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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21

by Mark Yang   04/29/2022   Ephesians 3:1~21

Message


에베소서 제  6 강
                             
그리스도의 사랑

말씀 / 에베소서 3:14-21
요절 / 에베소서 3:17b,18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간절한 바램으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 상태는 그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에 따라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은 그 기도 내용이 자기 중심적인 데 반하여,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그 기도 내용이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행 13:2.3; 14:23; 16:13; 16:25; 20:36; 20:36; 22:17; 28:7-9). 

 에베소서에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드린 두 번의 기도가 나옵니다. 첫 번째 기도는 1:15-23절에 있는 기도이고, 두 번째 기도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첫 번째 기도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신령한 축복들에 대해 언급한 후 이를 깨닫도록 하는 영적 이해를 위한 기도라면, 두 번째 기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의 경륜을 설명한 후 이것이 에베소 성도들의 체험 가운데서 더욱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도록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영적 비밀을 설명한 후에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기도는 병행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기도는 말씀의 씨를 심고 이 씨가 싹을 내고 잘 자라도록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씨라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가르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양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부지런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참으로 깊고 넓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첫째, 기도의 자세 (14,15) 

 14,15절은 기도의 서언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차가운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의 자세는 보통 서서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는 특별한 간절함을 나타낼 때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죄를 참회할 때(에스라 9:5),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할 때(단 6:10),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눅 22:41), 스데반이 순교할 때(행 7:60)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 서서 할 수도 있고, 앉아서 할 수도 있고, 걸어가면서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누워서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윌리암 헨드릭슨은 "만일 우리가 흐트러진 자세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역겹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중국계 미국인이 영어성경을 가르친 후에 기도하는데 다리를 꼬고 손으로 코를 후비면서 기도하는 것을 우연히 눈을 떠서 보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저런 자세로 기도하는가 생각하고 역겹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기도답게 하려면 무릎을 꿇고 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렌스키는 몸의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몸의 자세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몸의 자세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굴복과 겸손한 간청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도하건 우리의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기도였습니다.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가 되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외에 간구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존재의미를 부여하신 분으로서 인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는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에게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둘째, 기도의 내용 (16-19)

 바울의 기도의 핵심적인 단어는 '강건', '내주', '사랑', '충만'입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며 (16). 16절을 보십시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바울은 먼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은 무진장한 자원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능력이 풍성하고 지혜가 풍성하며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영광의 풍성은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이 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능력은 한심할 정도로 부족하고 불충분합니다. 인간은 폭우나 지진과 같은 자연의 재해 앞에 무력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자라 할지라도 병에 걸리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이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은 무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당시 제자들은 자신 하나도 감당할 수 없는 무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을 때 그들은 권능을 받아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위대한 정복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속 사람'은 '겉 사람'을 전제로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이 있습니다. 겉 사람은 육체와 함께 육적인 본능, 욕구, 행위 등을 말하며, 속 사람은 영혼과 인격의 주체로서 본래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16, 6:19). 성령께서 믿는 자의 마음에 내주하신 때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 안에 속 사람이 창조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속 사람은 믿는 자의 마음에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잉태된 새로운 창조입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며 그의 법을 즐깁니다(롬 7:22). 이 속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이를 싫어하고 방해합니다. 겉 사람은 할 수 있는 대로 쉬기를 원하고 안일해지기를 원하고 편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겉 사람은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해도 나이가 들면 점점 쇠하여지고 낡아지다가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속 사람은 겉 사람이 후패되어 갈 때에도 매일 매일 새롭게 되어 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나 새롭게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속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신자들이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들의 속 사람이 계속 성령으로 강건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지상의 음식과 운동으로 단련되어야 강건해지는 것처럼, 속 사람도 신령한 하늘의 양식과 영적 훈련으로 단련되어야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적절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운동으로 단련하지 않으면 면역성이 떨어져서 질병에 쉽게 걸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속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경건 훈련을 통해서 속 사람을 강하게 단련하지 않는다면 사단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시험에 잘 들게 될 것입니다. 속 사람이 강한 사람은 어떤 환난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기도제목: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17a).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7a) '내주하다'는 헬라어 동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파로이케오'(paroikeo)라는 단어와 '카토이케오'(katoikeo)입니다. '파로이케오'는 나그네가 일시적으로 거하는 것을 말하고(2:19), '카토이케오'는 어느 곳에 항구적으로 정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일시적으로 거하는 손님이 아니라, 영구히 거하는 삶의 주인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실 때가 많습니다. 손님은 잠간 왔다가 곧 떠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잘 모시지만 손님이 염치없이 오래 머문다면 부담을 느끼고 대접도 소홀히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손님으로 일시적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으시고, 주인으로서 영구히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내 마음에 항상 거주하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본래의 자아, 즉 '영에 속한 자아'가 있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육에 속한 자아'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자아는 하나님 중심적인 자아요, 육에 속한 자아는 자기 중심적인 자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갈등이 항상 존재합니다. 믿음이 어린 자일수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자기 중심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할수록 자기 중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중심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중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 중심성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목숨을 얻으려면 자기 중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세 번째 기도제목: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17b-19a). 17b절에서 19a절까지는 사랑에 관한 기도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인류에게는 사랑이 가장 탁월한 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분리시키는 미움과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은 뿌리가 견실한 나무와 튼튼하게 건축된 집을 연상케 합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나무가 튼튼하고 가지를 많이 뻗칠수 있는 것처럼, 또 집의 기초가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집이 튼튼히 세워질 수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서 견고하고 튼튼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건물의 터가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해 주고, 건물을 받혀 줍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신앙생활을 받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그들의 삶을 뿌리내리게 하는 토양이 되어야 하고 , 그들의 삶을 세울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에서 "알다"는 단어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체험할 수는 있습니다. 또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는 것은 다른 성도들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지식을 혼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는 사랑을 실천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기를 기도합니다. '넓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범위를 말합니다. 그 범위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무한한 것입니다. '길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속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은 영원한 과거부터 영원한 미래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 좌우되지 않으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깊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겸손을 말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타락한 인간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깊습니다. '높이'는 신자들이 일으키심을 받은 지위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6절은 말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6). 우리는 죄의 깊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높이에 이르기까지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유대인들과 이방인들) 포함할 정도로 충분히 넓고, 영원토록 지속될만큼 충분히 길며, 가장 타락한 죄인에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깊으며(변화시킬 것만큼 깊고), 죄인을 하늘로 올릴 만큼에 충분히 높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분석하여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분석을 요하지 않고 그냥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신중하다보니 매사에 결단을 잘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칸트가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여인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때부터 칸트는 결혼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때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소." 사랑은 분석이 아니라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품고 인내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입니다. 보스톤의 지하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정신질환이 너무 심하여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며 사납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회복 불가능을 선언하고 독방에 수용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딸에게 미련을 갖지 않고 병원에 면회오는 일도 중단했습니다. 소녀는 온종일 독방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은퇴한 늙은 간호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소녀를 불쌍히 여기고 그녀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먹을 것을 주면 집어던졌고 말을 건네면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늙은 간호사는 6개월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결국 간호사의 지극한 사랑은 소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소녀는 마음 문을 열고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회복 불가능하게 보였던 정신질환이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소녀는 정신질환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봉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은 헬렌켈러를 세계적인 인물로 교육시킨 앤 설리번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헬렌켈러에게 희망을 품고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세계적인 인물로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희망을 품고 관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을 보지 않고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프랭크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참 잘 나가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아내 엘레나에게 "이래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레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지 언제 당신 다리를 사랑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로 인해 그는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12년 후인 51세 때 제 3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대공황으로 인해 절망과 두려움으로 마비되어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 넣어 미국을 살렸습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 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 문둥병자, 고창병자 등 각종 병자들을 섬기셨고, 세리,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각종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개성이 강한 제자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약점을 감당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네 번째 기도제목: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되도록. 19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충만'은 에베소서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1: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4:10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4:13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5:18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골로새서 2:9,10절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합당하게 살만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항상 차고 넘치는 풍성한 부요를 비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주시고 믿음으로 마음대로 쓰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1억원이고 100억원이고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려워서 이를 믿음으로 쓰지 못하는 것이요, 또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쓰고자 잘못 쓰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2-14).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 온 자에게 그 믿음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막 5:34).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52). 예수님이 고향에 가셔서 능력을 행하고자 하셨으나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습니다(마 13:58).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이를 제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 부딪힐 때 과연 될 것인가 반신반의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 도전함으로써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의 찬가 (20-21)

 바울은 20,21절에서 찬가로 기도를 끝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아무리 이루기가 어렵고 힘든 부탁이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못할 일이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간청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울의 기도는 "아멘!"으로 끝맺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에 대해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서 조그만 것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임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모임으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