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고린도후서 10:1-11:33

by Mark Yang   04/29/2022   2Corinthians 10:1~11:33

Message


고린도후서 제 8 강                                          

주 안에서 자랑하라

 말씀/ 고린도후서 10:1-11:33
 요절/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오늘 말씀은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변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떠난 후에 고린도 교회내에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확대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파쟁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득세하여 거만하여져서 바울의 사도직에 이의를 제기하며 불신을 심고 바울을 반대함으로써 교회를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 급히 고린도 교회를 심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고 냉대만 당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 방문을 '고통스러운 방문'이라고 말합니다(고후2:1). 그 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고린도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것은 자신의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함이 아니라, 거짓 사도들에 의해 파괴되어져가는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또한 그들에 의해 미혹된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1-7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호하고, 8, 9장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10-13장에서는 다시 주제를 돌려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13장의 내용이 1-7장과 다른 것은 변호의 성격이 사적(私的)이며, 바울의 적대자들인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강한 어조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의 특성이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10:1-18)
                   
첫째,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는 바울 (1,2)
  1절을 보십시오.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표준새번역) 고린도 교회 내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거짓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떠나 있으면서 편지를 쓸 때는 강경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면 나약한 겁쟁이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바울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 그의 깊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온유와 관용으로 대한 것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고자 애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자생존의 원칙하에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병들고 연약한 자와 죄인들은 정죄받고 무시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품고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정죄치 않으시고 사죄의 은혜를 베푸사 새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며 크신 사랑으로 품고 살려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피곤하고 지친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29)
  예수님은 하나님의 양무리들에 대해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셨지만, 복음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강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는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하시며 무섭게 화(禍)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양면성을 지닌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통 바리새인 출신으로서 율법적이고 긍휼과 자비와는 거리가 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격을 본받고자 애썼을 때 그는 유모와 같이 마음이 온유하며 겸손하고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위대한 내면성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대할 때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했지만 복음의 원수들을 대할 때는 무섭게 대했습니다.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때 구브로 섬에 가서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방해를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저주했습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자 그는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행13:10,11). 이처럼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썼을 때 양면성을 지닌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의 양무리를 대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지 못하고 강하게 대할 때가 많았음을 발견하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 (3-6) 
  바울은 2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함으로써 그들을 강하게 대하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회개치 않으면 강하게 대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죄와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하게 대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단과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지마는 육정을 따라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싸움에서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표준새번역)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몇가지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눈에 보이는 인간이나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의 세력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인간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 영적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미워하고 감정적으로 행하거나 권모술수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기도와 말씀을 기초로 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되고 피차간에 상처를 입고 분열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기초로 영적으로 해결하고자 하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가 은혜롭게 해결됩니다. 
  둘째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원수들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치 않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롬1:21). 교만이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없이 육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롬1:28).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라"는 말과 같이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면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매우 간교하여서 교묘하게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시대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같습니다. 19세기 초에 나타난 다윈이즘이나 20세기 초에 나타난 공산주의의 본질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입니다. 오늘날은 서구문명이 점점 몰락해 감에 따라 사람들은 동양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기공이나 초능력, 단전호흡 등 기(氣) 사상에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으로서 인간이 곧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氣) 사상도 인간에 내재한 궁극적인 기(氣)가 우주의 궁극적인 기(氣)와 동일화되어 관통하게 될 때 인간은 완성되며 궁극적인 존재로서의 자각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으로서 자신이 곧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천인합일의 사상과 동일한 것입니다. 요사이 범람하는 뉴에이지 운동도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인도의 힌두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지학회'(神智學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지학회는 윤회와 환생의 반복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은 점차로 순수해져 간다는 영혼진화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진화의 끝에는 신이 있는데 결국 인간은 신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노력에 의해서 신적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유행하고 있는 전생·환생 신드롬도 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과학주의도 결국 인간의 힘으로 과학의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사는 자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교만이 그 뿌리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원수들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싸워야 할 무기가 무엇인가를 알고, 갈고 닦아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미사일이나 핵 같은 무기가 아니라 어떤 견고한 요새라도 파할 수 있는 영적 무기입니다. 이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엡6:17).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하신 복음진리를 가리킵니다. 복음진리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교만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할 수 있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놀라운 권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할 수 있는 신적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영적 무기를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결코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승패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무기입니다. 걸프전은 별들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가공할 최첨단 무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사막전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 군대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진리의 무기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최첨단 무기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복음의 능력을 덧입을 때 능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도적 권위를 주신 목적 (7-11) 
  7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성도들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받아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독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독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8절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그에게 사도적 권위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사도적 권위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파괴하고자 함이 아니요, 세우고자 함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이 이를 잘못 알고 주님의 종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섬기는 종에 불과함을 인식하고 결코 인간적인 권위를 내 세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사도적 권세를 주신 목적은 진리가 바로 설 수 있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결코 인간적인 권위를 내 세우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강압적으로 인도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엄청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종과 같이 낮아지셔서 섬기는 종으로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주님! 제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높아져서 권위를 부림으로써 복음의 동역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큰 죄를 범하였음을 깨닫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사도적 권세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겸손하게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9-11절은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쓰는 말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는 중하고 힘이 있어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제 2세기의 바울전에는 바울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키가 작고 벗어진 머리에 굽어진 다리, 양쪽 다 찌부러진 눈섭에, 긴 메부리 코를 가지고, 은혜가 충만하여 어떤 때는 사람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천사의 얼굴을 가졌다." 인간적인 사람들은 이런 바울의 외모를 보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넷째, 참된 자랑 (12-18) 
  바울은 12절에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견주어 보고 우쭐해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기준은 주관적이고 인간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기준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분량의 한계를 따라 행동하고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한 것도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야심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또 바울은 주제넘게 남의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그의 활동 범위가 그들 가운데서 더 넓어져서 결국에는 그들 지역을 넘어서 복음의 불모지인 로마와 서바나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 것 뿐입니다(15,16). 
  바울은 이제 17,18절에서 참된 자랑이 어떤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바는 자기 자랑이나 인간적인 자랑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자랑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또한 참으로 인정 받는 사람은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임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많이 합니다. 집을 자랑하고 농짝을 자랑합니다. 컴퓨터를 자랑하고 차를 자랑하고 부를 자랑합니다. 또한 학식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고 업적을 자랑합니다. 또 자식을 자랑하고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형제들은 용맹을 자랑합니다. 키 큰 자는 키 큰 것을 자랑하고 말 잘하는 자는 달변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별별 자랑을 다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무가치하고 허탄한 것입니다. 권력을 자랑하던 전씨와 노씨는 감옥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24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기 안에 이루신 아름다운 역사와 또 자기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능력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겸손과 온유하심과 긍휼과 자비와 같은 아름다운 성품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자랑하기에 가장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선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있으면 열심히 선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목적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입니다(벧전2:9b).  

II. 참 사도와 거짓 사도 (11:1-33)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자기 자랑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고 간청합니다(1).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심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심을 가지고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질투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생각될 때 일어납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출애굽기 20:5절을 보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투하셔서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그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순결한 처녀로 오직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리스도와 정혼을 시켰습니다. 바울은 양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중매쟁이로서 양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그 간사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거짓 사도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그들을 미혹시켜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순결함에서 떠나 부패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신앙이 세속화되어 변질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저 위대하다고 하는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비록 말에는 졸하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편지는 대부분이 성경이 될 만큼 하나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에게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었고, 또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순수하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에 목자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심었습니다(11). 그들은 속이는 일군들로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여 고린도 성도들을 속여 유익을 취하였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과정은 속일 수 있으나 행위의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위의 열매를 통해서 참된 사도인가, 거짓 사도인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16-33절까지는 바울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지만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는 바울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풀고 그들의 목자인 바울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2-29절까지 나타난 그의 자랑에는 그리스도 일군으로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그 몸에 지닐 만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보배 피로 사신 하나님의 양무리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자기 자랑이 불가피하여 자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랑보다도 자신이 꼭 자랑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30).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이 시대에 주님을 자랑하고 선전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