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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15-4:7

by Mark Yang   04/29/2022   Galatians 3:15~4:7

Message


제 4 강

율법의 역할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말씀 / 갈라디아서 3:15-4:7

요절 /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오늘 말씀은 우리가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상태에서 어떻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인 3:26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통이나 선행을 많이 해서 업적을 쌓았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무 값없이 온전히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하시고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약속이 모세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기까지는 약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스도, 이 세 인물을 기초로 율법과 약속의 관계 (3:15-18), 율법의 역할 (3:19-24)에 대해서 논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율법의 종노릇하던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3:25-4:5),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게 된 축복과 특권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4:6-7).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이 꼭 필요한가? 필요하면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가?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역할 (3:15-24)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율법과 약속과의 관계를 말하고 (15-18), 이를 기초로 율법의 역할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19-24).

첫째, 율법과 약속의 관계 (15-18). 사도 바울은 먼저 15절에서 일반 상식을 기초로 언약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언약은 업무상의 계약이 아니라 유언을 말합니다. 고대 헬라 법에는 한번 작성하여 확정한 유서는 다시 무효화 하거나 변경할 수 없었습니다. 유언자가 죽은 후일지라도 어느 누구도 변경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언약도 폐하거나 덜하거나 더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이야 더욱 더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약속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 확정적으로 하신 가장 중요한 약속은 창세기 22:16-1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일반적으로 맹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 신 앞에서 엄숙히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맹세를 할 때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합니다. 맹세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실 때 너무 중요한 약속이고, 또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의미에서 맹세를 하셨는데 하나님 자신보다 더 높은 분이 없으므로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게 하신다”는 것,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것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씨’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씨’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서 오직 하나를 가리키는데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6).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신다”는 말씀은 그의 후손이 헤아릴 수 없이 많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 세계 각 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의 원수인 사단이 정복될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사단을 정복하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히 2:14-15).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없이 하심으로, 천하 만민이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리게 됨을 말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또 이 약속은 18b절을 볼 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주셨다”는 것은 값없는 선물(카리스: 은혜의 선물)을 영구히 '주셨다'(완료시제)는 것입니다. 이 약속에는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복종해야 할 율법도 없고, 이루어야 하는 공로도 없고, 채워야 하는 조건도 없습니다. 선물은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고 받기만 하면 됩니다. 또 이 약속은 유언과 같기 때문에 아무나 변개할 수 없고, 또 그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계속해서 효력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번 하신 약속은 철회하신 적이 없고 반드시 지키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이 절대적이어서 모든 것의 최우선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때로부터 430년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이 약속을 없이 하지 못하고 헛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 만일 유업을 상속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진다면 이는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므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18).

이상에서 볼 때 약속과 율법은 완전히 구분됩니다. 이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내가 〜 하리니, 내가 하리라”고 말씀하시지만, 모세의 율법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 할지니, 너는 〜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이루어 나가시며, 우리에게는 다만 이 약속을 믿기만을 원합니다. 여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와 책임이 강조되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은혜가 없고, 이를 지키지 않을 때 정죄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는 모세의 종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종교이며, 율법의 종교가 아니라 약속의 종교이며, 행위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 은혜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수천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의 역할 (3:19-24). 15-18절 말씀을 살펴 볼 때 율법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아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19-24절에서 율법은 그 고유의 역할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19a절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사실 법이란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껏 착하게 사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법이 없으면 죄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식인종들은 사람을 죽여서 해골을 많이 차고 있으면 위대한 자로 생각하고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게 되면 이것이 죄인 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욕심을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없니, 욕심을 좀 가져봐“라고 하며 욕심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특히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갖고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고 고시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이 죄라고 말합니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율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때는 그들이 출애굽 한 후였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고 감격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자 그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며 자기들을 출애굽시킨 목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출 16:2-3). 또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출 17:2).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여 노예생활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 내면은 노예 시절에 갖고 있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은 노예근성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없었고, 감정을 다스릴 내면성도 없었으며, 욕심과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절제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목자를 원망하고 환경을 불평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또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목자 앞에서 말씀 노트를 북북 찢고, 공부하다가 획 나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죄로 알지 못했고, 안일하고 게을러서 생활에 규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죄인가를 깨우쳐 주고, 그들을 규모 있는 자로 훈련시켜 줄 율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십계명을 주시고 또 세부 규칙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면 그들은 감정적이고 정욕적이고 물질적이 되어 아무 쓸모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과 훈련 없이 제 멋대로 자란 사람을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훈련 여부는 전쟁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선수들에게 있어서 훈련 여부는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지옥 훈련을 받은 자들이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얼마 전 박지은이 골퍼 여제 소렌스탑을 제치고 오랜만에 우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우승 뒤에는 지옥 훈련이 있었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연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발가락이 다 뭉개져서 피가 나고 또 나서 나중에는 굳어져 흉측하게 될 정도로 연습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19b절은 율법의 한계와 열등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중보자가 없이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시고, 복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 계시하셨지만,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 모세의 손을 빌어 주신 것입니다. 또 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만 유효합니다. 20절은 극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전수되었는데 중보자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양 편에 서서 그 직분을 감당해야 했지만, 약속은 중보자가 필요 없이 하나님 한 분의 자유의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약속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일합니다.

21-22절은 약속과 율법은 서로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약속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복음을 절대 불가결한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2a). 로마서 3:9-10절은 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또 로마서 3:19-20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하는 것입니다 (22b).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의롭게 된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율법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줍니다.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고, 죄를 폭로하고, 죄를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롬 3:20; 롬 4:15; 롬 7:7) 율법은 마치 검사와 같습니다. 검사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죄를 들추어내고 고소하여 죄인을 정죄합니다. 둘째로, 율법은 규모 없는 사람을 규모 있는 사람으로 훈련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제어하고 죄를 짓지 못하도록 억제합니다. 셋째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말씀에서 두 개의 비유를 통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은 감옥의 비유인데 ‘매였다’는 단어와 ‘갇혔다’는 단어가 이를 말해 줍니다. ‘갇히다’는 단어는 ‘무장한 파수를 시켜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성을 외부로부터 적을 막기 위해 파수한다는 의미와, 안에 있는 주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킨다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 우리를 감옥에 넣어 절대로 도망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은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감옥 속에 단단히 갇혀 있는 죄수들이었습니다.

24절은 가정교사의 비유입니다. 가정교사는 어린 아이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개인교사를 말합니다. 로마는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자녀를 키우는 목적은 좋은 전사로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갖은 훈련을 다 시켰는데, 이 훈련시키는 일을 한 하인을 가리켜서 '튜터' (Tutor)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그 행동 전반을 감독하여 쓸만한 인간이 되도록 훈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훈련은 가혹할 정도로 엄하였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비록 하인이지만 그들에게는 자녀들을 마음대로 때리고 훈련시킬 권한이 있었습니다. 이 튜터는 아이를 강인하게 단련하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옷을 벗고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조금이라고 꾀를 부리면 매를 들고 있다가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래서 튜터를 그린 그림을 보면 언제나 그 손에는 매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훈계하고 훈련하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후에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하여 마침내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체면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 그 바닥에 깔린 죄악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일일이 말해 줌으로써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며 또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율법은 간수처럼 우리를 감옥에 집어넣고, 튜터처럼 우리의 비행을 꾸짖고 처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감옥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풀어주실 때까지 감옥 속에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하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실 때까지 엄한 튜터에게 맡겨 두어 훈련시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 말미암아 갇힌 감옥에서 풀어주실 수 있고, 율법의 엄격한 계율 속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약속을 무효화 한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참된 기능이 약속을 굳게 세워 절대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가난을 뼈저리게 맛보아야 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고, 감옥과 같이 얽매이는 환경 가운데서 살아보아야 자유가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으로 인해 죄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을 때만이 복음이 주는 참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보면서 2,000여년간의 구약 역사 를 개관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모세를 통해서 확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피상적으로 볼 때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서로 무관한 사상들이 뒤엉켜 자란 덤불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섭리,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종합계획 (master-plan)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 (3:25-4:7)

3:25-2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게 된 축복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믿음이 온 후로는’ 라는 말 앞에 원어에 보면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는 율법 아래 있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 받은 상태나 감금된 상태나 통제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온 후로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 말씀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이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어도 어느 정도 조건 개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들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옛날에 로마 시민이 되려면 부모가 로마 시민이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운다거나 많은 돈을 주고 사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요 1:12-13).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7). 여기서 세례는 침례로서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죄악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때 새로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믿음이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옷을 입는가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집니다. 로마인들은 16세가 되면 성인의 표시로 ‘토가’를 입었습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옷 입는 것도 달랐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의 종이 되어 종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이 죄로 얼룩진 더럽고 추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옷을 벗기시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아들로서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는가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뜻입니다. 고상한 옷을 입으면 고상하게 보이고,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보이게 됩니다. 형제들은 부족할지라도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으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과 같은 인종의 차별도 없고, 종이나 자주자와 같은 신분의 차이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와 같이 성별의 차이도 없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28).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어 약속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29).

이상에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감옥에 갇혀 최후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도 아니고, 가정교사 아래서 제재를 받고 있는 어린 아이나 미성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장성한 자녀가 되어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지위와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4:1-5절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다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4:6-7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자의 아들이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일지라도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일 때에는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지도 아래 있게 됩니다. 그들은 그의 인격과 재산을 관리합니다. 아들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상속할 자라 할지라도 후견인 아래 있을 때는 후견인으로부터 용돈을 타다 써야 하고 무엇을 사고자 할 때는 반드시 후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에서는 아들로 태어나면 아들에 대한 독특한 관습을 치릅니다. 성인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친아들이라도 아들처럼 대우하지 않습니다. 가장 영리한 노예를 아들의 가정교사로 두어 자기 아들을 종처럼 혹독한 훈련을 받게 합니다. 가정교사는 시간이 흘러 아들이 성인이 되면 주인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인님, 이제서야 아드님께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지적, 도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폭넓은 지식과 올바른 정신 그리고 건강한 육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때서야 성인식을 치르고 아들을 진짜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율법이라는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하여 아무런 자유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세상 초등 학문이라고 한 것은 율법은 초보적인 원리 (the basic principles of the world)로서 그리스도 오심을 위한 준비교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지만, 사단은 율법을 이용하여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절망에 빠뜨리고 정죄로 몰아넣어 종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종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기간이 찼을 때 약속대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성령의 잉태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잉태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아무 죄 없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다 치루셨습니다. 이로써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이 주는 두려움 대신에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양자로 입양하게 되면 양부의 재산뿐 아니라, 사회적 모든 지위와 권력까지도 그대로 상속받게 됩니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줄리어스 시저의 양아들로 입양되어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트랴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같은 현제들도 양자 상속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입양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6-7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실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명분 뿐만 아니라 체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크고 두려우신 분으로서 죄악된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하면 즉시 죽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크고 두려우신 분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애정과 확신과 친밀함을 가지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릴 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고 어색하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그 뜻대로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모실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한없는 위로와 안식을 누릴 수 있고,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벤허를 다시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벤허는 유대 왕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유대 총독이 부임할 때 헌 기왓장이 떨어져 총독 살해범으로 누명을 쓰고 하루 아침에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전함 노예선인 갤리선에서 노잡이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집정관의 목숨을 구해줌으로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루 아침에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집정관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땅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것을 소유한 자라도 한 푼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 푼 두 푼이 아니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우리는 이를 잘 깨닫지 못하고 거지와 같이 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 월버 체프만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어떤 교인이 13세 때 가출한 아들을 찾으러 매일 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던 중 드디어 18년만에 우연히 필라델피아 역전에서 자기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이 마약환자와 같이 초점 없는 눈으로 방황하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청년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25센트만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즉시 그가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야, 너 톰 아니냐. 나는 니 애비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아저씨, 25센트만 주세요”라고 계속 구걸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껴안으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25센트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바로 네 아버지야. 너는 나의 아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내 집과 내 돈 그리고 나의 농장이 다 네 것이야. 내 생명조차도 네 것이란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야. 집으로 가자. 그리고 나와 함께 살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어버리고 25센트만 찾기 쉽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노예근성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갖기 위해서는 율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