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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8-요한복음 9:1-41(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8 강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9:1-41
요절: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을 이겨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운명주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후에 제자들은 빛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운명주의를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소경은 예수님께로부터 빛을 받고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의 아름다운 빛을 증거하는 작은 빛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한 분 한 분이 예수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어두운 이 시대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1-5)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는 헌 누더기 옷을 입고 거적때기 위에 앉아 하모니카로 그의 주제곡인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를 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소경에게 자비를!”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소경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갓난 아기들은 성장함에 따라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방긋 방긋 웃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낳고 키워준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므로 눈이 어두우면 모든 것이 어둡게 됩니다. 그에게는 빛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는 어두움의 세계 속에 갇혀 절망적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는 소경에다가 거지였습니다. 그는 구걸을 하지 않으면 구차한 생명조차도 유지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온통 슬픈 운명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천대로 인해 저주스런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소경은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하며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며 슬픈 눈물만 하염없이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소경의 모습은 빛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없는 인간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어두움의 세력에 갇혀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 갑니다.

소경 거지를 본 제자들은 깊은 감상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소경을 도와주고 싶었으나 동전 몇 닢을 던져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이런 불쌍한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는 운명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심각해지고 심령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소경거지에게서 가난하고 초라한 자신들의 모습을 연상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로마 제국의 말발굽 아래서 착취 당하는 약소민족 이스라엘의 슬픈 처지를 연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는지? 왜 이렇게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 심각한 신학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 이 질문은 인간 불행의 원인이 죄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소경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실수요,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원인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이는 대답하기도 힘들 뿐더러 답을 알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모든 일의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인과응보적인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인간의 죄가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저주와 고통과 질병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꼭 죄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이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사단의 시기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는 고난을 통해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욥은 이를 깨닫고 극심한 고통 중에서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운명적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제자들은 운명주의로 인해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은 소경을 인간편에서 보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편에서 보셨습니다. 인간편에서 보면 슬프고 운명적이고 어둡고 부정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편에서 보면 고통에도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밝고 긍정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기초로 해서 보면 인간에게 절망적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하신 뜻과 목적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운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운명이 변하여 섭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 조건이나 환경이 사람을 비참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인간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Fanny J. crosby는 여덟 달 되던 해에 송곳에 찔려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절망적이 되고 한없이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운명이 변하여 섭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눈을 뜨고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보게 되어 빛과 생명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9000여편에 달하는 신령한 찬송가를 작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신의 눈을 감기게 하신 것은 추한 세상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신 깊은 뜻이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인 안요한 목사님은 1939년 10월 어느 날 이제 막 회심한 안진삼씨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가문 좋고 재산이 많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성격이 호방하고 오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흥집회에 참석한 후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요한을 낳은 후 가산의 대부분을 평양 신학교에 헌납하고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째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삼고자 이름을 안요한이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가난한 목회 생활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군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제대 후에는 미 8군 사령부에서 한국어 교관 겸 불어 강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70년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의 군사 도시 몬테리의 한국어 교관으로 선발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눈부신 장래가 약속되었습니다. 그는 출국을 앞두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떠나고 모든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서 여호수아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비로소 영혼의 눈을 뜨고 밝고 환한 생명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사명을 찾던 중 서울역에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복음의 빛을 증거하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미국 헬렌켈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불가능한 가운데서 교회를 세우고 지금은 새빛 교회에서 영적으로 눈먼 자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빛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과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유의 눈, 느끼고 직관하는 영혼의 눈이 있다고 했습니다. 영혼의 눈이란 절대자를 보고 만날 수 있는 눈이요, 구원을 얻는 눈입니다. 그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육신의 눈이 먼 것을 슬프하거나 괴로와 하지 않고,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인해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빛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운명이나 절망이 없고 섭리와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제자들은 운명주의에 빠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must"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운명적인 생각을 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파멸해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때가 아직 낮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낮’은 생명이 있는 때를 의미하고 ‘밤’은 죽음을 또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 9: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니라.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일하는 데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낮에 열심히 일해야 밤에 편히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낮에 헛 생각하며 빈둥빈둥 놀다가 밤에 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피곤하여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람들은 젊어서는 놀고 늙어서 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젊어서 일하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도 일할 수 없습니다. 늙으면 쉬 피곤을 느끼고 기력이 쇠하여져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우리는 낮에 특히 젊을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젊을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행복의 기초를 놓는 자로서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깁니다. 그러나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곧 떨어지고 맙니다. 일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밤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수 없는 인생의 밤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행착오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수 있는 낮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근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지만 내 속에 강하게 역사하는 어두움의 세력 때문에 주저 앉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애매한 체질 탓을 합니다. 이는 체질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강하게 역사하는 어두움의 세력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내 속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힘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Ⅱ. 침과 진흙으로 일하신 예수님(6,7)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체적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 한마디로 소경을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침과 진흙을 이겨 이상한 방법으로 고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운명적인 요소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고자 하셨으나 거기에는 수술 도구도 없었고 기증한 안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한 움큼 떼었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기기 위해 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침 가뭄 때라 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대신 침을 뱉았습니다. 한번으로 안되어 여러 번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반죽하여 수제비 떼듯이 한쪽씩 떼어서 소경의 눈에 척! 척! 바르셨습니다. 소경의 눈은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눈이 있어야 보기에 괜찮습니다. 그런데 진흙을 바름으로 그의 얼굴은 호박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엉뚱합니다. 비위생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매너도 없고 기교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저돌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운명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일할 도구가 없다고 해서 또 일할 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심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위에서 일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으시고 있는 것으로 일하셨습니다. 진흙과 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자 할 때 일할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spirit이 문제요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일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이 산 믿음을 배우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의 진흙과 기도의 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운명을 극복하고 이 시대에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1대1로 기도의 침을 뱉고 말씀의 진흙을 이겨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에 바를 때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사 눈을 뜨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소경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소경은 대개 감수성이 예민하여 자의식이 많고 또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런데 소경은 예수님이 침 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를 때 자존심이 상하여 반발하기 쉬웠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능력을 불신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소경은 믿음으로 자의식과 자존심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이 밝히 떠졌습니다. 와! 그는 처음으로 밝고 환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우람한 바위를 보았습니다. 높고 파아란 하늘을 보았습니다. 실로암 못에 비췬 잘 생긴 자기 얼굴도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도 밝고 환해졌습니다. 어둡고 운명적인 모든 요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에 생명의 빛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운명은 치료되고 그는 이제 빛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Ⅲ. 한 가지 아는 것(8-41)

소경이 눈을 뜨고 미남이 되어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경이 눈을 뜨는 놀라운 역사를 보고 마땅히 잔치를 벌이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들은 소경 되었던 자를 가운데 두고 그 사람이라 혹은 아니라 혹은 그와 비슷하다 하며 논란을 벌였습니다. 이때 그는 “내가 그로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 심술궂게도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을 고쳤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권위주의와 율법주의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던 자는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고백했습니다(17). 그들은 이제 그의 부모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출교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두려움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를 소환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24). 그들은 공권력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회의와 불신과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그는 눈은 떴지만 공권력에 의한 압력 때문에 두려움에 잡혀 예수님을 부인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세가 어떠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또 많은 말씀도 몰랐습니다. 그가 단지 아는 것은 과거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아는 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핍박과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을 비추이는 빛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진실을 말살하려 하였으나 소경은 이런 그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화가 나서 소경을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는 고독하게 되었고 좌절과 실의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또 구걸할 수 있는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동정하기보다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믿음이 있을 때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1서5:4,5). 그는 “주여 믿나이다” 신앙 고백을 하며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눈을 뜨고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슬픈 운명에 우는 비참한 소경거지가 아니라 빛나는 하늘나라의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아집으로 인해 영적 눈이 먼 소경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이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는 어둡고 운명적인 요소가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운명을 극복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