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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1-14

by Mark Yang   04/29/2022   Galatians 3:1~14

Message


제 3 강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그리스도

말씀 / 갈라디아서 3:1-14

요절 /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3-4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믿음과 율법의 행위 (3:1-14), 약속과 율법 (3:15-22), 자녀와 종 (3:23-4:31)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직접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빠져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함으로써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영적 소원이 생겨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으로 하기 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율법을 만들어 이를 지키고자 애를 씁니다. 이를 잘 지키면 자기 의가 생겨 교만해지고 반면 이를 못 지키면 정죄의식에 빠져 괴로워하게 됩니다. 자연히 신앙생활에 은혜가 사라지고 율법적이 되어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나를 얽어매는 사슬과 같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항상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들은 겸손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들의 말과 행동에는 은혜가 넘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삶은 축복된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음’, ‘율법의 저주’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축복’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결과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고,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던 것과 동일하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1-9)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해 변호한 후 이제 갈라디아인들의 불신앙에로 화제를 돌립니다. 3:1절은 강한 질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말은 ‘오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이여’라는 뜻으로 매우 강한 어조입니다. 성경의 의미를 쉽게 풀이해 놓은 Amplified Bible에 보면 “O YOU poor and silly and thoughtless and unreflecting and senseless Galatians!”(오 너희들, 모자라고, 어리석고, 생각이 없고, 무분별하고, 무감각한 갈라디아인들이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에서 벗어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영적 반역으로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이렇게 심하게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은 파멸해 가는 그들의 영혼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상한 목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망은 그들을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불타는 목자의 심정에서 나온 사랑의 책망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 진리를 떠난 것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질책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인생을 깊이 생각해 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의미 있는 삶이며, 복된 삶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밤을 새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복음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지혜롭고 현명하고 가치 있고 복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질문함으로써 그들이 복음 진리를 떠나게 된 이면에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꾀다’라는 단어는 마법사가 마술을 걸어 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거짓 선생들의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의 정체를 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영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로서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습니다 (요 8:44).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는 능숙한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 진리에서 벗어나 타락하게 한 이래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벗어나 욕심을 좇아 거짓된 삶을 살도록 온갖 감언이설로 꾀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이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변절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들 눈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밝히 보이다’(프로그라포, προγάφω)는 단어는 ‘밝히 들어내 보이다, 공개적으로 선포하다, 계시하다’의 뜻입니다. 오늘날은 어떤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매체로서 TV나 신문이나 라디오나 인터넷과 같이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과거에는 공개적으로 알리는 게시판에 칙령이나 법령 또는 공고문을 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게시판에 공고된 것과 같이 전 인류에게 공개된 사건임을 말해 줍니다.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ἐσταυρωμένος) 것은 완료분사수동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이 역동적으로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 19:30)고 하신 말씀은 완료 수동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을 치루신 사건은 단번에 (once for all) 드리신 사건으로써 더 이상의 제물이 필요 없고 그 효과는 현재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됨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 1세기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서 생생하게 증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이 갈라디아인들의 눈 앞에 생생하게 재현되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사건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적인 사건으로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에게든지 생생하게 사죄의 은혜가 임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벗어나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이나 여름 수양회 때 십자가 말씀을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거듭나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의 사건은 결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항상 현재 우리 가운데 생생하게 역사하는 현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모진 고초를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구원의 은혜가 가물가물해지고 심령이 딱딱해지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봐도 그저 그렇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내가 과거 분위기에 말려들었거나 누군가에게 홀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과 은혜가 사라지고 신앙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꿀 같이 달던 말씀도 맹물 같이 느껴지고, 때로는 쓴 약 같이 느껴져서 점점 멀리하게 됩니다. 기도도 형식적으로 되고, 주일 마다 드리는 예배도 의무적이 되어 졸게 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신경질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좋은 밥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5:8).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내 마음 속에 늘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사라지게 되면 신앙이 율법적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것을 영접하도록 하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감사함으로 영접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다 우리의 선한 행위를 첨가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과거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고, 현재 나의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사건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복음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들의 신앙 체험(2-5)을 상기시키고 구약(6-9)을 기초로 해서 논증합니다.

첫째, 그들의 신앙 체험을 상기시킴 (2-5). 2-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상기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질문합니다. 바울은 2절에서 먼저 그들이 어떻게 죄 사함 받고 복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베드로는 사도행전 2:3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성령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임하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합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어떤 선한 일을 했거나 수련을 열심히 쌓았거나 고행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일대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다만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모두 해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인간이 성취한 행위를 요구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에 대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할 것을 제시하고 복종을 강요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주며 믿음으로 귀한 선물을 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이렇게 율법과 복음은 상호 이질적이어서 결코 타협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율법을 세우게 되면 복음을 무너뜨리게 되고, 복음을 세우게 되면 율법이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3절에서 바울은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인가 행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인간적이고 육신적이 되어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변질로서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되자 가족 친지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딤후 3:12). 그러나 그 핍박은 그들의 믿음을 순수케 하고 그리스도께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고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위를 따라 살게 되면 과연 그 고난을 헛되이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란 성화 과정을 말합니다. 2절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5절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성화 과정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죄 가운데서 구원을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고, 또 구원을 받은 후 신앙생활도 우리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듣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듣고 믿는다는 것입니까? 로마서 10: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1:23절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2절은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믿음의 성장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믿음은 환상 가운데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좋은 말로 설득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울면서 감정에 호소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 인간의 힘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절대 주권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을 믿음의 예로 제시함 (6-9). 바울이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한 것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잠재우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들이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상태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믿음으로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실제로 아들 하나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는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지만 늙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하느라 몹시 지쳐 있었고, 원수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자신의 비용으로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에 막대한 물질적인 손해로 인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후사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슬픈 생각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임하였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이는 아브라함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친히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당면한 현실 문제에 얽매여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잘 아시면서 왜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장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그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먼저 그의 좁아진 마음을 넓히기 위해 그를 밖으로 이끌어 내시고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그리고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임한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말씀은 영접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때까지 한 명의 자식도 안 주시면서 하늘의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신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누가 이 황당무계한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는 창조주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A+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것을 받을만한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를 많이 양성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아무런 제자도 양성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할례를 받았거나 율법을 지켜 왔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때는 할례나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을 만한 아무런 꼬투리가 없는데도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참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나 육체의 혈통을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의도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복음의 내용은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창 12:3, 22:18).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씨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축복이 단순히 자식을 많이 낳고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이름이 유명하게 되고 장수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축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축복은 좀 더 근원적인 축복, 영원히 지속되는 축복인데 이것은 곧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왜 그렇게 큰 축복이 될까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죄 없다고 선포함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죄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입양을 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을 받게 되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또 덤으로 물질이나 명예와 같은 현세적인 축복도 받게 됩니다. 강영복 목자는 과거에는 영 복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과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로서 영 복이 없는 자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과 접붙인 바 되어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율법의 저주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축복 (10-14)

바울이 이때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들의 신앙 체험(2-5)과 구약(6-9)을 기초로 해서 논증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고자 하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는 것과 (10-12), 우리가 어떻게 무서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참된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3-14).

10-12절에서 바울은 레위기 18:5절과 하박국 2:4절을 말씀을 인용하여 의를 얻는 두가지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첫번 째 방법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다른 방법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신명기 27:26절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율법책에 기록된 전부를 완전히 항상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배웁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정죄를 받아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율법은 조금이라도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100가지 중에서 99 가지는 지켰는데 하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99 가지 지킨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하나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인해 범법자로 낙인이 찍혀 처벌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중에서 다른 계명은 잘 지켰지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범법자가 되어 버립니다. 율법씨는 완전주의자입니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매우 잘 생기고 머리고 좋고 모든 면에서 훈련이 잘 되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냅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그와 결혼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결혼을 한 후 매우 힘든 현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율법씨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12시간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어김없이 지켰습니다. 그는 한번도 실수하는 일이 없이 무엇을 하든지 완벽하게 했습니다. 문제는 자기만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조금도 봐주지 않고 정죄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김없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완벽한 율법씨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혼을 잘 해야 합니다. 겉만 보고 율법씨와 함부러 결혼할 것이 아닙니다.

11a절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하였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행위로,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1b절에서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그도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에 걸렸습니다. 그는 탐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각양 탐심이 그 마음 속에 더욱 강하게 역사하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가 사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미는 구원의 밧줄을 붙잡고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외치며 (롬 7:25a),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관련하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2004년 미국 야구 월드 시리지에서 우승한 보스톤의 레드삭스를 통해 ‘저주’가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드삭스는 1901년 창단한 이래 1918년까지 월드 시리즈를 5번 제패한 명문구단이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에 전설적인 인물인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헐값에 판 뒤부터 우승과 인연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레드삭스는 여러 차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막강한 선수진을 가지고도 모두 3승 4패로 졌습니다. 반대로 뉴욕 양키스는 베이브 루스를 영입한 후 26차례나 우승을 하였습니다. 레드삭스가 우승하지 못하는 것은 양키스로 팔려 간 베이브 루스가 저주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이브 루스의 애칭인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보스톤 시민들은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주 과자’나 ‘저주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루스가 보스톤을 떠나면서 집 앞 호수에 빠뜨렸다는 피아노를 건져내면서까지 저주를 떨쳐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월드 시리즈에서 86년만에 우승을 하게 되자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며 보스톤 시민들은 펄쩍펄쩍 뛰며 즐거워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은 가로수를 마구 흔들어 나무가 뿌리채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밤비노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도 기쁜데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율법의 저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율법의 저주는 우리가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사울왕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그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자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고 대신에 악령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악령에 시달리며 마음은 잠시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가 위기의 때에 기도를 해도 아무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전쟁터에서 자살로 비참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를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았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압니다. 그는 저주를 받아 목매달아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무서운 저주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로서 이 땅에서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어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 9:27). 우리는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계 21:8).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언젠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그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옥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정감이 넘치는 산타클로즈 할아버지나 한없이 마음이 좋으신 무골 할아버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시고 무섭게 심판하시는 공의의 재판관이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인 동시에 저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신 동시에 죄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고, 불의를 참지 못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받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내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나에 대한 그 무서운 저주가 모두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것 뿐입니다.

메릴린 히키(Marilyn Hickey)가 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에 보면 미국의 두 가정의 대조적인 가족사(家族史)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맥스 죽스(Max Jukes)는 무신론자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은 560명의 자손들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310명이 거지로 죽었고, 150명이 범죄자가 되었으며, 그 중에 7명이 살인자였고, 100명이 술주정뱅이였으며, 그 가계에 속한 여자들 중 절반 이상이 몸을 파는 창녀들이었습니다. 한편 죽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신 헌신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자매와 결혼을 하여 1,394명의 자손들을 두었습니다. 295명이 대학을 졸업했고, 그 중에 13명이 대학 총장, 65명이 교수, 3명이 상원의원, 3명이 주지사였습니다. 또 30명이 판사, 100명은 변호사, 56명이 외과 의사, 75명이 군대 장교, 100명은 유명한 선교사와 목사와 작가, 80명은 다양한 공직을 맡았는데 그 중 3명은 시장, 한명은 미국 재무성 감사관,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의 부통령이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저주받은 아담의 피와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 속에 있는 저주의 흐름, 우리의 가족과 가계에 흐르고 있는 저주의 흐름, 민족에 흐르고 있는 저주의 흐름을 끊으려면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 때 저주의 흐름을 축복의 흐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14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이중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축복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을 자신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포였습니다. 둘째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요 14:16-17; 행 1:4-5), 이 약속은 오순절 때 성취되었습니다 (행 2:1-4,3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11:26). 우리 앞에는 양자택일의 길이 있습니다. 축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 뿐입니다. 루터는 “믿음은 귀하신 보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붙들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굳게 붙들 때 축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