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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5-23

by Mark Yang   04/29/2022   Ephesians 1:15~23

Message


에베소서 제  2 강
                             
영적 이해를 위한 기도

말씀 / 에베소서 1:15-23
요절 /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장은 거룩한 찬송으로 시작해서(3-14), 중보 기도로(15-23) 끝을 맺고 있습니다. 3-14절도 한 문장이고, 15-23절도 한 문장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심정에 찬양과 기도가 충만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영적 축복들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에베소 성도들을 생각함으로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찬양과 기도를 함께 함으로써 영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복 주시기만을 기도하고 그 마음에 주님께서 이미 주신 영적 축복들로 인하여 감사와 찬양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인하여 감사하지만 현재 상태로 만족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메너리즘에 빠져 기쁨이 없고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그들이 복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받은 복의 의미를 심령 깊이 깨닫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신령한 복을 이해하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이해 (spiritual understanding)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공부할 때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마음으로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적 이해를 위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 지혜와 계시의 영 (15-17)

 15,16절은 에베소 성도들을 인한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본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 사랑, 소망, 이 세가지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이 현재 상태로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영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들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기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한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나 일대일 성경공부를 할 때 성령께서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셔서 그 말씀의 의미와 중대함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말씀공부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가장 먼저 무엇을 알기를 기도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먼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바로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또한 "영광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가까이 계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이 계시고, 너무나 많이 숨어 계시고, 너무나 깊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8절은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골로새서 2:9절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요 1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9-11). 

 1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나 어떤 정보를 수집하여 알게 되었다는 의미의 앎이 아닙니다. 이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알 듯이 "경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현재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적으로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시므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지식이 있지만 대부분이 쓰레기와 같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참 지식은 극히 드뭅니다. 세상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보다 참되고 가치 있고 고상한 지식은 없습니다(빌 3:8). 성경은 특수계시로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돌프 모노드(Adolphe Monod)는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감된 말씀만이 '하나님을 알라'고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너무나 깊고 오묘하시고 신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더듬어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전 6:16). 이렇게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정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는 성령의 조명 하에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9,10은 말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인간이 타락한 후 가장 큰 비극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진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죽음입니다. 인간들의 가장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포함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낙원의 특징은 아름다운 강이 구비쳐 흐르고 기화요초 만발한 좋은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요 영생입니다(요 17:3).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낙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나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1권 1장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나를 알 수 없고(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또 나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Without knowledge of self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탐구 주제는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오며, 나는 누구옵니까?"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벧후 3:18). 한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관한 기본 지식을 넘어서서 더 깊은 영적 지식에서 자라가지 못했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신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2-14). 우리는 단단한 식물도 먹고 소화해 낼 수 있는 성경선생이 되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있어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자라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가 공부한 성경 말씀들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그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기꺼이 마련하는 사람들에게 영적 통찰력을 주십니다. 오늘날은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성령의 은사, 특히 은사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은사인 방언의 은사 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죄가 무엇인지 깨우쳐 줌으로써 회개하도록 도와 주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요 16:8). 또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요16:13). 무엇보다 성령은 성경선생으로서 말씀의 참 뜻을 깨닫게 해 주시고 공부한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26은 말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은 말씀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공부를 할 때 성령께서 친히 성경선생이 되셔서 말씀 속에 담긴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 119: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II. 세가지 위대한 진리 (18-23)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세가지 위대한 진리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 눈을 밝혀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눈으로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합니다. 태양과 달과 별과 갖가지 진기한 것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자연만물을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계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장님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약간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영의 세계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해져서 영적 세계를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는 마음의 눈, 곧 신령한 눈을 떠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령한 눈이 떠져서 영의 세계를 보기만 하면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력과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Fanny J. Crosby는 난지 8개월만에 실명을 하고 운명과 어두움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구주로 영접한 후로는 영적 눈이 떠져서 신령한 세계를 보고 9천편이 넘는 찬송가곡을 작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 204장) 그녀는 육신의 눈을 감기어 세상의 추한 것을 보지 않게 하시고 신령한 세계만 보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신문 편집인이요 고미술품 수집광인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된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나서 유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벌써 미국의 언론인 출신인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찾아 다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매우 값비싼 그 진기한 보화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채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귀한가를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축복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사 우리가 받은 바 축복이 얼마나 귀하고 풍성한가를 알게 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알기를 원하는 세가지 위대한 진리, 곧 부르심의 소망과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걸음입니다. 로마서 8:30절은 말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그의 구속역사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아무렇게나 또 목적 없이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것에로(방향), 어떤 것을 위하여(목적)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하라'고 부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부르십니다(벧전 2:5,9). 하나님께서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도 그들을 바로의 소유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할 때에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당신의 사랑받는 친 백성으로 삼고자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하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참 안식을 주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된 사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방황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은총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기업은 쉽게 말하여 상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벧전 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은 영광스러운 것이요 또 그 기업의 영광은 풍성합니다. 그 기업의 영광이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자녀들은 그렇게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피나게 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기업은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전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힘'은 헬라어로 '두나미스'로서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힘, 전능한 힘을 뜻합니다.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 성경 속에 나타난 수많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의 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당하는데 충분합니다. 그 힘은 모든 죄악된 습관들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기에도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견딜 수 있게 하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힘이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놀라운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모른채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지 모르지만 심령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하여 비참한 패배자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계의 부의 대명사였던 록펠러가 한 때 위장병에 걸려서 일년 반 동안 우유와 비스켓만 먹고 산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큰 부를 소유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을 때 먹는 것 하나도 자유롭게 먹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의지할 때 연약함을 이기고 능력있는 삶,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믿음과 지식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과 이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성을 뛰어넘지만 그것에 의존합니다. 지식(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믿음으로 하여금 더 높이 올라가게 하는 사다리이며 더 멀리 도약하게 하는 도약판입니다. 지식과 믿음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믿음은 지식의 단단한 기반 없이는 성장할 수 없으며, 믿음을 일으키지 않는 지식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20-22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를 통하여 공공연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둘째, 그를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습니다. 셋째, 그를 만물 위에 그의 몸이신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 인간을 종노릇하게 하는 두가지 세력이 있는데 이는 죽음과 악의 세력입니다. 인간은 썩을 몸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원수입니다. 그것은 어느날 우리 모두에게 덮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마귀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므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가지를 정복하셨으므로 우리를 이 두가지 세력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과거 어느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 즉 불멸하며 영화롭고 자유로운 생명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믿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마귀의 세력에서 구원하사 악의 세력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5은 말합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또한 하나님의 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높이신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오른 편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오른편도 왼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무한하시고 하늘과 땅을 모두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분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의해서도 증명되었습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21). 이는 모든 악을 누르고 왕노릇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힘의 지극히 크심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동시에 만물 위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지만 그의 통치 권한은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사람의 몸 중 머리는 그 뜻과 목적대로 각 지체들을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을 부여 받고 충만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