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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즐거움

by Mark Yang   05/01/2022   1Peter 3:8~4:19

Message


베드로전서 제 4 강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즐거움

말씀/ 베드로전서 3:8-4:19
요절/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은 고난 중에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인데 그 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우리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크고 작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기 때문에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외적 고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캠퍼스나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하기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또 사명인으로서 2중 3중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대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Ⅰ. 의를 위한 고난 (3:8-17)

첫째, 마음을 같이 하여 사랑해야 됩니다(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여" 이 말씀은 고난의 때에 신자 상호간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게 되면 마음이 움츠러들어서 자기 중심적이 되고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만 고난받는 것처럼 마음이 딱딱해지고 남에게 관심을 갖기가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 동정하고 형제같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 때 서로 힘과 위로를 얻고 고난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기쁨은 서로 나누면 배가 되지만 고난을 서로 나누면 반감이 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보배 피로 맺어진 한 형제입니다. 또한 같은 배를 탄 동료요, 복음의 원수와 싸우는 전우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요 동역자입니다. 경쟁자라고 생각할 때 서로 경계하고 약점을 헐뜯고 싸우게 되지만, 동역자라고 생각할 때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9-12). 9절 말씀은 외적 박해자들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매하게 비난을 받거나 욕을 얻어먹게 되면 마음에 분노와 복수심이 생겨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속담과 같이(삼상24:13) 그와 꼭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눅6:27,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실천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곧 평화롭고 값진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며 악한 말을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게 되면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어 혈압이 올라가고 오래 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평화롭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5: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아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9b). 또한 하나님은 의인은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12).

셋째,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13-15). 13절 말씀은 우리가 어떤 육체적인 고통이나 물질적인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능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면 실제적으로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입니다. 이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마5:19).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는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핍박 받을 때 두려워하거나 소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핍박을 받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핍박자들이 크게 부각되어 모든 것을 잃고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높일 때 핍박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86세 때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를 처형하는 관리가 그를 아깝게 생각하여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그러면 너를 풀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고 그는 한번도 내게 잘못 대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저주하겠는가" 하며 기꺼이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폴리캅은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한 것입니다.다윗은 그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시 27: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핍박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예비해야 합니다. 내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내가 왜 십자가가 많은 사명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목자요 선교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내가 믿고 있는지, 왜 내가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분위기가 좋으니까 막연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 믿고 유익이 되면 계속 믿지만 손해가 되거나 핍박이 생기면 조금 갈등하다가 제 갈 길로 가고 맙니다. 이런 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줏대가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내가 왜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 목자로서 이 길을 가고 있는가'하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분명히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야 됩니다. 대답하되 당돌하고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과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넷째,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16,17). 핍박을 받게 되면 믿음의 절대성을 잃고 상대화 되기 쉽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양심을 속이고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적 힘을 상실하여 고난을 이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때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질 때 바른 증거를 할 수 있고 용기를 가지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한 세상에 살면서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케 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리라" 우리 인생들의 삶은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고난을 받을 바에야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100배나 낫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되셨습니다. 

Ⅱ.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자세(3:18-4:11)

(ⅰ)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3:18-22)
 18절은 아무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는 단 한번으로서 완전히 죄를 속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죽으심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안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도달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망망한 대해에서 흉융한 죄의 파도에 빠져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장이 되셔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항구인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19절 말씀은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 노아 시대에 그 영으로 의의 전파자 노아를 통하여 순종치 아니한 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120년 동안이나 참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순종치 아니함으로 현재 지옥에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는 겨우 8명에 불과했습니다. 물은 순종치 아니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물이었지만 순종한 자들 곧 물심판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구원의 물이었습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인데 이는 곧 세례를 상징했습니다. 세례란 육체의 불결을 씻는 결례와 같은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례는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과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곳에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후에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따르는 자는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ⅱ)우리의 자세(4:1-11)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4:1절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을 때 보여 주셨던 용기있는 마음가짐과 자세로 우리도 영적으로 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벧전2:24).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질 때 자연히 죄와 인연을 끊게 됩니다. 그 후로는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입니다(2). 다시 말하자면 이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 말합니다(3). 우리는 항상 죄를 충분히 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어서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껏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학년 때부터 이곳에 나와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너무 일찍 이곳에 나와 죄를 실컷 짓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소감 쓸 거리가 많고 또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에 지은 죄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짓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불신자들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핍박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과 같이 타락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들의 거룩한 삶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그들의 죄악된 삶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방을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장되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5,고후5:10). 이를 위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됩니다(6). 

둘째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7).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요사이 걸프 전쟁을 볼 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인류 최후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맡은 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1,12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홀연히 임하게 됩니다. 

셋째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2절에서 말세의 징조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사랑이 메마르고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배경 가운데서 신자들조차도 사랑이 메말라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또 비판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약점을 감당해 주고 병든 내면을 치료해 줍니다. 어머니는 자기 낳은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리 똥오줌을 싸도 이를 다 섬겨 줍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약점도 사랑스럽게 보여서 이를 감당해 주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잘해도 밉게 보이고 장점보다 약점이 크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0:12) 

 사도 베드로는 본래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허물과 실수 때문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기간 중에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위대한 사도는 커녕 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허다한 허물과 실수를 다 덮어 버렸습니다. 이 기이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절 말씀은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사랑은 대접받기 보다 대접하는 것이요, 섬김 받기 보다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합니다(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절에서 "누가 말하려면"의 뜻은 "누가 메시지를 전하거나 강의를 하려면"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또 "누가 봉사하려면"은 "누가 구제를 하거나 병자를 위문하거나 역사 환경을 만들거나 섬기고자 하면"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가 하는 것처럼 광을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을 위해서 책임성 있게 재산을 잘 관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선한 청지기 같이 우리에게 있는 은사를 잘 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1b절은 송영입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12,1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우리는 예수 믿으면 아무 문제없이 평안히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많은 환난을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그러나 이는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쓰실 만한 자로 삼으시기 위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환란을 통해 연단하십니다.이 연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히12:6). 연단이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히12:8). 욥은 아무 죄 없이 사단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욕창이 나서 큰 고통 중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또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난은 신자의 삶을 성결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고난이 없이 편안히 지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일해지고 심령이 부패해져서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게 되면 영적으로 깨어 있어 말씀을 붙들고 투쟁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붙들고 있던 세상의 헛된 욕심과 헛된 소망, 헛된 명예심을 털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순수하고 진실 되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고 내면이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13b). 고난을 통해서 맺어지는 영적 열매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또 신실치 못하거나 게을러서 고난을 받는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충성되고 선행을 하는데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고난 받는다면 복된 것입니다. 그때는 영광의 영이 그 위에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인하여 너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1,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신자들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증거입니다(17). 신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엄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해야 합니다(19). 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교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불신 세상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받습니다. 과거에는 고난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못쓰게 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싫어하고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은 장차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보증수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사랑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