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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1-요한복음 12:1-19(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21 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말씀: 요한복음 12:1-19
요절: 요한복음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로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
로다.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11장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나사로의 부활은 최대의 표적으로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12장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으시고, 무리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시며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이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Ⅰ. 향유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1-8)

첫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1-3).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바로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인간의 죄를 위해 수없이 많은 어린 양들이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월절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세상에는 생일 잔치, 회갑 잔치, 환송 잔치 등 여러 가지 잔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잔치보다 의미있는 잔치는 없습니다. 마르다는 시원한 냉면과 맛있는 부침개와 된장 찌개를 끓이는 등 열심히 음식을 장만함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는 살이 통통하게 쩌서 건강한 모습으로 주빈석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별난 방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시작하실 즈음에 한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든 옥합을 들고 나타나 그 옥합을 탁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한꺼번에 왕창 부은 것입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향유는 인도산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써 당시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되는 지극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향유는 당시 여인들의 결혼 지참금으로써 여인들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의 사랑하는 님을 위해서 먹고 싶은 것도 사 먹지 않고, 사고 싶은 블라우스도 사 입지 않고 한푼 두푼 저축하여 한 방울 두 방울 향유를 사 모았습니다. 향유가 한 방울 두 방울 늘어날 때마다 마리아의 꿈도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갔습니다. 순전한 나드 한근에는 마리아의 모든 진심과 순결과 애정과 꿈이 방울방울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가 담긴 옥합을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고 이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의 희망과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마리아에게 있어서 향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예수님은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향유는 손님의 머리에 한 두 방울 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것을 예수님의 발에 남김없이 전부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긴 머리로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는 여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합니다. 고린도전서 11:15절에 보면 긴 머리는 여인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매우 소중하게 다룹니다. 제가 목자 초기에 어떤 자매님이 머리를 길게 하고 다니면서 머리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미장원에 데리고 가서 짧게 자르도록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님은 자기의 머리가 잘리는 것을 보고 달구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소중한 긴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주요, 자신은 주님의 비천한 여종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향유는 마리아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요, 존경과 복종의 표시요, 경건과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온통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의 눈은 예수님께로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초리를 전혀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정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되 사랑하는 듯 마는 듯 미지근하게 사랑합니다. 또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고 인색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는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아끼고 꾸리는 것이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아끼는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번민과 갈등과 염려로 인해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고, 정열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그 내면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바 사죄의 은혜가 컸기 때문입니다. 눅7:47절은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지만,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예수님께 아끼는 것이 없게 되고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비하면 옥합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과거 죄로 인해 고통하고 삶의 무의미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녀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어떻게 써야 가장 가치있게 쓰는 가를 배웁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몰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10세기 만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거창한 꿈일 수도 있고 아기자기한 sweet home일 수도 있습니다. 큰 꿈 보다도 작은 꿈을 깨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큰 꿈은 실현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있지만 작은 꿈은 실현 가능하기 때문에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옥합을 남몰래 자기를 위해 조금이라도 숨겨 두거나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거나 나에게 쓰다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린다면 심령에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모든 진심과 정열과 모든 것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아낌없이 드릴 때 심령에서부터 참 기쁨과 평강이 솟아나게 됩니다. 김엘리야 목자님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과거에 자신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고자 발버둥쳤지만 혈핵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아무 것도 소용없고 오직 주님의 일을 하는 것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임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열과 진심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드리는 것 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둘째, 순수치 못한 동기를 가진 가룟 유다(4-6). 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대해 가룟 유다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그는 비닐이라도 깔고 부을 것이지 그냥 부은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분해 했습니다. 그는 향유가 한방울 한방울 떨어질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 앉았습니다. 그의 말은 맞지만 그의 동기는 불순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코멘트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자선 사업가 같지만, 실상은 도적이었습니다. 그의 동기가 악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단지 돈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가 돈을 사랑했을 때 조그만 물질적인 유익을 위해서 생명의 구주를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딤전 6:10절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가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을 때 모든 것을 얻었고 행복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까지도 잃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겉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실상은 이중 마음을 품은 자였습니다. 그가 이중 마음을 회개치 않았을 때 결국에는 저주받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셋째, 마리아의 진심을 받으신 예수님(7,8).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저를 가만 두어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물리치시고 마리아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 주셨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행동은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너무 부담스러워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세상에 여인의 이러한 진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여인의 모든 진심을 받을 자격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진심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사랑과 순결과 정열 등 그녀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보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마가복음 14:9절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인간적으로 볼 때 마리아의 행동은 비생산적이고 비효과적이고 허비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가장 높이 평가하시고 구속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마리아가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예수님께 모든 진심을 쏟아부었는데 예수님은 이를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께 드린 것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그것만이 남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청춘과 일생을 아무리 다 받쳐 섬겨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심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통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계5:11,12)

때때로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다가 눈에 보이는 뚜렷한 열매가 없을 때 내가 괜히 헛수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와 함께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너 도대체 무슨 헛짓을 하고 있는거야” 하는 책망을 들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의 진심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다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주 안에서 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15:58).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한 후에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은 인류 역사상 한 번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하심으로 그들과 항상 함께 있지 아니 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역사를 섬기는 데에는 때가 중요함을 배웁니다. 어떤 사람은 언젠가는 헌신적으로 주와 복음 역사를 섬길 것이지만 지금은 안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순전히 거짓말입니다. 현재 주와 복음 역사를 섬길 마음이 없는 사람은 미래에도 주와 복음 역사를 섬길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때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화살과 같이 날아갑니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특히 젊을 때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Ⅱ.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9-19)

9-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큰 무리가 몰려 왔습니다. 이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생명의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부활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나사로를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나사로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무리들의 환영을 받으며 당당하게 입성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요 또 고난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신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다니 향연 후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입성할 때는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계를 받으며 백마들이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자색 옷을 입고 위풍당당히 입성했습니다. 이로써 왕으로서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고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이 입성할 때는 방탄 리무진을 타고 무장한 수많은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영광스럽게 입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모습은 마치 코메디언 같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 “나귀 새끼를 타신 저 나사렛 예수를 보라!”하고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약속된 메시야 곧,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주고 다스려 줄 참된 왕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왕을 찾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은 정치나 경제 문제보다 죄와 악령의 세력에 매여 고통하고 시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르짖음은 자신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줄 구원자를 애타게 찾는 부르짖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영적인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왕으로서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어서 하시지 않고 왜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초라하게 입성하신 것입니까?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스가랴 9:9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왕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은 무력과 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줍니다. 세상 나라는 사단이 지배하기 때문에 전쟁과 살인, 파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랑과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스가랴 9:9절은 말합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겸손의 왕이시요 구원의 왕이시요 공의의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메시야 왕국의 특징을 잘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없고 늘 불안하고 두렵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심령에 왕으로 모시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명과 평화로 가득차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잘 깨닫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영적인 눈을 뜨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16).

17-19절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좇을 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 낙심이 되어 서로 말했습니다.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심과 생명을 바쳐서 경배하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영혼을 다하여 찬송하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사랑과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과 그의 복음 역사에 아낌없이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