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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같은 제사장

by Mark Yang   05/01/2022   1Peter 2:4~10

Message


베드로전서 제 2 강

왕같은 제사장

말씀/ 베드로전서 2:4-10
요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제 우리는 제 1강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신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이 산 소망을 가진 자는 나그네의 인생 철학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므로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제 2강은 이 세상에서 신자의 신분이 무엇이며, 또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자세를 확립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더욱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산 돌 되신 예수님(4-8)

 당시 1세기 성도들은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을 피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소아시아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때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마음이 아프고 아프다 못해 상하고 절망이 됩니다. 또 밥맛을 잃고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도 인정받지 못할 때 며칠씩 이불을 뒤집어 쓰고 헤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정받기는 커녕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처량하겠습니까? 이때는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또 슬픈 생각과 함께 "내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회의가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위로와 힘을 주기보다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만이 진정으로 위로와 힘을 얻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슬픈 처지만 생각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자학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어려운 현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부딪히면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세상 친구나 불신자인 부모님에게 나아갑니다. 스피릿이 충만한 목자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장구 쳐줄 만한 비슷한 수준의 동역자에게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시험에 들어 더 헤매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의 날에, 핍박의 날에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 마음이 딱딱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해 괴로울 때, 패배로 인해 절망감이 들 때, 아기가 아플 때, 인간 갈등으로 인해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느냐 나아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나아가서 붙들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의 일생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가운데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함께 하며 사랑과 희생으로 키운 제자들로부터도 배반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동족들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버림을 받아 영문 밖에 팽개쳐져서 흉악범들이 달리는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건축자들이 집을 짓다가 필요 없다고 내버린 돌처럼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사53:3-6)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버림 받은 것으로 끝나게 되면 선이 악에 패배당하고 진리가 불의에 짓밟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게 하시고 진리가 불의를 철장으로 질그릇 부수듯이 부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택하여 보배로운 산 돌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사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빌2:9-11)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산 돌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이 반석이기 때문에 돌을 매우 좋아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첫째로,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모든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산 돌이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음부의 권세가 생명의 주를 무덤에 가두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사망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샘이 되셔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게 됩니다(요4:14). 또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셔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진정한 만족을 얻게 됩니다(요6:35).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요11:25,26)

셋째로, 예수님은 산 돌로서 인생의 기초요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절에서 예수님만이 인생의 집을 짓는데 유일한 기초가 됨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인생들의 유일한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쌓은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 같아서 인생의 환난의 날에 결코 무너지지 아니하고 견고히 서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8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교황 같은 인간이나 신학 이론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또한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고 의지하고 신뢰할 분이 되십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받게 되는 영적 축복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첫째로, 우리는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되어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산 돌(The Living Stone)이신 예수님을 닮아 우리도 산 돌이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죽은 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산 돌이신 예수님과 연합될 때 우리는 산 돌이 됩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만민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받게 됩니다. 에베소서 2:20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우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서 한 사람 한 사람 연합하여 거대한 교회, 곧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한 분 한 분이 집을 구성하는 벽돌과 같이 신령한 집을 짓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자들입니다. 

둘째로,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중보역할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아무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할 수 없고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성소에는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께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둘로 갈라 놓으셨습니다(눅23;45). 그래서 신자들은 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제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곧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물질적이고 의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 곧 영과 진리(Spirit and Truth)로서 드리는 예배입니다(요4:24). 또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12:1).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요(시51:17), 감사와 찬미입니다(살전5:18,엡5:19,20,히13:15). 또한 신령한 제사란 헌신과 희생의 제사입니다. 

 우리는 U.B.F. 개척사를 보면 개척 초기의 선배님들이 많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열정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겼는가 알 수 있습니다. 광주 개척 역사는 판자집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 센타마다 집도 짓고 리더들도 많아지고 핍박이나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센타도 그 동안 많은 축복을 받아 센타도 짓고 주일예배가 600명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뒤에서 묻혀서 지내는 사람들도 많고 초기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우리 나라가 잘 살게 되고 외적 환경이 좋아지면서 요즈음 퍼져가고 있는 안일 문화가 우리에게 침투하여 안일해지고 개척 정신이 퇴조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쓸모 없는 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해가 갈수록 더욱 헌신적이 되고, 더욱 희생적이 되고, 더욱 열정적이 되고, 더욱 순수해지고 더욱 개척적이 되고, 더욱 세계적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모퉁이 돌은 가옥의 두 벽을 연결시키는 돌로서 유대식 건축에 있어 이 돌은 건물의 기초요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예수님을 택하사 구원의 모퉁이 돌로 사용하셨습니다. 6b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합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환난에서 구원받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친히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절대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물질이나 권세나 처세술과 같은 다른 것을 믿을 때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보배가 되시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으면 좋고 믿지 않아도 괜찮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Ⅱ. 왕같은 제사장(9,10)

 사도 베드로는 이때까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산 돌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또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됨을 증거했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베드로는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말씀은 출애굽기 9:5,6절에 있는 말씀으로 본래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들을 열국 중에서 그의 소유로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행자지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모든 축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새 이스라엘인 크리스천에게 넘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천이 갖게 된 영적 신분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택하신 족속입니다. 이는 선택받은 자들, 뽑힘을 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택함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택하사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신령한 보화를 허락해 주셨습니다(벧후1:3,4).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몰라보고 무시합니다. 목자라고 하면 목자가 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 시대의 엘리뜨들입니다. 

둘째로,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인간은 죄악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불완전한 짐승의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속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사 단번에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5:18).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자들에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이 감당해야 할 복음의 제사장 직무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복음의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이라도 보통 제사장이 아니고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란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권위와 고상한 품위를 말해 줍니다. 왕이 되려면 왕도를 가져야 합니다. 왕은 말이나 행동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내면은 모든 백성을 품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어야 합니다. 또 역사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이조 말년 안동 김씨들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강화 도령이라 불리우는 철종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화도에서 나무나 하며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왕도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그가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전하! 그렇게 행동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체통을 지키소서" 하였습니다. 또한 철종은 어머니의 은가락지를 끼고 다니며 늘 어머니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신하들은 "상감마마 아녀자의 가락지를 끼고 계시다니 체통이 서질 않사옵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시면 아니된 줄 아뢰오. 전하 어서 빼소서." 그는 체통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마시고 미칠 지경이 되어 어느 날은 개구멍으로 도망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노릇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 물들어 죄악된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의 보배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할 수 있는 왕족이 되었습니다(딤후2:12).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왕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왕답게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고, 또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 어떤 종류의 사람도 이해하고 품고 섬길 수 있는 깊은 이해심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우리가 속이 벤뎅이 속알딱지처럼 좁아서 한 사람도 품고 섬기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또한 왕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세상 풍조를 좇아 째째하게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왕 같은 제사장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본국 캠퍼스 뿐만 아니라 세계 187개국 캠퍼스를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미국, 일본, 독일 및 서방 선진국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중공, 헝가리, USSR을 품고 섬기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본국에서 얼마든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존경받으며 잘 살 수 있는데도 이를 부인하고 세계 각 곳에 흩어져서 왕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Augustine Hope Song 선교사님은 학창 시절에 충성되게 목자 생활을 하면서 평점 4.3으로 이공대 수석으로 졸업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대학원도 All A+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유명 여러 대학에서 좋은 조건으로 admission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USSR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하고 고난이 많은 USSR에 나아가 헌신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또 한국경 목자님은 이제 듬직한 요셉과 예쁜 지현이를 얻고 태능에 "국경 크리닉"도 개설하고 사모님도 전문의가 되셔서 얼마든지 여기서 존경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서부의 시에라리온이라는 오지로 나가고자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세계 각 곳에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셋째로,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는 세상 나라와 구별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성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달리 세상 가치관과 유행을 좇아 살지 않고 주의 거룩함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넷째로,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기서 소유란 얻고,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배피로 우리를 값주고 사시고 그의 소중히 간직하시는 백성 삼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는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고 챙깁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기시고 챙기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위험과 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그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이상 4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영적 신분입니다. 이 영적 신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특권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이 이 땅에서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과거 우리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좇아 살며 어두움의 종노릇하였습니다(벧전4:3). 우리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사 그의 기이한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내 가운데 이루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선전해야 하고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목자의 심정과 능력을 선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 사랑과 용서를 알지 못합니다. 허무와 두려움과 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사단의 거짓 선전에 속아 예수님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을 선전할 때 오해와 편견이 풀리고 예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선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홍보실을 사장 직속에 두고 운영하며 10% 정도를 선전비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상품을 사게 만들 수 있는가 많은 연구를 합니다. 우리는 멋과 여유하면 르망 자동차가 생각이 납니다. 마치 르망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면 멋과 여유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선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선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멋과 여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힘써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때 생명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올해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전할 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선전할 수 있을까 새롭게 연구를 해야겠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양들의 변화를 연구하고 새롭게 말씀을 연구하여 전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회사원이나 교사나 의사로서 또는 한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또 부모님의 아들이나 딸로서, 또한 학생으로서 여러 가지 신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가정과 캠퍼스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방 캠퍼스에 나아가 세계 187개국에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전부장의 직분을 감당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