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 1 강
신령한 복
말씀 / 에베소서 1:1-14
요절 /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I. 에베소서에 대하여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약 A.D. 60경, 로마 감옥에서 옥중생활 2년이 되던 해에 썼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불리웁니다. 에베소서는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와 같이 어떤 특정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에베소 주위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보낸 일반적이고 비개인적인 서신입니다. 에베소는 그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교통과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다이애나 여신에게 바쳐진 도시'라고 불리울 만큼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음란과 부도덕이 일상화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차 전도 여행과는 달리 3차 전도 여행 때는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두란도 서원에서 2년동안 날마다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큰 세력을 얻어 마술책을 불사르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때 개척된 교회로서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다음으로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 곧 지상에 있는 천국의 교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특징은 죽음이 아닌 생명, 분열과 소외가 아닌 일치와 화해, 사악함과 부패가 아닌 건전한 의의 표준, 증오의 투쟁이 아닌 악과의 부단한 투쟁, 전쟁이 아닌 평화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복음의 의미를 놀라우리만큼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잘 요약한 책입니다. 아미테이지 로빈슨(Armitage Robinson)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사도 바울 서신들의 왕관"라고 하였고,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인간의 글 중 가장 거룩한 글"이라고 평가한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신들의 여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서신은 많은 독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었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 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중에 프린스톤 신학교 교장이었던 존 멕케이(John Macka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는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체험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다...나는 소생하였던 것이다. 나는 정말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에베소서는 비밀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9,10). 이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으로서 마침내 계시로 드러난 것입니다(3:3,4,9).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바울은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 달라고 기도부탁을 하고 있습니다(6:19,20).
에베소서는 찬송의 책입니다. 에베소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가득차 있습니다(1:3,6,12,14).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주께 찬송해야 합니다(5:19).
에베소서는 충만과 풍성의 책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충만'과 '풍성'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1:7(그의 은혜의 풍성함), 1:18(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1:23(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2: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2:7(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3:8(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3:15(그 영광의 풍성), 3:19(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함), 3:20(더 넘치도록), 4:10(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 4:13(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름), 5:18(성령의 충만)] 이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충만하고 풍성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차고 넘칩니다. 은혜도 차고 넘치고, 긍휼과 자비도 차고 넘치고, 사랑도 차고 넘치며, 영광도 차고 넘칩니다.
오늘 공부할 제 1 장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II. 인사 (1,2)
1,2절은 인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를 의미하였고, 넓은 의미로는 사명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요 20:21). 그가 사도된 것은 자기 의지의 결단이나 사람들의 추천이나 어떤 단체의 임명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보통 편지 쓸 때 말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5:1,2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16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는 은행의 예금 통장과 같은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다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데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축복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참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마음 속에 깊이 묻힌 보배입니다. 그 마음에 이 평화를 소유한 사람은 어떤 요동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III.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축복들 (3-14)
3-14절에는 삼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3-6절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요, 7-12절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찬송함. 3절은 에베소서가 시작되는 가장 웅대한 서사시적 찬양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사도 바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찬송하리로다" 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차고 넘치듯이 그의 심령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불평이 가득한 사람은 입만 열면 불평이 폭포수와 같이 터져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심령에는 찬송이 차고 넘쳤기 때문에 입을 열자마자 찬송이 폭포수같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현재 처한 형편을 생각할 때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만사 형통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련의 때에 찬송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현재 처한 곳은 찬송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악취가 나고 습하고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쇠고랑을 차고 있습니다(6:20). 에베소서 3:13은 그가 여러 환난 가운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감옥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사도 바울의 심령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으로 가득찼습니다. 그의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그의 찬양은 형식적인 찬양이 아니라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웅대한 서사시적 찬양이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3-14절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찬양이 폭포수와 같이 끊임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폭발적인 찬양임을 말해 줍니다. 그는 숨을 쉬기 위해 멈추지 않았으며, 문장을 끝맺기 위해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으로 충만하여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찬송을 가리켜 데일(Dale)은 '많은 고리를 가진 황금줄'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삶은 찬송의 삶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사람들은 보통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장학금을 받거나 좋은 직장을 얻거나 병이 낫게 되거나 아들을 주시거나 양을 주셨을 때 "Praise the Lord!"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들로 인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축복들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복' 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부자되고 출세하고 장수하고 자식 많이 낳는,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축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건강, 재물, 명예, 사회적인 지위, 자식들이 잘 되는 것 등 이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축복은 땅에 속한 축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 축복입니다. 땅에 속한 축복은 지금 당장 나에게 절실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변할 가변적이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며,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은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는 땅에 속한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잘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땅에 속한 축복에 매여 영적 눈이 감기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눈을 떠서 땅에 속한 축복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무한가를 깨닫게 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소중한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았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3b절에서 "복 주셨다"는 것은 부정과거로서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래에 우리의 영적 상태를 고려하여 주실 것으로 보류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순간에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마어마한 부자집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처럼 거지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 1916년에 세상을 떠난 히티 그린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할머니를 가리켜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구두쇠라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오트밀을 데우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일평생을 차가운 오트밀을 먹고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아들은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병원비가 아까워서 그냥 두면 혹시 나을까 하고 병원에 가는 것을 미루다가 절단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저금통장에는 1억불이 있었습니다. 억만 장자가 가장 가난한 극빈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는데 이를 누리지 못하고 극빈자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황태자나 황공주처럼 살지 못하고 거지처럼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부를 소유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억만 장자와 같이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축복의 내용. 4-14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축복들의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4-6). 4,5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하며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무결함을 말해줍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는 것은 아무 자격이 없지만 특별한 은혜로 택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선택의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했다"고 분개하여 말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러합니다. "예, 맞습니다. 당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먼저 창세 전에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나갈수록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6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선택의 신비를 완전히 밝혀 주지 않습니다. 이는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선택 교리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계시하신 진리로서 비록 우리가 이것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논증이나 추론을 통하여 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그 선택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눈을 뜰 때 체험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알게 된다."
예정 교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명백히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 교리는 구원에 대한 의구심을 야기시킴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근심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 혹은 저주를 받을 것인지 결정해 놓으셨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만일 선택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또 선택을 받았다면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나를 구원하실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모든 공적이나 자랑을 배제하고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선택교리는 구원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줍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에로 선택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상태 여하에 따라서 구원을 주신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안하고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나의 상태 여하에 관계없이 확실한 것이요,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거듭나는 순간에 실현됩니다. 데일 무디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가 시애틀에서 어제 밤 두시에 비행기를 타고 오늘 아침 8:30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비행기는 밤 두시에 떠나서 아침 8:30에 워싱턴 국제공항에 내리기로 예정된 비행기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워싱턴 국제 공항까지 올 수 있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비행기 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경륜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감옥생활을 하던 죄수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나온 것만으로 충분치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에게는 새 생활을 위한 설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뜻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지는 과정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화(sanctification)라 하고, 성화의 완성을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받게 된 영적 축복은 죄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7-10).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속이란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노예를 속량하여 자유인이 되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유인일 때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고 감옥에라도 갇히게 되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를 통하여 자유가 없는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이라는 페트릭 헨리의 외침은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말해줍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육신의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혼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8:34). 죄의 노예된 상태에 있는 자는 그 죄값을 지불하기 전에는 결코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값은 죽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대신 우리의 죄값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 값없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기서 비밀이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뜻에서의 비밀이 아니라 인간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다는 뜻에서의 비밀입니다. 레이 서머즈(Ray Summers)는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신적인 계시의 방법으로 공개될 때까지는 설명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진리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깨달아 알 수 없는 진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2:10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계획을 가리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때가 차자(갈 4:4)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8,9a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중에 있는 영광스러운 비밀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알리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영적인 모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이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시고 소정의 훈련을 시키신 후 기말고사를 치르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는 종교를 창시한 자의 가르침이 최우선시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교훈보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더 중요시됩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과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 예수님은 이 고백을 매우 기뻐하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0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통일되게 한다"는 것은 "한 머리 밑에 모은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민족간의 갈등, 동서간의 갈등, 남북간의 갈등, 영호남간의 갈등, 노사 갈등, 부부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 온갖 종류의 갈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현재 이 우주 안에는 불일치와 무질서가 있지만 때가 되면 불일치와 무질서는 종식되고, 만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밑에 모아져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이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다시는 인간을 괴롭히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됩니다(계 21:4). 그곳에는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안식과 희락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이런 영광스러운 구원과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11-14). 11,12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시편 127:3에 보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부모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업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자기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나 같은 자는 있어나 마나한 존재야. 쌀만 축내는 존재야." 하며 자학하며 괴로워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렇게 낮은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대단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대단한 존재임을 알고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업으로 삼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찬송의 대상(對象)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이다." 우리가 양들을 말씀과 기도로 잘 키워서 하나님께 찬송의 대상으로 바치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구속하신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의 대상으로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대상이 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13,14절은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는 4개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듣고, 믿어, 인치심 받고, 보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우리는 말씀공부에 초청을 받아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영접하게 되면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외의 다른 길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인치시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것입니다. 인친다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확정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그의 사랑하는 자녀로 인치셨기 때문에 내 속에 내주하셔서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키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또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보증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22은 말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러한 확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증이란, 장차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축복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집을 사기로 계약할 때 얼마간의 보증금을 냅니다. 이것은 집값 전체를 다 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11-14절에 보면 '우리가'(11), '우리로'(12), '너희도'(13), '너희의'(13), '우리의'(14) 라는 인칭 대명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12절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동족인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13절에서 '너희'는 이방인 독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4절에서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모두를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신 신령한 축복들을 묘사한 후, 이러한 축복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꼭 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들은 인종, 민족, 신분, 성별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라면 누구에게든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령한 복을 주신 목적(6,14). 6, 14b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찬미의 대상이 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찬미의 대상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한 엄청난 부를 소유한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는 물질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다만 아들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깨닫고 감사하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감사하고, 그런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기만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또한 시편 50:23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다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선택하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아무 값없이 죄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셋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요 찬송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들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은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