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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1-6:21

by Mark Yang   05/01/2022   1Timothy 5:1~6:21

Message


디모데전서 제5 강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말씀/ 디모데전서 5:1-6:21
요절/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우리는 4장 말씀을 통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5,6장 말씀을 통해 교회내에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물질관, 인생관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들이 교회내에 모든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성숙한 목자의 내면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죄악된 세상과 힘써 싸우는 믿음의 용사로 자라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교인 각 층에 대한 자세 (5:1-6:2)

첫째,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5:1-2)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늙은이들을 꾸짖지 말라고 합니다. 늙은 것도 서러운 일인데 아랫사람한테 꾸중을 듣는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이 드신 분들을 마치 친 부모님을 섬기듯이 공경해야 합니다. 또한 젊은이는 형제에게 하듯하고 젊은 여자를 대할 때는 일절 깨끗함으로 누님이나 여동생 대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가 가족 공동체와 같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가족 공동체는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예수님의 피로 한 몸 이룬 형제 자매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자기 식구처럼 공경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둘째, 참 과부를 경대하라(5:3-16). 3절부터 16절에서는 교회내에 도움이 필요한 과부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 때문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일제시대 때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징용 가서 죽고 6.25전쟁 때문에 희생되어 과부들이 많이 생긴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세 부류가 있는데 이는 부모 없는 고아, 남편 없는 과부 그리고 아내 없는 홀아비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도 과부와 고아들을 잘 돌보도록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교회내에 있는 불쌍히 과부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3절을 보면 특히 참과부를 경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참과부는 어떤 자입니까? 5절을 보면 참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입니다. 또 10절을 보면 성도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며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마치 절망적인 시대에 과부된 지 84년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안나와 같은 믿음의 여인입니다 (눅2장). 당시에는 여인들이 무시를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물며 과부들은 얼마나 천시를 당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충성하며 성도들을 전심으로 섬기는 참 과부는 귀하게 여기고 경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비록 내세울 만한 타이틀이나 배경이 없을지라도 마음을 바쳐 주님께 충성하는 분들은 경대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가족을 돌아 보라(5:8). 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 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기서 '돌아본다'는 말씀은 헬라어에 '프로노에오'(προνοέω)로서 '마음에 품다', '깊이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가족들을 마음에 두고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인생을 산다고 해서 가족들에게 무관심하고 가정을 그저 힘들 때 가서 퍼지는 하숙집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서 부모님을 복음의 동역자로 얻어야 합니다. Toledo에 Paul Hong선교사님은 목자 생활하면서도 가족들을 영적으로 잘 돌봐서 두 동생과 어머니까지 미국에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바쁠지라도 틈틈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넷째,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하라(5:17-20). 17절을 보십시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당시에는 교회를 관리하는 장로와 설교하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평신도로서 하나님의 역사와 양무리들을 잘 돌보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많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오히려 주위에 동역자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장로들이 더 잘 하나님 역사를 섬기도록 힘써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때 감독과 장로의 양축 수레바퀴가 잘 돌아가서 모임이 은혜가 있고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모임도 학생과 학사, 인턴 목자와 평신도 목자, 그리고 Mark Tiger 와 Tiger4 목자님들이 서로를 존경할 때 우리 가운데 큰 성령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18절의 비유는 말씀을 연구하며 가르치는 목회자는 Support받는 것이 당연함을 의미합니다.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로의 송사는 신중하여야 하며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꾸짖어 경계를 삼으라고  합니다(19,20). 이렇게 하는 것은 영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섯째, 편견 없이 판단하라(21-25).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견이나 편벽함에 치우치지 않도록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도자의 공정성을 말합니다. 지도자가 공정함를 상실할 때 양들은 목자를 신뢰하지 않게 되고 모임은 상호 불신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신의 직관이나 한 두 사람의 말을 의지해서는 안되고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 합니다. 또 사람을 세울 때는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을 조급하게 세우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앞서기 보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방향을 뒤쫓아가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디모데는 위장병과 잔병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어린 목자가 큰 역사를 감당하다 보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위장병이 생긴 모양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위장병에 포도주를 약간 쓰는 것은 민간 요법으로서 실제로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프랑스에서는 위암 발생률이 가장 낮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바는 포도주가 위장에 좋다는 의학상식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양에 대한 섬세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유모와 같이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의 문제를 잘 알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섬세하게 돕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실제적 문제도 깊이 관심 갖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여섯째, 믿는 상전들을 더 잘 섬기게 하라(6:1-2) 당시 로마에는 노예들의 숫자가 6천만명으로서 평민보다 10배나 많았다고 합니다. 노예들은 당시 상품과 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내에서는 상전과 종이 구별이 없이 평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회에서는 종 출신 가운데 장로도 있었다고 합니다. 카톨릭 역사를 보면 아주 낮은 천민 출신 중에서도 교황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것은 좋지만 이를 악용하여 종이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더 잘 섬겨야 합니다. 기독교의 평등은 맹목적인 평등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의 평등입니다. 

II. 이단과 돈에 대한 경계 (6:3-10)

첫째, 이단에 대한 경계(6:3-5). 3절과 4a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1세기 기독교회의 예배 때는 오늘날과 달리 누구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자유롭게 나와서 메시지를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강단이 누구에게든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짓 선생들도 나와서 자유롭게 자기의 이론을 전파하였습니다. 당시의 거짓 선생들은 궤변론자, 곧 sophist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소피스트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 상상으로 만든 신화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림으로서 돈과 명예를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에 동의하지 않고 기독교와 비슷한 자기 나름대로의 교훈을 전파하여 변론과 언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교묘한 화술과 말장난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습니다. 이들의 근본 문제는 교만입니다. 그들은 교만으로 교회내에 분쟁의 씨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 복음 신앙을 떠나서 결국 생각이 악해지고 마음이 부패해지며 진리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5). 다른 교훈에 빠지게 되면 마음이 거짓과 사기, 술수 등 온갖 악한 생각만 하게 됩니다. 즉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단들을 보면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고, 소중한 가정을 파괴하고, 고귀한 남의 생명을 자살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이단은 사단적이고 마귀적이며 파괴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과 복음 신앙에 착념해야 합니다. 이론 논쟁을 즐길 것이 아니라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디모데 후서 2:15절에서 이렇게 권면 하였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가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고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거짓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파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돈에 대한 경계(6:6-10). 6절을 보십시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족'이란 '안분지족'의 줄임말로서 자신의 분수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분수를 넘어서 도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자 같은 맹수도 배가 부르면 절대로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도 배가 터지도록 욕심을 부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176억원이라는 가장 많은 상속세를 낸 이병철씨도 결국 반평도 못되는 관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최희준이 노래한 것처럼 인생은 하숙생, 나그네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세익스피어는 "만족은 참된 행복의 자산이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는가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지족하며 사명을 힘써 감당할 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17세기 모라비안 선교회 신자들 중에는 "오늘 나에게 신 한 켤레만 주면 내일 선교사로 떠나겠다"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부자들은 아니었지만 항상 찬송과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L.A의 김이삭 선교사님은 검사로서 본국에서 얼마든지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나가서 신문 배달부, 아파트 관리인을 하며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낮에는 망치를 두드리고 밤에는 방석집에 드나드는 검사 생활보다 가난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선교사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사람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조국도 배반하고 유다처럼 스승도 배신하고 친구도 양심까지도 팔아먹습니다. 육사와 서울대까지 나온 장교가 돈 때문에 총을 들고 은행을 털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불을 지르는 패륜아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돈이 뭔지 참으로 돈이 웬수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부하고자 하면 시험과 올무에 빠져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영혼의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10)." 세상에 수많은 죄와 비리들이 돈 때문에 생겨납니다.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갈쿠리처럼 오그라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주의 시대에서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돈이 바로 행복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이 생기면 추한 쾌락을 탐닉하게 됩니다. 사람이 돈 맛을 알게 되면 더 돈을 벌고자 하고 나중에는 돈에 환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돈 때문에 돌아 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 속담에 "돈은 바닷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하는 것처럼 돈은 벌수록 더 갈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신자가 돈을 사랑하게 되는 때입니다. 신자가 돈을 사랑하게 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영적인 소원을 상실하고 돈버는 재미, 돈 쓰는 재미에 빠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인색해져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아깝게 생각합니다. 결국 돈 욕심 때문에 신앙과 사명마저 저버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부자 청년도 영생을 구했지만  재물이 많아 근심하다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도 안물어가는 돈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썩어질 물질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도 전락하여 물질만 구할 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27)

III. 결론적인 권면 (6:11-21)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모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하나님 중심적인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세상에서 유명 인사가 되고 유명한 부흥사가 되고 교황이 되길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일찌기 엘리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웠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웠습니다 (신33:1). 우리는 죄악된 시대에 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내가 오직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성결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키우실 것을 믿기 때문에 소망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지만 내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너 곽상규 하나님의 사람아!" "너 강필근 하나님의 사람아!" 저희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identity를 갖고 확신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첫째로, 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가르친 다른 교훈, 부하려 하는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피하라'는 말씀은 영어에 'flee from'으로서 적극적으로 도망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이 날 더럽히기 전에 아예 멀리 도망가 버려야 합니다.

둘째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여기서 '좇는다'는 것은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내면적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골3:1).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갈5:15). 이처럼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의 내면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믿음을 좇아 사는 자는 그 영혼이 윤택하게 되며 그 얼굴에도 광채가 납니다. 이희규 목자님과 이주석 목자님을 보십시오. 얼굴이 빛난 주석과 같습니다.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 온유를 좇는 생활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가는 생활입니다. 저희들이 날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기에 힘쓰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엡4:13).

셋째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싸우다'는 헬라어로 ‘아곤니조마이’(ἀγωνίζομαι)로서 올림픽 같은 운동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황영조 선수는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선수를 앞지르기 위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고 막판 스퍼트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문화생활이 아닙니다. 사단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악된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편하게 적당하게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어리고 연약한 디모데에게 그저 적당하게 중심만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자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적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리라." (딤후 4:7,8) 저희들이 젊은 날에 힘써 선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므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넷째로, 영생을 취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take hold of'로서 '꽉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영생은 미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영생은 현재 참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7:3). 뿐만 아니라 영생은 죄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생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정말 얻고자 하는 행복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이런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 있게 희생하며 손해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희생도 손해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영생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얻었을지라도 영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바울은 13,14절에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히 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해 죄와 조금도 타협하지 말고 절대적인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 기약이 이르면 주님께서 다시 오사 우리에게 넘치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존귀와 영원한 능력과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16).

  17절에서 바울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재물은 정함이 없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잠언 23:5절에서도 "정녕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 일본 고베에 지진이 났습니다. 고베에서 오신 천여호수아 선교사님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역에서 재력가들이 올해 사업의 번창을 위해 큰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베신사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기로 한 바로 그날 새벽에 하나님은 고베시를 지진으로 흔드셨습니다. 단 20초만에 고베시는 난장판이 되고 신사는 폭삭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정말 세상의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은 근본적으로 소망 둘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 참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오직 우리에게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살아 계신 것을 믿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급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이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가장 부유한 자입니다. 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는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삶을 삽니다(18). 이렇게 사는 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생명 구원 역사에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들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영생을 소망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기에 힘쓰고 영적인 투쟁을 감당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열매 맺는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별하사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죄악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