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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 거룩한 삶

by Mark Yang   05/01/2022   1Peter 1:1~2:3

Message


베드로전서 제 1 강

산 소망, 거룩한 삶

말씀/ 베드로전서 1:1-2:3
요절/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AD 64년경 네로의 대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에 로마에서 핍박을 인해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견디며 더 나아가 나그네의 인생 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서신을 "격려의 서신", "나그네의 서신", "희망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본 서신의 중심 사상은 '희망'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된 희망이 무엇이며, 이 희망을 가진 자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학 문명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와 함께 도덕성과 영성이 급속히 타락하여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와 같이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걷잡을 수 없이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죄의 세력과 싸우며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두운 이 시대에 투쟁해야 할 분명한 영적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산 소망(1:1-12)

 1, 2절은 인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곧 소아시아 지방에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나그네들인 크리스천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된 자들로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순종하게 된 자들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인하여 사죄의 은혜를 덧입은 자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흩어진 나그네들이여, 예수님 믿고 고생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다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소. 힘을 내시오." 하며 동정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첫마디는 "찬송하리로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심정에 인간적인 동정이나 슬픔보다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찬송 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3).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긍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죄로 인해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장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롬6:4). 사람이 아무리 수양을 많이 쌓아 인간성이 훌륭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됩니다. 영생을 누릴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무 값없이 다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4,5).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왜 산 소망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세상이 주는 기만적이고 공허하고 거짓된 소망에 반대되는 확실하고 분명하고 실제적인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소망 문제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희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갖게 하고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을 넘을 때 기진맥진한 군사들에게 알프스 산 너머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여인들과 막대한 재산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힘을 얻어 험한 알프스 산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기만적이고 거짓된 희망입니다. 공산주의는 지난 70년 동안 인간에게 누구나 공평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계급없는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희망이 기만적이고 공허하고 거짓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면 행복한 복지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자 과소비, 사치 풍조, 향락 산업이 번창하게 되고 아울러 살인, 강도, 강간, 인신매매, 조직 폭력 등 각종 흉악 범죄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며 절망케 하며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의 삶에 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진실되게 하고 고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부요케 하고 확신에 넘치는 승리의 인생을 살게 삽니다. 이 희망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에 있는 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기쁨은 부패하거나, 적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거나, 또 우상 숭배로 더러워지거나, 결코 쇠하지 아니합니다. 이는 영원토록 찬란히 빛나는 기업입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속 받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업에 연연하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있게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청춘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장차 상속받게 될 영원한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업을 간직하실 뿐만 아니라 기업을 받기 위해 거듭난 상속인들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십니다(5).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셋째로, 믿음의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6-12).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고 있지만 이 땅에서는 비난과 조롱과 박해로 인해 여러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을 저주 받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힌 이상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성만찬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신자들은 갓난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진실되게 살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세상을 거꾸로 산다."는 등 갖가지 모양으로 비난하고 곡해합니다. 이 때 우리는 믿음으로 진실되게 사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회의하고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를 알 때 우리는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련이란 말은 금을 생산하는 제련소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광석 1톤에 2g의 금이 섞여 있어도 금광석이라고 합니다. 이 금광석은 3500도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져서 불순물을 걸러냅니다. 여러 단계의 제련 과정을 거쳐 불순물을 다 걸러 내면 비로소 2g의 순금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도 결국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환난으로 단련된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합니다. 환난을 통해 세상에 붙은 모든 거짓 희망을 털어버리게 되어 우리의 믿음은 정금과 같이 순수하게 됩니다. 또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며 그 내면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 이 믿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며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9). 이 구원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예언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귀한 것입니다(10-12).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시련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이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Ⅱ. 거룩한 삶(1:13-2:3)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1)성결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13-21).
 13절 말씀은 신자들이 영적 긴장을 풀지 말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영적 긴장을 풀 때 안일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 풍조에 말려들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신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는 과거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불순종의 자식으로서 몸의 사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 때는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회개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경건한 모습으로 걸어가거나 두 손을 모아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삶은 경건의 모양만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구별되다'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된 성결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과 꼭 같이 이기적이고 욕심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불신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과 행동과 실생활에서 어딘지 모르게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또한 죄의 소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성결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리할 때 내적인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거룩함을 사모하는 욕망이 있고, 한편으로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동물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짓고 타락하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고 반대로 경건하게 살고 싶은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동물적인 육신의 본성이나 죄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거룩함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거룩함을 사모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육신의 본성대로 살 때 노아시대 사람과 같이 사정없이 육체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은 레위기 11:45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속하신 것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의 삶의 표준은 높습니다. 신자는 상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속성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8)는 것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계4:8)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분으로서 죄를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잘 나옵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의 피뿌림으로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 죽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거룩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거룩한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여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만 우리 속에 죄를 즐기고 싶은 죄의 소욕이 활화산 같이 내 마음 속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여 죄의 소욕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가난을 극복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이젠 '어떻게 즐기느냐'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가 감탄할 만큼 고도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예의와 인륜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도덕 규범이 붕괴되고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치관이 혼란되고 전통 가치관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가치관이 없는 사상의 동공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진 사람은 노력없이 큰 열매를 취하려는 이기적 한탕주의, 향락주의가 성행하고, 없는 사람도 힘든 일을 하려 하지 않고 말초적인 자극을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덕적 타락상이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 들게 되었습니다. 음란 영화, 음란 비디오, 스포츠 신문에 게제된 음란 만화가 각 가정마다 침투하여 통계에 의하면 중고생의 70∼80%가 음란비디오룰 봄으로서 정신 세계가 황폐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종로센타의 김규동 목자님에 의하면 중학 2학년이 비디오계를 만들어 매달마다 음란비디오를 사서 서로 돌려 보는 것이 점점 무섭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 신문지상을 살펴보면 인신매매와 성폭행이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얼마전엔 남편과 자식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부녀자를 성폭행한 가정 파괴범이 구속되어 사형 당하기도 했습니다. 화성군 연쇄 토막 살인사건, 경기도 양평 서연양 일가족 4명 생매장 살해사건 등 끔찍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엔 택시 운전사로 가장한 성폭행 강도가 자주 일어나 택시 타기도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회가 병들고 음란퇴폐가 거대한 향락문화를 형성하게 되자 죄의식이 약화되고 점차 신앙공동체 안에도 알게 모르게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70년대만 해도 정욕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갖고 고백하였습니다. 80년대는 회개하는 내용의 주종이 정욕죄였습니다. 90년대는 한 번 회개한 사람이 반복하여 정욕죄를 범하고 아무 부끄럼도 없이 정욕죄를 고백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나이 많은 자매 학사가 학생회 어린양을 돌보면서 은근히 양을 즐깁니다. 함께 영화도 보러가고 카페에 들어가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며 나이 차이와 관계없이 정욕죄를 은근히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적발되어 책망하고 경건훈련을 시키면 너무 율법적이라고 심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방치한다면 누룩이 번져 고린도 교회처럼 타락하고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에는 약 0.4%의 소금이 있는데 이것이 거대한 바닷물의 부패를 방지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을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된 신자 0.4%만 있어도 그 사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전국민의 25%의 엄청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을 받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가난에 한이 맺혀 믿음을 심는데도 믿으면 축복 받고 승리하고 잘된다는 구복신앙만 강조하고, 신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윤리, 도덕문제는 등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신자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믿고 실제 삶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이기적인 구복신앙에 빠진다면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음란문화의 영향력을 받아서 신앙 공동체마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과 사회에 경건주의 운동이 확산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경건주의 태동 동기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곱 스페너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들은 도덕적 부패와 타락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경건한 삶을 살므로 그 사회에 경건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은 더 거센 물결로 도전해 오는 캠퍼스의 음란문화, 향락주의와 복음으로 맞서 싸움으로 캠퍼스를 구원하고 이 시대를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죄에는 열매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람들은 소유나 지위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a).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둘째 사망입니다(계21:8). 거룩하신 하나님은 음란이 극에 달한 소돔 고모라성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습니다(창19:29). 또한 폼페이시가 음란과 우상숭배로 충만할 때 베스비어스 화산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보배피로 구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심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18,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우리는 죄악된 본성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도 안되고 금이나 은으로도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구원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산 소망을 가진 자는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과거에는 형제를 진실되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사랑했다가 필요 없으면 차버리는 것이 세상 친구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거짓없이 진실되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합니까? 22b절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믿는 사람끼리 뜨겁게 사랑하려면 먼저 상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이해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려면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며 인사도 뜨겁게 하고 눈짓이라도 뜨겁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끼리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때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죄악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3)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1:23-2:3).
 23절을 보십시오. 신자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만 세세토록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이는 헐떡거리며 젖을 사모합니다. 아이는 생명을 걸고 맛있게 신나게 절실하게 간절히 필사적으로 젖만 사모합니다. 이는 생명과 성장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열심히 젖을 먹을 때 통통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을 먹어야 할까요? 이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있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비결은 주야로 성경을 다독하며 말씀의 샘을 파는 것입니다. 그 때 죄의 소욕도 물러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신자들은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희망찬 1991년을 맞이하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나 한 사람이 성결한 삶을 사는 것에서 시작하여 가정과 캠퍼스와 사회에 경건주의 운동이 확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죄로 인해 병들어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살아나서 전 세계에 복음의 일군으로 파송되어 세계 선교 역사가 더욱 왕성히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