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 9 강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 / 에베소서 5:1-21
요절 /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오늘 본문은 4:17-32절에 이어 계속되는 말씀으로서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인 성도가 실천해야 할 새로운 생활 표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사랑과 빛과 지혜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는 모두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 4:8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고, 요한 일서 1: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잠언 8장은 지혜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지혜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를 본받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성도가 실천해야 할 새로운 생활 표준으로서 첫째,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1,2). 둘째,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3-14). 셋째,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15-21)는 제목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1,2)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러므로'는 4:32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라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 도덕률과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일반적인 윤리는 '나와 너'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나와 너' 이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나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동일하게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나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죄를 심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악된 인간들을 오래 참으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는 철저히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극진히 사랑하시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아무 값없이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난 사람을 보면 구김살이 없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잘 베풀 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성격이 비뚤어져서 파괴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자녀는 당연히 그 부모를 본받는 것과 같이, 우리는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와! 나같이 부족하고 엉터리 같은 자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니 이는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줄 알면서 우리를 괴롭히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한 수준에까지 끌어 올리고자 하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명목상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을 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동의 표준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5; 벧전 1:16)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선배라 할지라도 인간이기에 온전할 수가 없고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앙선배를 본받고자 애쓰다 보면 실망치 아니할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본받아야 할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구약 시대에는 인간들의 죄를 위해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의 피를 번제단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내장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 등 모든 것은 제단 위에서 태웠습니다. 향기로운 제물은 화제를 말하는데 이는 자의(自意)로 드리는 제사로서 곡식제물을 불태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레 2:9).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스스로 그 몸을 바쳐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평화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의 기쁨을 위해 슬픔을 당하셨습니다(사 53:4-6). 그리스도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신분, 권세, 영광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요일 3:16).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처럼, 성도들의 희생적인 삶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와 마음씀, 바쁜 가운데서 드리는 시간과 없는 가운데서 드리는 물질 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기까지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II.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3-14)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성도들이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이유를 말한 후에 3,4절에서는 생활 속에서 제거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열거합니다. 그리고 5-7절에서는 심판의 필연성을 말함으로써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 8-14절에서는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빛의 자녀로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첫째,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제거해야 할 요소들 (3-4). 3,4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런 것들에 관해 입으로 언급해서도 안되지만 마음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의 수호신인 헬라 여신 아데미(라틴명은 Diana)는 풍요의 여신이었는데 이를 숭배하는데는 보통 성적 향연이 수반되었습니다. 그래서 음행은 그 사회에 하나의 문화로서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는 음담패설로 가득찼으며,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죄악시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해 로마 사회는 도덕적으로 매우 부패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성도덕이 매우 문란하여 신뢰할 수 있는 처녀를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신뢰할 수 있는 처녀를 아내 및 며느리로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여성들만이 몸과 마음이 순결하여 신뢰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상류 사회에 파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가 기독교화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대신에 돌이켜 감사의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은 대화에서조차도 값싸고 품위 없는 형태의 농담이나 경박한 말을 해서는 안되고 대신에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사에 말 조심 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언어는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 쌍스러운 언어를 쓰게 되면 그 인격이 손상을 입게 되고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됩니다. 부도덕한 언어는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인데 반하여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겉으로는 고리타분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과연 그리스도인 답구나" 하며 깊이 인정하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됩니다.
둘째, 심판의 필연성 (5-7). 그리스도인들이 불의를 삼가야 할 이유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대부분의 부도덕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는 자신의 부도덕한 짓에 대한 벌을 면하게 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드러나 정죄함을 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0절에서 엄숙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5절에서 우리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적용할 경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한 두번의 부도덕한 생각이나 언어 또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식의 가르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믿는 자들도 연약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죄하는 자는 곧 이를 부끄러워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의한 자는 상습적으로 불의를 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회개가 없이 그릇된 생활양식에 자신을 내 맡기는 자를 가리킵니다.
탐하는 자를 왜 우상 숭배자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그러므로 재물을 탐하는 자는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에 우상숭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탐하는 우상숭배자는 지혜로운 자 같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 한 폭판에서 기관 고장을 일으켰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랐고, 건장한 남자들은 옷을 모두 벗어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자가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 들었으나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머니에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훔친 보석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익사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 1:15).
6절에서 바울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몸으로 지은 죄는 영혼에 아무런 해악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몸으로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와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종국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만인 구원설은 거짓된 사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헛된 말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여기서 임한다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사람들이 불의를 행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계속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우며 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자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들과 접촉을 금하거나 교제를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신자들은 속세를 떠나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현실도피주의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불신자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들입니다. 만일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기회도 없고 그들을 악한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참예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쉼메토코스'인데 이는 단순히 사귄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일에 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불의한 자들과 깊은 교제 관계에 있지 말고 특히 불의한 일에 협동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악행에 가담할 경우 그들이 처하게 될 운명에도 동참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요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입니다.
셋째, 빛의 자녀들 (8-14). 사도 바울은 이제 적극적으로 성도들이 빛의 자녀로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과거 그들은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과거 그들이 어두움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빛 안에 있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과거 그들은 어두움 자체이었지만 이제는 빛 자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로 신분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빛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무지와 악을 상징합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태어났으니까 살고,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니까 나도 살아갑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인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사는 날 동안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쾌락을 추구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정죄받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런 몹쓸년, 죽어 마땅한 년" 하며 의로운 심정으로 충만하여 저마다 손에 짱돌을 들고 여인에게 던질 찰라에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여인을 사람들의 정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여인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빛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이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1,12).
바울은 9절에서 우리가 빛된 생활을 하게 될 때 맺게 되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이란 악에 대비하여 선을 말하고,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행위를 말하며, 진실함이란 거짓과 이중 마음이 없는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뜻합니다. 빛의 자녀는 선을 행하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고자 애를 쓰며, 순수하고 정직하게 살고자 애를 씁니다.
10절은 빛의 자녀들이 힘써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 여기서 '시험하다'(헬라어로 '도키마조')는 말은 금속의 질을 판명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실험을 통해서 무엇을 '입증하다(prove), 규명하다, 분별하다'는 뜻입니다. 빛의 자녀는 늘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성에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명성에는 예민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것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자신의 빛된 생활로 인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쓰다 보면 자연히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그 열매로 맺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하라'는 것은 빛된 생활로 악한 행위를 드러내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이길 수 있고, 미움은 사랑으로만이 이길 수 있듯이, 어두움의 일은 빛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은 5절에 열거된 것으로서 열매가 없습니다. 비생산적입니다. 겉으로는 멋있고 화려한 것 같지만 인생을 결산해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어두움의 일은 죄의 쾌락으로 인해 그 순간은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항상 허무와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낳아 고통하게 합니다. 어두움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울만큼 죄악된 것으로서 은밀히 행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12).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들은 어두움의 일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어두움의 일에 참예해서는 안됩니다. "참예하지 말라"는 것은 어두움의 일에 행하는 자들과 사귐을 가짐으로써 이를 용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소극적으로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책망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두움의 일을 진리의 빛 앞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의 죄와 씨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이를 방관하게 되면 어두움의 일에 동조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양들이 진리의 말씀 앞에 진실되게 회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양들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는 것마다 빛이라고 하였습니다(13). 우리가 양들의 죄와 타협하지 않고 말씀 앞에 진실되게 회개하도록 도울 때 그들이 자신들의 악을 깨닫고 빛으로 나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새로운 빛이 탄생하게 됩니다. 14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14). (원문에는 "깨어라"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고 대문자로 되어 있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잠자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빛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죄 가운데서 잠자고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로마서 13장 말씀으로 그의 영혼에 비추었을 때 그는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인류에게 빛을 비추이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
III.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하라 (15-21)
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일반적으로 지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는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때문에 실천적인 지혜입니다. 행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에는 언제나 주의함이 요구됩니다. 사람들은 공부, 직업, 결혼, 친구 선택, 시간 이용, 책 읽기, 취미, 의복, 용모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주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자세히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자들은 넓고 쉬운 길을 택하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좁고 힘들지만 올바른 길을 택합니다(마 7:13,14). 지혜 없는 자들은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지만 지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합니다(잠 3:6).
첫째로, 지혜있는 자는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 '아끼다'는 말은 헬라어로 '엑사고라조'로서 '매점하다, 즉 속량하다. 기회를 이용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시간이 매우 값진 상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한시간은 60분이며,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그것을 최대한으로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주어진 인생을 허비하는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단 한순간의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매일 얼마의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따로 떼어 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지혜를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34-5년에 있었던 미국 제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였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20번째 생일 바로 직전에 지은 "결심"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내 힘껏 가장 유익되게 시간을 이용할 것을 겸심하노라."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저마다 바쁘다고 말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성경공부할 시간도 없고, 기도할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쁜 가운데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쁘다. 따라서 나는 더욱 더 기도해야만 하겠다." 오늘날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21세기 사단은 인터넷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시간을 활용하여 성경공부하고 학과 공부하고 책 읽고 운동함으로써 영육간에 실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둘째로, 지혜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어리석은 자는 자기 뜻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참 지혜는 하나님의 뜻 아래서만 발견되어질 수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인 뜻과 구체적인 뜻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6-18).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특수한 뜻은 주의 깊게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우리보다 경험이 많고 성숙한 신앙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로, 지혜있는 자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에 힘씁니다 (18-21). 18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왜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을 대조해서 말했을까요? 이는 술취함과 성령 충만함 사이에는 어떤 유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취한 사람은 술기운으로 무엇을 하려 들 듯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무엇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수스(로마 신화에서는 박카스)를 섬기는 이방인의 종교의식에서는 술취하는 것은 신의 감화를 받게 되는 하나의 방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외과의사로서 목회자가 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술과 성령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술(알콜)은 억제제로 분류되어 있다. 술은 무엇보다도 두뇌에 있는 모든 것의 최중심부를 억제한다. 이들은 각 사람에게 자제력, 지혜, 이해력, 분별력, 판단력, 몸의 균형, 사물에 대한 평가력을 제공해 주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그러나 성령은 정반대의 일을 한다. 성령은 활성제의 역할을 한다. 성령은 정신과 지성, 마음, 의지 등 모든 것을 활성화한다." 술취한 사람은 이성을 잃고 감각이 없어져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게 되고 갈짓자 걸음을 걷게 됩니다(잠언 23:29-35). 술취함의 결과는 난폭하고 방탕하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짐승 같거나 짐승보다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듭니다. 이해력과 분별력과 자제력이 더욱 뛰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더 많이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국면을 무엇이든지 열 수 있는 마스터 키를 성령께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성령의 영향력 아래 굴복시킴으로 성령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 행사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19-21절은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①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19a): 술 취한 상태는 무질서와 방탕한 태도를 나타내지만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찬미와 감사와 상호 복종의 태도를 갖게 합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② 성령 충만하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게 됩니다 (19b). 여기서 노래는 서로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향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음치들에게도 위안을 줍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도 그들로부터 마음의 노래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개척하다가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노래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③ 성령 충만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20). 20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불평하는 마음은 성령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은 말합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특히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매사를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포도를 먹으면서 한 사람은 "그 포도 참 맛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포도에 씨앗이 있어 귀찮다"고 말합니다. 같은 장미를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참 장미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장미는 가시가 많아"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감사가 있는 사람은 매사를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역경 가운데서도 은총의 꽃을 피웁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83세 때 안질환으로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들 브람웰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그러자 부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두 눈을 가진 상태에서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끝났다. 이제부터는 두 눈이 없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
1948년 여수 사건 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이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이 찾으신 열가지 감사제목은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축복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들이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여덟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④ 성령 충만하면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사람이 공격성이 강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반발적이라면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자의 특징은 겸손하며(성령은 겸손의 영) 온유하며 피차 복종하는 순종심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이것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단없이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은 단 한번이지만 성령 충만은 매순간 계속해서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치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골로새서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말씀을 충만히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지혜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를 본받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하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하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를 충만히 허락해 주셔서 성령 충만, 감사 충만, 은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