받거나 성격을 고치거나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1:29).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인 메시야인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 인간은 아래서 났고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타고난 죄인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으로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다가 결국에는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이는 죄로 인해서 육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둘째 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계 21:8).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25-27).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인자를 든 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인 것과 또 그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고 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인식하셨으므로 조금도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미움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이 열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30). 예수님
은 이로 인해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없고 머리로만 믿는 피상적인 것이어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뿌리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Ⅱ.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31-36)

첫째, 참된 제자(31,32)
31,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말씀을 확고히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떠 내려가지 않도록 바다에 닻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배는 닻을 내리지 않으면 쉬 요동하게 되고 거센 파도에 떠내려 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닻을 내리게 되면 파도에 약간은 흔들리지만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떠내려 가지도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에 닻을 내릴 때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조류에 떠 내려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악의 파도가 흉흉합니다. 정욕과 욕심의 파도,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의 파도, 거짓 사상의 파도가 넘실 거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들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게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 내려 갈까 염려하노라”(히 2:1) 아담이 실패한 것도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말씀을 굳게 붙잡지 않았을 때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굳게 붙들 때 말씀이 그 사람을 지켜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또 말씀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은 계속해서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골 2:6,7).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는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받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공부만 하고 뿌리를 내리지 않을 때 10년이 가도 아무런 성장이 없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길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 뿐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은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 제자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참 제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계속해서 성장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배웁니다. 스승의 학문 뿐만 아니라 인격과 사상, 심지어는 글씨와 목소리, 제스츄어까지 배웁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 인격을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참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애쓸 때 우리는 작은 예수(little Jesus)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어딜가나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상가들이 진리를 찾다가 이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진리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많은 성현들이 여러가지 많은 삶의 원리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진리란 참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이 변합니다. 가치관도 변합니다. 옛날에는 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이상한 취급을 받습니다. 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썩고 쇠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벧전 2:24,25절은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또 히브리서 13: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과 그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참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이르는 참된 길을 제시해 줍니다.

또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의 모든 것은 썩고 쇠하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셋째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란 진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같이 사람도 진리를 떠나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3:8)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떠나게 되면 다른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또 세상 권세에 얽매여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정과 사랑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런 자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밧데리가 떨어진 건전지와 같이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이런 얽매임 보다도 가장 큰 얽매임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소욕에 얽매이면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정욕에 얽매이게 되면 정욕이 나를 사로잡아 추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얽매이게 되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힘을 쓰고 싶어도 힘을 쓸 수 없고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나 마음에 참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를 얽어매는 것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가 우리를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케 해줍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정욕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허무와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골 1:13).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함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들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내면에 참된 평화를 누리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또 죄책감에 시달리면 성격이 삐둘어지고 이상하게 되지만 죄책감에서 해방될 때 성격이 원만해지고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재능이 개발되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또 소심하던 데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고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아무리 자유로와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울타리 없는 감옥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내면에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참된 자유(33-36)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하며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 많은 나라에 의해 통치를 받아 왔습니다. 현재도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 자부심 때문에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자유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하면 주로 집회 결사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언론의 자유,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유의지라는 고귀한 선물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를 범함으로 죄의 종이 되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하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죄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열쇠는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감옥에 갇혀서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우리 인간에게는 열고 나올 수 있는 키는 부여 받지 못했다. 예수님이 열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내 의지대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와 죄를 짓고자 하는 죄의 소욕의 두 세력이 공존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의지와 죄의 소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번번히 죄의 세력에 굴복당하여 참패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진실되게 살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하는 자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무참히도 패배당하여 마침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는 절망적인 탄식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갈등을 하였고 루터도 이러한 갈등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분들은 마침내 예수님만이 그들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할 때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종은 영원히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죄의 종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려면 죄의 종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줄 구주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여기서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를 인치셨습니다.

Ⅲ. 두 종류의 자녀들(37-59)

37-47절에는 두 종류의 자녀들이 나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자녀(37-41)
37절을 보십시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겸손하였고 손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고 반발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겸손해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 3:7절은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아브라함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마귀의 자녀(42-59)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그들은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하였고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입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입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모두 거짓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심으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이 예수님을 책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대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47).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다, 또는 귀신 들렸다 하며 무시했습니다(48,49). 예수님이 이들을 참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며 또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50). 예수님은 반발하고 무시하는 이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치 않으시고 영생에로 초대하셨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허무, 무기력, 운명, 두려움과 같은 죽음의 요소도 맛보지 않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심판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죽음 대신 영생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말씀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굳게 지키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고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