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1 강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10
요절/ 데살로니가전서 ,7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서는 종말에 관한 서신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본서는 오늘날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역사의 급류 속에서 인류역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종말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과, 종말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델마이만(Thermaic Gulf)의 머리에 위치에 번잡한 항구도시요, 정치, 교통,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을 개척하게 된 것은 성령의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심으로 바울은 할 수 없이 드로아로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밤에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행 -10). 이에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럽 복음화의 시작이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러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후 다음 행선지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행 ).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3주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사도 바울이 A.D. 51년 경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행 ) 기록하였고, 후서는 전서를 쓰고 난 후로부터 수개월 후에 기록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올바른 재림 신앙을 가르치고, 재림 신앙을 가진 자는 실제 삶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림 신앙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재림 신앙이 없는 자는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시고 구유에 탄생하신 것과 우리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최후 심판의 날에 심판장으로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재림 신앙은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인 막연한 미래의 신앙이 아닙니다. 재림 신앙은 현재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재림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시대의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현재 건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 수 있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올바른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말씀을 통하여 올바른 재림 신앙을 확립함으로 현재의 우리의 삶이 생명력이 넘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1-3)
1절에서 바울과 실루아노(실루아노는 히브리명, 실라는 로마명)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이 서신을 쓰는 사람은 바울 자신이지만 그는 동역자들을 매우 귀히 여기고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를 복음화한 선교팀이었습니다. 축구는 한 사람이 아무리 잘 하더라도 전체가 팀 스피릿을 가지고 협력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 협력할 때 이루어집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데모데는 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누리는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바울이 3주 동안 머물면서 개척한 곳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크레시아’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공동체임을 말해 줍니다. ‘안에’라는 전치사는 ‘안에 살고 있는’, ‘안에 뿌리박고 있는’, ‘그 안에서 생명을 끌어내는’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 안에 뿌리를 박고 그 분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바울이 그들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는 세 가지 제목은 그들 가운데 일어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믿는 자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세 가지 삶의 열매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이런 것들이 결여된 자들은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신앙생활에서 항상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골 1:4,5). 칼빈은 이를 가리켜 ‘참된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라고 하였고, 벵겔도 ‘믿음, 사랑, 소망 안에 기독교 전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소망은 미래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향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믿는 자이며, 사랑하는 자이며, 소망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인간적인 기질이 아니라(인간적인 기질인 경우에는 믿음은 확신을 말하고,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을, 소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에게 생긴 열매입니다. 믿음 안에서 위로 하나님께 이끌리며, 사랑 안에서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소망 안에서 재림으로 이끌립니다. 이는 과거의 자기 중심적인 타락한 내향성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이웃들에게 향하도록 방향을 바로 잡아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하였을까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중심에 간직한 것이요, 역사와 수고와 인내는 밖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이를 볼 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생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추상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들을 낳기 때문에 생산적입니다. 믿음은 역사하며, 사랑은 수고하며, 소망은 참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이는 행동으로 나타나서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 이끕니다. 뿐만 아니라 재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역경과 박해, 어려움을 참을 수 있는 힘, 곧 인내를 낳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역사입니다(Work produced by faith). 일을 하는데 무슨 동기로 일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벌이 무서워서 일할 수도 있고, 보수를 목적으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의무감에서 일할 수도 있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영웅 심리에서 일할 수도 있고, 자기 만족이나 자기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로 일하게 되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 하는 동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일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역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태산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홍해를 건널 수도 있고,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련과 역경을 이길 수도 있고, 시련과 역경 앞에 엎드러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처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도 기쁘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면 때로는 실패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동기로 일하는가 하는 것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입니다(Labor prompted by love). 참된 사랑은 수고를 동반합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아무도 노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수고는 고통을 수반하는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기쁨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길 수 있었습니다(창 29:20). 저도 손녀가 태어났을 때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샴페인에서 톨리도까지 왕복 20시간을 기쁨으로 운전하여 갈 수 있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섬길 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면 기쁨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고를 하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도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양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면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셋째로, 소망의 인내입니다(Endurance inspired by hope).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반도의 오스트리아 군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할 때 한 겨울에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알프스 산맥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불가능하다며 한사코 말렸으나 그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단언하며 자신이 선두에 서서 병사 4만, 대포 80문을 이끌고 만년설로 덮여 있는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알프스를 넘다가 병사들이 지쳐 있을 때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알프스 저 너머에는 막대한 재물과 아름다운 여자들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희망 때문에 병사들은 힘을 얻고 모든 역경을 참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은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거짓된 희망입니다. 거짓된 희망은 언젠가는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참된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참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역경과 핍박도 참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좌충우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소망이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소망, 결혼에 대한 소망, 양에 대한 소망, 역사에 대한 소망, 자녀에 대한 소망이 참된 희망인 것처럼 속기 쉽습니다. 결혼이 소망인 경우에는 결혼 문제에 얽매여 결혼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을 하면 소망이 이루어져서 투쟁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양이 소망인 경우에는 양이 잘 자라면 기뻐하지만, 양이 힘들어지거나 세상으로 가게 되면 절망하고 살맛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을 가지게 되면 이런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참고 내면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우리 믿는 자들이 바라야 할 진정한 소망입니다.
II.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4-10)
바울은 4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것에서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켰고, 개인적으로는 모세나 다윗 같은 위대한 인물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택하심을 받는 것은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베푸신 특별한 은혜입니다(신 7:7,8).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택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5절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이 된 것은 복음의 능력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6). ‘우리 복음’이라고 한 것은 바울과 동역자들이 그것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우리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2:2,8,9). 또한 이는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도 합니다(3:2). 하나님은 복음의 창시자이시며,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이시고, 사도들은 복음의 일차적 대행자입니다. 교회는 복음에 의해 존재하며, 복음은 교회에 의해 전파됩니다.
5-10절에서 복음이 그들 가운데 또 그들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게 되었는가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렀다.” 6절에서 “너희는 ... 도를 받았다.” 8절에서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들렸다.” 이 말씀들은 복음의 진보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라는 선교팀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그것을 받았으며, 다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통하여 말씀으로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5). 여기서 말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팀들이 없었다면 그곳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는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전파의 직접적인 결과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 이르렀다는 것은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음악, 그림, 춤, 드라마, 영상메체 등 이미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합니다. 복음은 가장 기본적으로 말로 전해져야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말로 전해져야 합니다.
말은 능력이 없으면 오해되거나 무시될 수 있습니다. 말이 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한 말은 신적인 능력으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해 강퍅해지고,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은(dynameis) 복수형 단어로서 이는 외적인 기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내적 작용을 말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과 양심과 의지를 꿰뚫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능력은 설교의 객관적인 결과를 말하고, 큰 확신은 설교자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반드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하면서 전하였습니다. 로마서 1:16,17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복음의 진정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큰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도 큰 확신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영생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살전 2:13). 말씀과 능력과 큰 확신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들이 겸손하게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능력과 큰 확신으로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은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 졌을 때 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습니다(6). 복음이 전파될 때 언제나 배척하는 자와 영접하는 자의 두 종류의 반응이 있게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선물은 이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죽음이 주는 허무와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복음을 받고 죄 사함과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도를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 많은 박해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복음은 언제나 적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복음이 인간의 교만과 방종에 도전하여 죄를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복음을 영접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인상을 쓰면서 억지로 복음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주셨던 성령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음을 말해 줍니다. 성령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 양편에서 역사하십니다. 복음을 영접하면 말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그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 자들과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이를 실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인생을 반석 위에 놓은 지혜로운 자와 같았습니다(마 7:24).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나무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단순히 그들에게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그들을 본받도록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살전 1:5b, 2:10). 성경선생은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치 못하고 실생활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아무리 본을 보여 주고자 애를 써도 인간이기에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본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한 목자들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기에 힘썼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본받는 생활을 했을 때 자연히 다른 믿는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8).
셋째로,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로부터 각처에 들렸습니다(8). 8절은 그들의 믿음의 영향력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에 합당한 새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때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들린다’는 것은 “소리가 나다. 울리다. 울려 퍼지다. 우렁차게 울리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우렁찬 나팔소리”에 비유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이 우렁찬 나팔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과 같이 각처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그들이 신문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이 매스컴을 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았을 때 주의 말씀과 그들의 믿음은 사방에 퍼져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널리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방법은 거룩한 소문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에 달려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 때 우리가 현재 처한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을 중심으로 거룩한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9,10절은 그들이 복음을 받고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으나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은 죽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심을 배웁니다. 또한 우상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심을 배웁니다. 우상들은 많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우상들은 눈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만질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악령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신들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굴욕적인 사슬에 매여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그들은 참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우상에 시달리며 고통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듣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헛된 소망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10).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시 살아나신 분으로서 우리를 죄와 우상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신앙 연륜이 짧지만 어떻게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는가를 배웠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전했을 때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여 변하여 새 사람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복음을 받을 때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복음을 받기만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들이 복음 진리 위에 기초를 놓고, 복음 중심적인 삶을 살았을 때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