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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15

by Mark Yang   04/29/2022   Galatians 5:1~15

Message


갈라디아서 제 6 강

그리스도인의 자유

말씀 / 갈라디아서 5:1-15

요절 /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 1-4장까지는 교리편이라면, 5-6장은 실천편입니다.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이며(1-15), 우리가 이미 얻은 자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으며, 또 자유를 지킬 때 맺게 되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16-26). ‘자유’라는 말은 오늘날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을 좇아 행동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좇아 행동합니다. 심지어 인간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도 있고, 불순종할 자유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산다 할지라도 자유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유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자유가 있습니다. 체첸이나 티벳트과 같이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민족주의적인 자유가 있고, 북한과 같이 독재로부터 벗어나는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관세 장벽 철폐를 주장하는 자유 무역이 있고, 자본주의자들의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자유도 있습니다. 미국의 프랑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 ‘예배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of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of fear)의 4대 자유가 세계 어디서나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양심의 자유이며,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된 자유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면 모든 통제로부터 벗어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정부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5:1-12)

첫째,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6).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씀은 과거 우리는 노예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해방자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자유한 삶임을 말해 줍니다. 과거 우리는 내 원하는 대로 산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죄의 종노릇하고 율법의 종노릇하고 마귀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4절에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만의 종이었고, 욕심의 종이었고, 정욕의 종이었고, 이기심과 시기심의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육체가 원하는 대로 죄를 짓고 이를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해도 양심의 가책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마음의 평화를 상실하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죄의식으로 인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칼 하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는 항상 내가 자유롭게 열쇠를 가지고 밖으로부터 안으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감방과 같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문은 잠기고 나는 도망갈 수 없는 죄수가 되고 만다.” 우리는 죄를 지을 자유는 있지만 죄에서부터 벗어날 자유는 없습니다. 감방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감방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열쇠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과거 우리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허무감을 줍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가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공부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일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인생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중풍병자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또 죽음은 우리에게 사후에 대한 공포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줍니다. 이 죽음의 세력 때문에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a)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신분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려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종은 스스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누군가가 값을 치루게 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속량(贖良, atonement)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단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우리가 누리게 된 자유는 내가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십자가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기 때문에 극히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값을 요구할 수 없어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1b). 여기서 ‘종의 멍에’는 율법을 말합니다. 멍에는 소에게 지우는 것으로 종살이를 상징합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구원에 이르고자 하다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고 정죄의식에 빠져 결국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고 죄의식과 정죄의식에 빠지게 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 대신 우리에게 의와 영생을 주신다. 그리고 율법의 속박과 공포를 양심의 자유와 복음의 위로로 바꾸신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음으로써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므로 이제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굳세게 선다”는 말은 전쟁용어로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원수와 맞서서 싸워야 함을 말해 줍니다. 사실 무엇이든지 얻는 것이 힘들지만 지키는 것은 더 힘듭니다. 챔피언이 되기가 힘들지만 챔피언 자리를 지키기는 더 힘듭니다. 여기에는 갑절의 투쟁이 요구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을 때 자유를 얻기 위해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8 ‧ 15 해방을 맞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유다! 자유다!”를 외치며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제멋대로 먹고 놀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져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6 ‧ 25가 터져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지키지 않았을 때 혼란과 공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얻은 자유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굳세게 서서”는 차렷 자세로 눈을 똑바로 뜨고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영적 투쟁을 게을리 하고 방심하면 자유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2-4절에는 할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례는 단순히 외과수술이나 형식적 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으로서 율법에의 복종과 선한 행위에 의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만일 할례를 받게 되면 그에 따르는 책임으로서 모든 율법을 행할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3). 이런 자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또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됩니다(4).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며 완성하신 십자가의 사역을 무효로 만들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 되어 그리스도를 잃게 됩니다(2,4). 우리는 율법이냐? 은혜냐?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율법과 은혜를 절충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복음의 원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입니다. 음식이나 음악이나 춤 등 모든 분야에 퓨전이 이루어지다보니 종교에도 혼합주의가 들어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모든 것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좋은 것만 취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자기 부인’이나 ‘회개’나 ‘십자가’는 회피하게 되고, 은혜와 축복만을 구하는 사먀니즘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이고 순수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요 부활의 복음으로서 다른 어떤 것과도 혼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2-4절에서는 주어가 ‘너희’였으나 5,6절에서는 ‘우리’로 바뀝니다. ‘너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지만, ‘우리’는 믿음을 좇아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5,6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세 가지 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의 소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는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몸까지 완전히 구속되어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생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믿음을 좇아 기다릴 뿐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얻기 위해 선행이나 고행이나 업적을 쌓지 아니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바랄 뿐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생활인데 이는 성령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힘과 의지로 사는 삶이 아니요, 성령을 힘입어 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을 좇는 생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5:16절 이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효력을 가지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이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참된 믿음의 증표입니다. 율법주의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율법에 순종했는가, 불순종했는가만 따지기 때문에 딱딱하고 차갑습니다. 긍휼이나 자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이해와 사랑이 있습니다. 허물을 감싸주는 따뜻함이 있고 포근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 이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이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거짓 교사들의 특징 (7-12).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릇된 교리를 정죄한 다음, 7-12절에서는 이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정죄합니다. 여기에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거짓교사들은 진리에 순종치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신앙생활은 여러 곳에서 경주에 비유되고 있습니다(고전 9:24; 히 12:1).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동안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경주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잘 달리다가 율법주의자들의 방해로 넘어져서 비틀거리고 심지어는 정로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4년 8월 그리스에서 개최된 올림픽 마라톤 때 브라질 선수가 1위로 달리고 있는데 어떤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리듬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달려서 3위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경주를 잘 하고 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 신앙생활에 의심과 불신을 심어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서 볼 때 믿음의 경주를 잘 하려면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하고, 또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정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짓 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닙니다(8). 그들의 권면은 사람들이 듣기에 좋도록 달콤한 말을 하지만 이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주의를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셋째로, 거짓 교사들은 교회를 오염시킵니다. 거짓 교리는 누룩과 같아서 조금만 있어도 교회 전체를 부패시킬 수 있습니다. 누룩은 악영향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보다도 나쁜 것에 쉽게 물듭니다. 그러므로 악영향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방치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차단해야 합니다.

넷째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10).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다섯째로,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참 교사들을 핍박합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할례는 율법을 상징하지만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할례는 인간 성취의 종교로서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와 같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종교를 상징합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종교로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며,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에 반발을 사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네 안에 빛이 있다. 그러므로 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가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의 메시지는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는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사단적인 것입니다. 사단은 창세기 3장에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기만 하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습니다(창 3:5).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사단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단의 거짓 가르침에 속아 잘 넘어갑니다. 반면에 십자가의 메시지는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할 데 없는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그것도 도저히 소망이 없는 시커먼 죄인이다”라고 말하는데 화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개 십자가에 대한 반응은 “나 같이 착하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을 보고 죄인이라니 생사람 잡지 말라”고 반발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려면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거리끼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확신을 가지고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고전 1:18,23,24).

바울은 12절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을 어지럽게 하는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베어버린다’는 말은 거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지방은 브루기아와 인접해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의 최대의 예배의식은 시빌리(Cybele) 여신에 대한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열렬한 신자들은 여신에 대한 헌신의 표시로 스스로 거세하여 고자가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거세하여 고자나 되라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5:13-15)

사도 바울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을 때 이를 곡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제약하던 율법이 없어지고, 은혜는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준다는 보증이 되기 때문에 내 욕망,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의무가 따르게 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의무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탐닉을 멈추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기 쉽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우리 뼈대를 싸고 있는 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말합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래로 조상 대대로 유전된 본성으로서 범죄하기 쉬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정욕적인 본성을 의미합니다. ‘기회’는 구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자기 탐닉을 위한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기적 욕망에 무제한 탐닉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재갈 물리지 않은 방종은 자유가 아니라 더 무서운 형태의 속박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앞에 아무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말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아무나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아들은 자유롭게 백악관을 드나들면서 “아빠!” 하면서 자유롭게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아빠” 하며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죄로 인한 장벽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두터운 휘장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이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 10:19,20). 이제 우리는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더 이상 죄의식과 정죄의식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고 죄사함을 받음으로 나를 얽어매는 죄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품에 안기어 참 안식과 하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13b절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육체의 탐닉에 빠져 자기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아닐 뿐 아니라 이웃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유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관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착취하고 피해를 주는 자유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귀하게 여기고 그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많은 종을 거느린 한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많은 주인을 모시는 한 가난한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타적인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신의 유익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애를 써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으로 상대방의 종노릇을 하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할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자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테레사 수녀에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묻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딱 한 달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의 일을 좀 도와주신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 해 드리죠.” 그 자매는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캘커타 슬럼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보니까 그녀의 마음에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자매는 그들을 돕고 섬기는 데서 순수한 환희를 느꼈고, 한 달 후에는 테레사의 다른 조언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베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여러분이 쓰다 남은 것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고통이 따를 때까지 베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베푸는 일에는 심오한 기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먹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가 서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서로 섬기게 될 때 악한 말과 행동으로 서로 물고 먹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물고 먹는 것은 파괴적이지만 사랑은 건설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탐욕적이거나 점유적인 것이 아니고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폐쇄적이 아니고 공개적이며, 사랑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을 도외시하고 폐하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율법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집약되었기 때문입니다(14). 여기서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이 언급된 것은 이웃 사랑은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탐닉에로의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절제하는 자유이며,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를 섬기는 자유이며,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완성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잘 사용함으로써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