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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22

by Mark Yang   04/29/2022   Ephesians 2:11~22

Message


에베소서 제 4 강
                             
그리스도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

말씀 / 에베소서 2:11-22
요절 / 에베소서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3:21절은 에베소서의 본론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 곧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우주적 교회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상의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된 새로운 공동체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소외된 이방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과 하나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소외에서 화해로", "적개심에서 평화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인간 상호간에 형성된 소외가 물러가고 화해가 이룩되며, 적개심이 물러가고 평화가 깃든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외와 적개심입니다. 칼 막스는 무산계급의 처지를 자본가로부터 소외된 경제적 소외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여 계급 투쟁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용어로서의 소외 뿐만 아니라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권리행사로부터 소외되는 정치적 용어로서의 소외가 있습니다. 이런 용어는 미국과 같은 다 민족 국가에서 정치가들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주로 쓰는 용어입니다. 그들은 소수민족을 언급할 때 소외된 소수민족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소외된 소수민족의 대변인처럼 말합니다. 또한 군중 속에서의 소외라는 말도 있고, 어떤 모임에서 소외시키는 '왕따'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소외된 인간은 외롭고 슬픕니다. 그러므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말은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소외보다도 훨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본질적인 소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적개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뿌리 깊은 민족적인 적개심을 비롯하여 인종간의 적개심, 계층간의 적개심, 부족간의 적개심, 신분간의 적개심, 영호남과 같은 지역간의 적개심, 개인간의 적개심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마음에 분노와 적개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적개심을 어떻게 물리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의 소외와 적개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첫째, 소외된 인류(11-12), 둘째,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13-18),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새로운 공동체(19-22)라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소외된 인류 (11-12)

 사도 바울은 과거 에베소 성도들의 상태가 하나님과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부터 이중적으로 소외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 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Therefore, remember)는 말씀은 과거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6월이 되면 북한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6.25를 기억하라"는 구호를 듣습니다. 또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를 상기시키기 위해 "일제 36년의 통치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 정부가 국민의 항전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슬로건은 "진주만을 기억하라"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왜 그들로 하여금 비참한 과거를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긋지긋한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비참한 상태를 기억하는 것은 자학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새롭게 깨닫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과거 내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함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과거 그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란 무지와 우상숭배의 대명사로서 그 이름에는 끝없는 수모와 비애가 숨어있었습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유대인과 같이 사람의 모양으로 지으신 것은 유대인들이 장차 그들을 종으로 부릴 때 불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무할례자란 이교도에 대한 경멸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므로 그들은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므로 그들은 죽음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1장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축복들이 열거되어 나오고, 2장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수 있는 축복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축복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시민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행 22:28). 우리 선교사님들은 시민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잘 압니다. 모스크바의 박다윗 선교사님은 레나 목자와 결혼하여 러시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자 문제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러시아인들이 누릴 수 있는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민권이 없는 선교사들은 체류 비자를 얻기 위해 매년마다 러시아를 떠났다가 재입국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것은 택한 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축복된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내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미래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면 삶의 의욕을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며 쾌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고전 15:32).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은 무신론자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미래가 없고, 방향과 목적이 없고, 되는대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비극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소망도 없고 인생의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이 표류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 소망이 넘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영국 UBF에서 온 Paul Ridge 목자가 인생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겉보기에는 변호사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부족함이 없이 보였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의 그의 삶은 방탕과 술취함과 거짓말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경공부에 초청할 때마다 "No thank you"라는 세 마디 말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인 이완 목자의 초청으로 마지못해 간 수양회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고 계속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겉으로는 "No thank you"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그 자체가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 (13-18)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과거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된 이중적 소외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있던 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 가까워져서 현재와 같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이중적 소외를 극복하고 하나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장벽을 일시에 허물고 절망적인 상황을 일시에 희망의 상황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역사적인 십자가의 사건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에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하나되는 역사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14-18절에는 하나되는 역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는 단순히 화평을 주시는 자, 혹은 화평케 하는 자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원문에 보면 화평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만이 홀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의미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참된 화평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중동 사태는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아랍 간에 중재를 잘 함으로써 유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중동 사태가 터짐으로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노벨 평화상은 우리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과 아랍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중재하였지만 성공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여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두 공동체 간의 뿌리깊은 적대감, 특히 유대인 편에서의 적대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연료로 삼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신다고 말하였다.... 심지어는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받을 때 그녀를 도와 주는 것도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들 사이의 장벽은 절대적이었다. 만일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하거나 또는 유대인 처녀가 이방인 청년과 결혼하면 그 유대인 청년 또는 처녀의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이방인과의 그러한 교제는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을 쳐다볼 수 있었지만 성전에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전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1.5m가량의 돌로 쌓은 장벽이 있고, 곳곳에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외국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같이 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적개심은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인종주의, 민족주의, 종족주의 그리고 오만과 편견과 질투와 미움과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 서로 간에 원한을 쌓고 분열과 분리의 담들을 쌓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개인이나 공동체의 한결같은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일로 서로간에 적개심을 갖고 분열합니까? 이러한 적개심은 법이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단번에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만이 적개심과 분열과 분리의 담들이 무너지고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용서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용서의 기도 앞에 녹아나지 아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만이 마음에 응어리진 분노와 적개심이 녹아나고 참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자기 육체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15a절 보십시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원수된 것'은 적개심을 뜻합니다. 이는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키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 율법은 도덕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의식상의 법(제사법에 관한 규정들), 식사에 관한 규례들, 사회 관계를 통제하였던 제의적인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정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열을 조장하고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한 새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15b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여기서 '한'(one), '새'(new), 그리고 '지어'(create)라는 말은 그 각각에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그룹만 있다는 것입니다. 한 성령에 의해 한 믿음으로 구속받아 이룩된 하나의 위대한 영적 가족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계급이 없는 모든 가족이 동등한 위치와 동등한 중요성을 소유한 새로운 인류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새'라는 뜻은 시간적인 의미에서만 새롭다는 뜻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다른 인류와도 비교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인류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그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종착역이 다릅니다. 비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와 부와 명예를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 종착역은 영원한 파멸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잘 압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비단옷을 입으며 날마다 연락을 즐겼지만 그 종착역은 영원토록 고통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로서 초라하게 살았지만 그 종착역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눅 16:19-25). '지어'라는 말은 '창조하다'는 말로 개조나 개선의 뜻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창조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신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의해 완전히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이 한 새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전혀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람을 말합니다. 이 새 사람은 기독교 공동체인 우주적 교회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분열시키는 모든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구별이 없습니다. 골로새서 3:10,11절은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제자들이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할 때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계 만민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를 하게 되면 인종, 국경, 신분 등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역사입니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또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그 어디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자 인간 상호 간에도 적대 관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와 인간 상호간의 적대관계, 즉 이중적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중적 적대감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해소될 수 없고,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할 때 마음에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롬 5:1). 하나님과 화평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과는 도저히 하나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17,1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실 뿐만 아니라 화목케 하는 직분까지 주셨음을 말해 줍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미움과 적대감으로 충만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적대감은 너무 그 뿌리가 깊어서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적대감은 복음을 영접할 때만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 후서 5:19절은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 믿는 자들은 적대감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18절 하반절은 우리가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일지라도 피 뿌림이 없이 나아갔다가는 당장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직접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19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새로운 공동체 (19-22)

 19-22절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언급한 사실을 기초로 우리가 어떤 자들이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우리는 과거 국적도 없고 시민권도 없는 하나님에게서 제외된 국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몰락합니다. 영원할 것 같은 로마도 몰락하였고,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영국도 해가 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건설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몰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하고 언제나 찬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을 지어가게 되었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를 하나님의 집에 비유할 때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 되시고 집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 3:11).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터를 견고히 딱은 자들이요, 신자들은 그 위에 쌓아 올린 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이자 다른 돌들과 연결되어 건물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퉁이 돌이 없으면 건물이 존재할 수 없으며 건물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만이 그 존재 가치가 있고 교회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기초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선포하고 가르친 그리스도의 교훈, 곧 신약 성경이 교회의 기초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로써 거대한 우주적 교회가 건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성전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처소입니다. 이 성전은 한정된 장소에 국한된 물리적인 건물이나 민족적인 신전이 아닙니다. 이 새로운 성전은 영적 건물이요 국제적인 공동체로서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설해 나가는 일군들입니다. 

 우리는 과거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기 때문에 미래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빚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맡기시고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하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위대한 역군들입니다. 우리가 만민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함으로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을 건설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