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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4

by Mark Yang   04/29/2022   Ephesians 6:10~24

Message


에베소서 제 12 강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

말씀 / 에베소서 6:10-24
요절 / 에베소서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사도 바울은 이때까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인류, 즉 모든 믿는 자들의 신앙 공동체인 우주적 교회를 창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1-3장).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행해야 할 새로운 생활표준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4:1-6:9). 이제 바울은 본 서신을 끝내고자 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하는 원수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배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대로 평화 뒤에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는 악의에 찬 세력이 있고, 건강 뒤에는 질병이 위협하고 있듯이, 이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장엄한 역사 이면에는 이를 필사적으로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 되게 하셨는데, 마귀는 이를 하나 되지 못하도록 회의와 불신을 심고 분열을 조장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아무 문제없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평안하게 지내고 모든 것이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외적 내적으로 끊임없이 문제는 발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마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다만 마귀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어떻게 이 마귀의 궤계를 파할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것과 영적으로 무장할 것을 권면합니다. 知彼知己 百戰百勝(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울 때마다 이긴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투에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만일 영적 전투에서 적을 과소평가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영적 무기도 없이 비무장 상태로 싸운다면 우리는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매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전투의 성격 (10-12)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전투의 성격에 대해서 말합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여기서 '종말'은 '남은 때'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강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전투에서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 상태에 있었을 때에는 미국과 소련은 서로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적개심을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은 싸워야 할 대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사히는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원수는 인간이나 국가가 아니라 마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마귀의 존재를 신화적, 미신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에서 마귀는 무슨 마귀냐" 하며 일축해 버립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정령숭배가 널리 퍼져 있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떤 영이 그들의 삶의 구석 구석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격적인 존재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와 그 추종 세력들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를 개척할 때 있었던 유대 마술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2년동안 줄기차게 말씀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능력을 행하게 하심으로 병자들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귀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썩 물러가라." 그러자 악귀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들에게 뛰어 올라 억제하여 그들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은 오만어치나 되는 마술 책을 모아다가 불사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19:10-20). 이처럼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어떤 사상이나 구조나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세력, 곧 악마의 거대한 계급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구조, 전통, 제도 등을 통해 역사하지만 구조나 제도 자체가 마귀는 아닙니다.  

 악의 세력은 세가지 주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12절에서 '정사와 권세'(the rulers, the authorities),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the powers of this dark world),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이런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그 힘이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사단(마귀)의 머리가 부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남은 힘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자 이를 시기한 종교지도자들이 "저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막 3:22-27).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단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을만큼 강하다는 것과 또 예수님은 강한 사단을 결박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사실 사단은 계시록 12:3절에 보면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강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머리가 하나이고 뿔은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가 아무리 좋고 지혜가 출중한다한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마귀의 지혜를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튼튼한 근육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열 개의 뿔을 가지고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사단의 힘을 당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단의 특징은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힘이나 권세는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힘이나 권세를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독재자와 같이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마귀는 권세와 힘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파괴적으로 사용합니다.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마귀와 그 추종 세력들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로서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 활동영역은 하늘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전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마귀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아무런 도덕적인 원칙도 없고, 예의범절도 없고, 고상한 감정도 없으며, 악의에 찬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비양심적이고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셋째로, 그들은 교활합니다. 11절에서 '궤계'는 4:14절에 나오는 '간사한 유혹'과 같은 말입니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들어옵니다. 흉악한 이리지만 순한 양으로 가장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합니다(행 20:29).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타협하도록 하기도 하고, 속고 속이도록 하기도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마귀의 궤계 중에서 가장 간사한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믿게 할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마귀의 실체를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모든 것을 심리학적 현상으로 보는 것은 고도의 마귀의 술책입니다. 

 이처럼 힘이 강하고 사악하고 교활한 사단을 우리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마귀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를 믿지 않거나 과소 평가하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마귀의 힘과 사악함과 교활함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해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강하지만 하나님은 더 강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에베소서 1:20절에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강건하여지고"는 현재 수동태로서 끊임없이 덧입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영적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행복을 파괴하고 우리의 삶을 패배로 이끕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의 원수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사람이나 제도가 아니라 마귀라는 것을 인식하면 영적 전투에서 전술이 달라지고 투쟁 방향이 달라지게 됩니다. 인간갈등과 같은 불필요하고 무익하고 소모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써 사단과의 영적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II. 하나님의 전신갑주 (13-20)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마귀를 능히 대적하고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3).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했을까요? 이는 우리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공급해 주시는(Made in God)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대항해서 싸워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전신갑주는 '중무장한 병사의 완전한 몸차림'을 말합니다. 군인은 전시에는 전신갑주를 벗지 않고 입은 채로 걷고 일하며 잠을 잡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병사는 전신갑주를 입고 잠시도 적에 대한 경계심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병사가 갖추어야 할 여섯가지 중요한 장비, 즉 허리띠, 흉배, 신, 방패, 투구와 검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을 각기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갖추어야 할 진리, 의, 평안의 복음, 믿음, 구원 및 하나님의 말씀의 모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군병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도중에 수많은 군병들을 만났으며, 또 현재도 로마 감옥에서 손에 사슬이 묶인 채 무장한 로마 병사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진리의 허리띠 (14a):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14a) 로마 병사의 띠는 보통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허리띠는 속옷을 단단히 동이고 아울러 검을 붙들어 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진할 때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자신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것은 내핍 생활을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어떤 행동을 준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할 때나 긴장을 풀 때 허리띠를 풉니다. 그러다가 일을 시작하거나 긴장하게 되면 허리띠를 졸라맵니다. 

 왜 진리의 허리띠라고 하였을까요? 진리의 허리띠는 마귀의 거짓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키며, 또한 마음의 진실성을 가리킵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44절에서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음모와 책략에 능수능란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음모와 책략을 물리치려면 진리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과 정직과 진실함입니다. 

(2) 의의 흉배 (14b): "의의 흉배를 붙이고" 존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흉배는 한쪽에만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기독도가 아폴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무시무시한 악마가 자기를 대적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해야 할 것인가? 맞서서 싸워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등뒤에는 갑주가 없음을 깨닫고 만일 도망하여 등을 돌리게 되면 마귀에게 창으로 찔리기 때문에 마귀와 싸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두려움으로 인해 적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되며, 용감히 적과 맞서서 싸울 때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믿음으로 대적하면 피하게 됩니다(약 4:7). 이런 설명은 영적 교훈에는 도움이 되지만 본문을 정확히 해석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군인의 흉배는 몸의 앞부분 뿐만 아니라 뒷부분도 보호할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의의 흉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의는 칭의,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자신의 의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때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란 이름은 "참소하는 자", "비방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위선자다. 네가 무슨 목자(선교사)냐?" 이러한 마귀의 참소를 받게 되면 불의에 빠지게 되고 "그래 나는 죄인이야. 나 같은 놈은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없어. 나는 죽어야 해" 하며 자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의 흉배는 이러한 마귀의 참소를 막아줍니다. 로마서 8: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그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친히 담당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정죄치 않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감히 나를 정죄할 수 있으랴?" 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a). 의의 흉배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굳건한 보장이 됩니다. 

 진리가 두가지 의미가 가능하듯이, 의(義) 또한 두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의도 포함됩니다. 핀드리는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와 의롭다 함을 입은 후의 삶에 속하는 성결한 품성이 서로 잘 짜여져서 뚫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갑옷을 이룬다"라고 하였습니다.  

(3) 복음의 신 (15): 15절을 보십시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군인에게 있어서 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짚신을 신거나 높은 구두를 신는다면 제대로 싸우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군화를 신으면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거칠 것이 없이 자신있게 다닐 수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신은 가죽 제품이며 무좀을 방지하기 위해 발가락 부분은 드러내고 바닥에는 무거운 징을 박았으며, 발목과 정강이 부분에는 장식용 끈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긴 행군과 견고한 자세를 위해 필요한 장비였으며, 동작하는데 편리하고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막아주었습니다. 로마군의 승리는 그 신에 힘입음 바 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병이 신는 신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평화의 복음으로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질 때 자신과의 평화, 이웃과의 평화, 더 나아가 피조물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된다면 악과 싸울 수 있는 견고한 발판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군사는 항상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롬 10:14,15). 마귀는 복음을 두려워하여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이모저모로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 1:16). 

(5) 믿음의 방패 (16):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모든 것 위에'라는 말은 모든 무기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위에 언급한 '모든 무기와 함께' 라는 뜻입니다. 방패는 몸의 특정 부분만을 위한 병기가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무기와 함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군인의 방패는 몸의 전신을 가릴 수 있는 긴 장방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길이 1.2m x 0.77m 두 겹의 나무를 함께 붙여서 처음에는 천으로 감고 다음에는 가죽으로 덮었고 위와 아래 쪽에는 철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에 사용되던 위험한 화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송진을 발라서 불을 붙인 후 사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냥 화살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불화살은 주위를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은 우리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불순종과 배반과 탐욕과 악의와 두려움 등을 심는 것을 말합니다. 의심의 불화살, 불신의 불화살이 우리 마음에 꽂히게 되면 잔잔하던 우리의 마음에 파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온갖 의심과 불신이 평온하던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게 됩니다. 또한 절망의 불화살이 마음에 꽂히면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정욕의 불화살이 마음에 꽂히게 되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저격수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정조준하여 총을 쏩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보이지 않는데서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여 여기저기서 불화살을 쏘아대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날은 사단이 인터넷을 통해서 의심과 불신의 불화살, 음란의 불화살을 무차별하게 쏘아댑니다. 인터넷은 편리한 문명의 도구이지만 사단이 이를 이용할 때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파괴하는 무서운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꼭 필요한 정보만 얻고, 우리에게 회의와 불신을 심는 것은 과감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클릭했다가는 사단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불화살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의 방패를 들고 사단이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야 합니다. 좀 피곤하다고 해서 잠시라도 믿음의 방패를 내려놓게 되면 순식간에 사단에게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 능히 악한 자의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셔서 모든 불화살들을 다 막아 주십니다. 잠언 30: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막강한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파한 후에 그들이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다윗이 수많은 전쟁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시 28:7).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믿음의 방패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개인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개인신앙이 약한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배들과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면 그들을 의지하는 마음 때문에 개인신앙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 곧 나의 하나님을 믿는 개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사단이 시시때때로 쏘아대는 불화살을 능히 소멸시키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6) 구원의 투구 (17a): 로마 군사의 투구는 청동이나 철과 같은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끼나 망치로 내려치지 않는 한 이를 꿰뚫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챨스 하지(Charles Hodg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보호해 주고, 그로 하여금 확신과 기쁨으로 머리를 들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7) 성령의 검 (17b): 17b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검은 유일하게 공격용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마귀와 투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양면적인 역할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제공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영혼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무기가 됩니다. 히브리서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기 위해서는 열심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칼이 무디고 녹슬면 원수를 단칼에 베어 쓰러뜨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칼날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날카롭게 칼날을 세워 놓으면 단칼에 원수를 베어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에 힘씀으로써 칼날을 날카롭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자 투쟁할 때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둘 때 범죄치 않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8) 기도의 중요성 (18-20): 바울은 지금까지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갖추어야 할 여섯가지 전신갑주를 열거한 후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자기중심적인 데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으로 포괄적이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또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규칙적이면서 끊이지 않고 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는 것은 방심하지 말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또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기도가 필요한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바클레이는 바울이 기도에 대해서 세가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기도는 끊임없이 해야 하며, 둘째, 기도는 열심히 해야 하며, 셋째, 기도는 사욕을 품지 말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해방되도록 기도 부탁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 부탁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것보다도 복음이 자유롭고 구애됨이 없이 전파되기를 원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이 약하여 악한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로 영적 싸움을 싸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과 기도로 투쟁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배웁니다. 

 21-24절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여기에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에베소 교회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기고를 그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형편을 자세히 알리고 또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두기고가 곁에 있는 것이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기보다 에베소 성도들을 더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평안과 믿음, 사랑과 은혜의 사중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하면서 본 서신을 시작했는데(1:2), 은혜와 평안이 계속해서 넘쳐나기를 소원하면서 본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마귀와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영적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영적 전투에는 일시적인 휴전이나 정전이 없습니다. 영적 싸움을 잘 싸우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매일 매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