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by Mark Yang   05/01/2022   1Peter 5:1~14

Message


베드로전서 제 5 강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베드로전서 5:1-14
요절/ 베드로전서 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사도 베드로는 4장까지에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교훈을 일단락 지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장에서는 목자들이 양무리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와 젊은이들이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양무리들을 돌보는 목자들입니다. 또 동시에 우리는 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권면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서 목자로서 또 젊은이로서 우리의 자세를 바로하여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큰 영적인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Ⅰ. 목자들에게 주는 교훈(1-4)

 사도 베드로는 먼저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연장자로서 나이가 많은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장로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자를 말하지 않고 직분을 의미했습니다. 장로의 직분은 양들을 세상의 죄악과 이단 사상으로부터 지키는 감독과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양육하는 목자였습니다(행20:28). 베드로는 그들에게 권면하되 같은 입장에 서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다." 당시 베드로는 사도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그들과 꼭 같은 장로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a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이 말씀은 장로들의 주된 사명이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많은 할 일이 있지만 양무리를 치는 것처럼 고귀하고 값진 사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일이요, 또 우리에게 유언적으로 부탁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요21:5). 이는 목자의 의무요, 책임이요, 동시에 큰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침으로써 생명의 열매를 맺는 가장 보람되고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데 좇지 못한 마음 자세와 동기로 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목자가 어떤 마음 자세와 동기로 양무리들을 쳐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됩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2a)". 목자는 양무리를 칠 때 부득이함으로 하기 쉽습니다. 이는 마음에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는 양무리를 쳐야 하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하거나 체면 때문에 하기 쉽습니다. 이때는 양치는 것이 부담스럽고 큰 고역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발 양이 오지 말아 주었으면 바라게 됩니다. 그러면 양들은 이를 예민하게 느끼고 몇 번 공부하다가 그만두게 됩니다. 이런 목자 생활에 기쁨이나 은혜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심령이 무겁고 피곤의 연속이 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목자 생활이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양무리를 돌보는 마음 자세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무리에 대한 마음 자세를 바로 해야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자원함이란 자기 의사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소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과 소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원함으로 하게 되면 심령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또 일에 능률도 오르고 창의적으로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눌려서 끌려가는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양들도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자원함으로 한다고 해서 자기 열심에 기초하기 쉽습니다. 이 때는 오히려 양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원함으로 하되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순수한 동기로 양을 쳐야 합니다. 2b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더러운 이'란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심, 자기 만족이나 세력 확장과 같은 사욕을 의미합니다. 생활비를 받는 목회자들을 삯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역을 감당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 내면은 말로 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1대1을 하고 돈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을 많이 침으로써 인정받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할 때 양이 인격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 수를 채우기 위한 숫자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양들을 이용하게 되고 푸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양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됩니다. 사욕을 위해 양을 칠 때 결국 양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칠 때 순수한 동기로 쳐야 합니다.
 즐거운 뜻으로 하라는 것은 순수한 동기로 소명감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양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고 순수하게 그 영혼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양은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러므로 양은 조심스럽게 섬겨야 할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양을 목적으로 삼고 순수하게 그 영혼이 잘 되도록 섬길 때 양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더 나아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맡기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뢰하여 양들을 맡긴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양들을 맡기실 때는 양들을 겸손과 온유로 잘 돌보도록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이를 착각하여 양을 주장하기 쉽습니다. 주장한다는 것은 위에서 통치하고 주관하는 것으로서 독재자와 같이 군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는 양이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게 됩니다. 겉으로는 순종을 잘 하는 것같지만 속으로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요 믿음을 돕는 자입니다(고후1:24). 그러므로 목자는 양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갖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즉 개인 신앙을 갖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자가 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돕더라도 양은 목자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한다고 해서 따르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가 말보다도 실제로 본을 보일 때 그대로 따라 하게 됩니다. 저는 목자들이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내 자신을 살펴보니 바로 내가 이런 저런 이유로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내 탓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알게 모르게 악영향을 많이 끼쳤음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고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늦으면 저도 손을 들고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목자들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양무리들에게 매사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또 때로는 양들에게 권위가 안 서고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됨으로 2배의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양무리의 본이 될 때 양은 마음으로부터 목자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신뢰하고 안심하고 따라 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시더라도 본을 보이지 아니할 때 아무도 그렇게 할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섬김 받는 자가 더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예수님은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기심으로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양무리의 본이 되고자 할 때 쉽게 지치고 피곤해지게 됩니다. 이제는 오히려 목자가 양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무리의 본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양무리의 본이 되려면 내가 먼저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야 됩니다. 그 때 자연히 양무리의 본이 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자 생활하면서 처음에는 가장 가치있고 보람된 일이기 때문에 열심과 정열로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같은 일이 반복되자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 기자의 고백대로 목자 생활도 그저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자 피곤한 생각이 들고 같은 일을 일생 동안 반복해서 해야 될 것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러다가 빌립보서 말씀을 읽는 중에 한줄기 빛이 제 마음에 강하게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열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실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도 60이 넘는 나이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옥에 갇힌 자가 되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에 넘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빌4:4).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본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빌3:10,11). 그 이후로 저의 목자 생활에는 분명히 방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게 되자 영적 기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족하지 않고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예수님을 본받고 배우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을 때 우리는 자연히 양무리의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원함과 순수한 동기로 양을 치고 양무리의 본이 되는 생활을 할 때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을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4).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속이 시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상을 받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장차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희망할 때 우리는 손해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확신있게 목자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Ⅱ.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5-7)

 사도 베드로는 이제 젊은이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5)" 

첫째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됩니다. 젊은이들은 힘과 정열이 넘칩니다. 또한 반발심도 넘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청개구리 심리가 있어서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합니다. 청소를 하려고 했다 가도 하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여 반발심 때문에 안 해 버립니다. 그래서 일이 되도록 하려면 거꾸로 시키면 될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장로들에게 반발합니다. 장로들은 생각이 굳어 있고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구시대이기 때문에 세대 차이로 인해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반발합니다. 그러나 반발심은 깊이 생각해 보면 죄의 속성으로서 결국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반발심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복종치 않는 데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반발심을 극복하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장로들에게 순복하는 것은 더 근원적으로 따져 보면 결국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배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복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영적 질서가 파괴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됩니다. 또한 우리도 나중에 장로가 되기 때문에 순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순복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빌2:5).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빌2:6-11). 히브리서 5:8,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순종함을 배웠는데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쉽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꽉 막혀 성장을 못하게 되고 결국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5).

 교만은 사단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은 거스리게 됩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고 반발적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시고 대적하십니다. 대적한다는 것은 군사용어로서 원수를 반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은 원수를 반격하듯이 그를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하나님의 군대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실로 패망의 선봉입니다(잠언16:18).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안 될 일도 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겸손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통제적 섭리 아래서'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높이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겸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쓰실 만한 자로 성장 할 때, 때가 되자 자연히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귀히 쓰십니다. 구약의 요셉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 그 곳에서 가정총무로서 겨우 자리를 잡아가자 이제는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받아 이를 거절하다가 지저분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때 그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은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그를 총리대신으로 높이시고 생명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7절 말씀은 우리의 모든 염려와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돌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Ⅲ. 마귀를 대적하라(8-15)

 사도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결론적으로 마귀와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있지 않고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엡6:12). 마귀는 부지런합니다. 마귀는 결코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습니다. 마귀는 연중무휴로서 열심히 일합니다. 마귀는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는 것과 같이 열심히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마음이 연약한 자, 두려움이 많은 자, 회의 하고 불신하는 자, 게으른 자, 불평 불만이 많은 자, 교만한 자, 부정적인 생각을 잘하는 자들은 마귀의 좋은 먹이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마귀는 강하고 간교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오직 믿음으로 대적할 때 물리칠 수 있습니다(9). 야고보 선생님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나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알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됩니다(9b).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잠깐이지만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잠깐 고난을 받은 우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십니다.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2-15절은 마지막 인사입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의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15).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는 생활을 통해서 양무리의 좋은 본이 되는 선한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되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을 배워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